송명천 - 자객열전 자객열전 ♠♠ 제 1 장 서곡 검은 색 커튼으로 가려진 창 틈으로는 한 줄기 빛도 새어 나가 지 못하게 완벽히 실내의 불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30평 남짓한 실내는 짙은 청색의 제단과 카펫이, 흐르는 음악과 어울리며 더욱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 오십 명의 남녀들은 속살이 훤히 들려다 보이는 하얀 망사로 만들어진 잠옷 같은 옷 을 입고 있었다. 흐르는 음악은 느리면서도 강약이 두드러져 듣는 이의 마음을 이끌고 있었다. 사람들은 청색의 카펫 바닥에 주저앉아 알아듣기 힘든 주술 같은 주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음악 소리에 묻혀 은은 한 종소리가 들려오며 제단 옆에 있는 문이 열리며 청색의 망사를 입은 남녀가 실내로 들어섰다. 실내에 있던 남녀들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을 끓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청색 망사의 사 내가 제단 위에 설치 된 마이크를 들고 제단 밑으로 내려 섰다. 나이에 비해 사내의 육체는 강인해 보였다. "형제 여러분, 오늘도 우리 모두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다 시 만나게 된 것을 우리의 영원한 번식의 신이신 조물주 님께 머 리 숙여 경배하며 그 아들인 우리 사제장님에게 성스러운 우리의 몸짓을 보여 드립시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 실내에는 전혀 색다른 음악이 흘러 나왔다.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흐르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 기 시작했다. 가지각색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과정에서도 그 들은 모두가 독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옆 사람 과의 신체적인 접촉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혼자만의 환상에 빠 져들어 가고 있었다. 실내는 신도들의 열정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청색 망사의 남녀 들은 제단 바로 앞에 일렬로 나열하여 신도들의 춤을 이끌고 있는 듯 하였다. 실제로 그들의 앞에는 어쩐지 어색해 보이는 남녀들이 다른 무리들과는 엉성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청색 망사를 입은 제사장들의 동작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듯이 열심히 쫓고 있었다. 잠시 후 청아한 종소리가 울리자 흐르는 음악 소리가 멈추고 신도들의 움직임도 일순간에 멈추었다. 조명을 위한 빛이 제단 옆의 문을 비추고 실내에는 또다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제사장이 들어서자 신도들은 괴성을 지르며 머리 를 읊조리고 있었다. 제사장을 양옆에서 호위하며 들어서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미색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제단 위에 올라 선 제사장이 손을 높이 쳐들자 실내는 일순 정적에 빠져들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우 리의 조물주 님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영광을 감사 드 리며 이 시간에도 세계 방방 곳곳에서 번식을 위한 성스러운 의 식을 행하고 있는 모든 형제들의 머리 위에 조물주 님의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우리 모두 기원합시다." 제사장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실내에 맴돌고 있었다. 제사장은 잠 시 주위를 둘러보고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은 특별히 여러 형제들을 위하여 의식에 들어가기 전에 멀 리 외국에서 초청한 전도사 한 분을 모시고 교육에 들어 간 뒤에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가 전도사의 탁월한 능력을 눈여겨 보시고 배우시길 바랍니다." 자객열전 ♠♠ 제 2 장 내 이름은 자유인 ♠♠ 몸짓 경배가 끝나자 집회는 막을 내렸다. 신도들은 모두가 얼굴 가득 만족한 표정으로 하나 둘 신전을 빠져나가 대기 해 있는 버 스에 올랐다. 모든 신도가 버스에 오르자 버스는 새벽의 어둠을 뚫고 사라져 갔다. 원형의 탁자가 놓인 방은 십 여명의 사람이 기거해도 충분하리 만치 넓었다. 마치 최고급의 호텔 방에 들어선 것 같이 실내는 고 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중앙에 있는 사각의 천연 대리석 책상에 는 조물주의 형상이 놓여 있었다. 조물주의 형상은 수 없이 많은 남녀의 모습이 합쳐져서 하나의 괴기한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찬찬히 살펴 보면 조물주의 얼 굴 모습을 이루는 남녀의 형상은 하나 같이 섹스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제사장은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모시,모시." 전화를 받는 상대방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청아한 목소리였 다. 제사장은 일본으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안녕 하십니까! 한국 진리교의 제사장입니다. 야마다상은 주 무시는지요?" "아, 제사장님! 그러치 않아도 야마다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 다. 잠시 기다리세요." 전화를 받은 사내는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하자 더 없이 부드러 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아, 야마다 입니다. 집회는 무사히 끝났습니까?" "네, 무사히 끝났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오야봉 게서도 제사장님의 노고에 박수를 보 내고 있습니다." "하이, 감사합니다." 제사장은 오야봉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머리를 깊숙이 조아 렸다. " 테이프는 제대로 촬영 됐습니까?" "예, 지시대로 촬영했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내일 일본으로 건너오는 일본 대사관의 참 사관이 있습니다. 그 자에게는 사전에 연락이 되어있으니 그 자 편에 테이프를 보내 주십시오." "네." "그리고 이건 오야봉의 지시 사항입니다. 신도들의 포교 활동 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는 지시입니다." " 네, 지금도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뛰겠다고 오야 봉에게 알려 주십시오." 제사장은 전화를 끊고, 인터폰으로 사제관을 연결 하여 수석 사 제 7명을 방으로 불렀다. 7명의 수석 사제들은 제사장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모두가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원탁의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오늘 집회에도 철저히 보안에 신경을 썼겠지?" "네, 형님." 7명의 사제들은 놀랍게도 제사장을 형님 이라고 호칭 하였다. "그리고, 새로 가입 한 촬영사에게는 교육을 확실히시 켰나?" "네, 집회 촬영 중에는 절대 형님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지 못 하도록 했습니다." "오늘 촬영 한 네 개의 필름은 오늘 밤 안으로 복사하여 내일 일본 대사관의 참사관인 모리가또라는 자에게 전하도록 하라." "네." 일곱 사제들의 자세는 엄숙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 오야봉의 지시 사항이다, 신도의 포섭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요구다, 하지만, 무리한 접근은 노출의 위험이 있으니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고." " 네, 형님, 실수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 이번에 새로 가입한 얘들은 어디 소속이야?" " 네, 모두 4명이 가입했는데, 두 명은 반도체 연구소직원으로 둘 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또, 나머지 한명은 대학 전임 강사 이고 한 명은 H그룹의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 모두가 교육은 제대로 되어 있겠지?" " 네, 모두가 광적으로 교리를 믿고 있습니다. 이제는 형님의 말 이라면, 아니, 조물주의 계시라면 죽음도 불사 할 정도입니다." 제사장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오늘 데려온 그 깜둥이는 잘 처리 됐어?" " 네, 독거미가 맡아서 처리했습니다." " 독거미가...... 독거미가 맡았다면 잘 했겠지, 시체 처리는 완벽 하게 태워버려, 그런데 그 놈 정말 크더만, 꼭 말 좆 같지 않아?" 제사장이 웃자 사제들도 조용히 따라 웃었다. " 오늘 촬영 한 필름은 빨리 복사하여 배포하고, 새로 들려온 복사기 화질은 괜찮아?" " 네, 복사 속도도 빠르고 화질도 원판과 진배 없습니다. 하루 저녁이면 약 1000개 정도는 복사 할 수 있습니다." " 모두 몇 개나 만들고 있지?" " 네, 지난달에는 만 개를 제작했는데 이번달 집회 분은 이 만 개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테이프를 찾는 사람이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 테이프 복사 시 잊지 말고 복사 방지 프로를 꼭 집어넣어, 혹 시 라도 단 한 개라도 그냥 흘러 나가면 어떤 놈이 왕창 복사해 서 장사 해 먹으면 우리는 끝장이야, 알았어... 복사방지 프로그램 은 믿을 만 한가?" " 네, 믿을 만 합니다, 전자상가에 알아보니 날고 긴다는 아이들 도 전혀 손을 못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달 프로그램이 변형돼 서 제작되고 있는 까닭에 완벽합니다, 모리상께서 자랑 할 만 합 니다." " 그래... 그래야지, 우리 나비의 축제는 아무나 볼 수 있는 테입 이 아니지 똑똑하고 잘 난 인간들만 봐야지, 안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사내들은 모두 제사장의 웃음을 쫓아 큰 소리로 웃어 제켰다. *삿포로에 날씨는 벌써 한 겨울로 들어섰다. 남쪽 지방에 비 해 삿포로는 겨울이 일찍 찾아 왔다. 지난주에 내린 큰 눈을 비 롯해서 이번 주만도 이틀에 하루 꼴로 눈이 내렸다. 삿포로의 시 관계자들은 눈이 내리자 바빠지기 시작했다. 해마다 겨울이면 개 최되는 삿포로의 눈 축제는 이제 세계인의 관광 축제가 되어 있었 다. 눈이 내리자 삿포로를 찾아드는 관광객의 숫자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모리 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코모도 호텔도 관광객 맞이에 분 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내에 자리 한 코모도 호텔은 지리적 인 여건도 좋고 흰 눈에 덥힌 모리 산을 전망 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탓에 언제나 겨울이면 투숙객들로 만원이었다. 코모도 호텔의 VIP 룸은 두 개가 있었다. 전망이 좋은 10층에 자리 한 룸은 언제나 비워 있었다. 일 년에 서너 차례 외국의 대 부호나 일본 정계의 거물이 투숙하는 것이 고작 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하루 숙박료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제 호텔 후론트 담당 과장은 한 사내의 전화를 받았다. 방을 예약하고 싶은데 VIP 룸으로 하고 싶다는 말에 과장은 긴장을 하 고 상대방의 신원을 정중히 물어 보았다. 전화로 VIP 룸을 예약 하는 경우에는 정부 부처나 재벌 기업의 비서실에서 사전에 전화 를 하는 경우에 속했다. 전화를 걸어 온 사내는 과장의 물음에 자신의 이름이 마사키오 라는 대답과 3시간 후에 찾아 갈 테니 빈 룸이 있으면 예약을 부 탁한다는 짧은 말과 함께 룸의 투숙 여부를 물어 왔다. 과장은 룸은 비워져 있으나 금액이 워낙 고액이라 상대의 신원을 다시 금 물어 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룸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삼 일을 예약 해 줄 것을 알리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과장은 전화를 내려놓고 실소를 지었다. 하루 숙박료가 자신의 두 달치 봉급과 맞먹는 금액인데 하루도 아니고 삼일씩이나 투 숙하겠다는 녀석이 있으니 과장은 장난 전화나 졸부의 객기로 생 각했다. 졸부의 객기라면 찾아 왔을 때 숙박료를 알려 주면 입을 벌리고 돌아 설 것이라고 생각 했다. 예약 전화가 온 사실도 잊은 체 분 주하게 업무를 보고있던 과장은 후론트의 호출에 달려갔다. 후론 트에는 50대로 보이는 사내가 작은 여행 가방을 발 밑에 내려놓고 서 있었다. 사내는 분명 3시간 전에 전화로 예약을 했는데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후론트 직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후론트 직원은 중년의 사내가 이름을 대며 예약을 확인하자 예약 스케 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내는 VIP 룸을 확인 해 달라고 하였다. 분명 삼 일을 예약 했다는 것이었다. VIP 룸이라는 말에 직원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일시에 정중한 자세로 잠시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하고는 과장에게 알렸던 것이다 VIP 룸의 예약은 과 장의 소관 업무였다. 과장은 눈앞의 사내를 살펴보았다. 간편한 정장 차림의 사내에 게는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고 몸에 걸친 간편한 정장도 한 눈에 최고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과장은 자신의 실수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를 하였다. 이 사실 이 위에 알려지면 심하면 파면까지도 갈 수 있는 실수였다. 다 행히도 사내는 과장의 실수를 덮어주고는 삼일치의 숙박료를 선불로 지급하고 많은 금액의 팀을 후론트 직원들에게 나눠주고는 가방을 들고 앞서 걸어가는 과장의 뒤를 쫓아갔다. VIP 룸의 대형 유리 창 너머로 모리 산의 전체적인 모양이 한 눈에 들어 왔다. 흰 눈에 쌓인 모리 산은 해살에 빛을 발하며 위 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모리 산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는 쓸쓸 함이 깃들어 있었다. 사내는 산을 보고 있으면 처절한 외로움 이 밀려 들곤 했다. 그럼에도 사내는 산을 좋아했다. 산을 보고 있 으면 가슴 아픈 추억이 밀려들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능함을 내 세워 온 가족을 못 살게 굴었 던 계모는 급기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 세웠다. 젊은 계모는 사업에 실패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는 아버지에게서 가계의 부담과 함께 잠자리의 욕구 불만까지도 참을수 없는 욕 짓거리로 아버 지를 닦달 거렸다. 끝내는 이웃집 남자를 집으로 불러들여 육욕을 채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펴가며 아버지가 자리에 없는 틈을 이용하더니 나중에는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 에도 사내를 불러 드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 하셨다. 어느 날, 눈이 많이 내리던 그 날도 계모는 사내를 집으로 불러들여 한 차례 욕정을 채우고는 사내와 공모를 하기 시작 했다. 사내는 계모가 새로 사귄 사내로 시장 통의 건 달이었다. 계모는 아버지를 죽이고 사내와 함께 살 궁리 끝에 아 버지에게 잔뜩 술을 먹이고는 방안에 연탄불을 피워놓아 아버지 는 연탄가스중독으로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사내는 어 린 나이에 계모의 부정을 낱낱이 보았다. 계모가 사내를 불러들여 작은 방에서 뒹구는 모습도 문 틈으로 여러번 보았다. 아버지를 살해하기로 건달과 모의하는 소리도 사내는 문 틈으로 들을 수있 었다. 사내는 계모가 자신까지 죽일 것 같아 집을 도망쳐 나와 먼발치에서 건달과 계모가 아버지의 방으로 연탄 화덕을 들고 들 어가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 보았다. 아버지를 살리고 싶었지만 계모와 함께 있는 건달의 얼굴에 나있는 깊은 칼자국 흉터가 무 서웠다. 사내는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고만 있었다. 건달이 주위를 살피며 돌아가고 계모는 당황하는 모습으로 아버지 방을 나와 마 루에 걸터앉아 아버지가 먹다가 남기신 소주를 병째로 벌컥거리 며 마셨다. 계모도 살인을 한 사실에 놀라는 눈치였다. 계모는 꽤 나 많은 양의 소주를 마시고 작은 방으로 비척거리고 들어갔다. 사내는 계모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고도 한 참을 추위에 떨며 밖 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어둠이 내리자 사내는 조심스럽게 마당을 가로질러 작은 방으로 향했다. 계모의 방에서는 계모의 코고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사내는 계모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다. 불을 안 밝힌 아버지의 방은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사내의 다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내는 조용히 아버지를 불러 보았다. 아버지는 아 무 대답도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덜컥 무서움이 밀려 들었다. 사내는 방안의 불을 밝히었다. 어둠이 밀려나자 파리한 아버지가 입가에 침이 흐른 상태로 누워 있었다. 연탄 화덕은 건달이 돌아가기 직전에 방에서 내어갔는데도 방안은 연탄가스냄 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아버지를 작은 소리로 부르며 흔들어 보았다. 아버지의 차가운 몸은 벌써 굳어 있었다. 사내는 아버지의 죽음 을 깨닫고 소리내어 울었다. 아버지를 구하지 못한 자신이 미웠 다. 건달이 무서워 숨어있던 사실이 창피하고 분했다. 아버지를 죽 인 계모가 죽이고 싶었다. 사내는 아버지가 자신을 비겁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내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부엌으로 향했 다. 사내는 부엌에서 커다란 부엌칼을 들고 계모가 있는 작은 방 으로 뛰어들어갔다. 문이 부서지게 열리는 소리에 계모는 눈을 떴다. 계모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서운 형상으로 칼을 내려치고 있는 작은 사내의 모습이었다. 사내의 작은 눈에는 불길이 일고 있었다. 사내의 작은 손에 들린 부엌칼은 계모의 목을 뚫고 들어 갔다. 피가 뿜어져 나오고 계모의 손이 사내의 어깨를 부여잡았 다. 사내는 미친 듯이 계모의 가슴과 온 몸을 수 없이 찔러 되었 다. 방 안은 피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사내는 온 몸에 피칠 을 하고 작은 방을 뛰쳐나와 무작정 앞산으로 달려갔다. 눈이 쌓인 밤길을 사내는 수없이 넘어지며 무작정 앞 산으로 달려갔다. 달빛은 쌓인 눈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사내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동네를 돌아 다 보았다. 듬성 듬성 떨어져 있는 집들의 창으로 불빛이 흘러 나왔다. 동네 사람들은 지금쯤 저녁 밥상에 모여 앉아 웃음 꽃 을 피울 것을 생각하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머님만 돌아가시지 않았어도 아버지는 살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광주의 사기꾼과 농산물 유통 사업만 안 하셨더라도 오늘처럼 불쌍하게 돌아가시 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사내는 계모를 죽인 것이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원통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모습 이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아 아버지의 시신을 다시금 보는 것이 두려웠다. 사내는 산의 중간 쯤에서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동네 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다시는 이 동네에 돌아올 수 없다는 사 실을 어린 사내는 알고 있었다. 계모를 죽였으니 순경이 잡으러 오리라는 사실에 사내는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계모의 학대와 아버지의 술주정, 아버지의 죽 음, 계모의 죽어가며 부릅뜨던 섬짓한 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 다. 사내의 나이는 12살 이었다. 작은 사내는 쌓인 눈을 헤치며 밤새워 산을 걸어 나갔다. 사내 가 사는 동네의 앞 산은 지리산과 연결 된 작은 동산 이었지만 동산 너머로는 거대한 지리산의 연장이었다. 사내는 날이 밝는 것 조차 잊은 체 걸어가고 있었다. 산은 갈수록 첩첩 산중이었다. 사 내의 눈은 초점을 잃은 듯이 멍하게 보였다. 어린 나이에 간밤의 사건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사내는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겼 다. 추위도 두려움도 없었다. 머리 속에는 멀리 가야 한다는 생 각만이 사내의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날이 밝았어도 주위는 어두웠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검은 구름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내는 점점 깊은 산으로 들어 갔다. 발이 눈에 빠져들어 걷기가 힘들었다. 사내는 추위와 허 기에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노여운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계모의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기억이 희미한 죽은 어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사 내는 차가운 눈밭에 쓰러졌다. 밀려오는 잠을 떨쳐버릴 수가 없 었다. 사내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잠든 사내의 머리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내가 눈을 뜬것은 눈밭에 쓰러진지 사흘만에였다. 까마귀들 의 울음소리가 심상치 않아 굴 밖으로 나온 무심도인의 눈에 사 내가 발견된 것은 천운이었다. 무심의 의술이 아니었다면 사내는 어느 누구도 살려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내는 사흘내내 악몽 속에서 헤메이다가 기적적으로 눈을 뜬것이다. 사내는 의식을 회 복하고도 악몽에 시달리다 혼절하기 일수였다. 사내는 무심 도인과 함께 산중 생활을 시작하였다. 먹는것은 산 에서 나는 온 갓 열매와 나물이 대다수였고 이따금 무속인들이 산 기도를 하러 왔다가 두고 가는 식량이 어쩌다 먹을 수 있는 별식 이었다. 하지만 무심 도인은 철저하게 생식을 하고 있었다. 무심 에게 식사는 하루 한번 점심 때 먹는 솔잎이 식사의 전부였다. 무심 도인은 무협지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기인이었다. 열 일곱에 입산하여 오십년을 산중에서 참선과 무예만을 연마 해 왔다. 무 심의 무예는 세상에서는 볼 수도 알지도 모르는 무예였다. 옛부 터 산중에서 도를 닦는 기인들이 연마하고 발전 시켜온 그들 나름 대로의 특출한 무예를 무심은 오십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하나로 통합 할 수가 있었다. 사내는 무심과의 생활이 일년이 지나서야 무심에게서 무술을 배 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조금씩 이었다. 무심은 사내의 심성 이 지난날의 충격으로 날카로운 살심만이 팽배한 것을 감지하고 참선을 위주로 교육을 시켜왔다. 하지만 사내의 살심과 세상에 대한 원한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무심이 죽는 날까지도 사내 의 심신은 평정을 찾지 못하였다. 무심은 사내와 만난지 팔 년만 인 일흔 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자신이 원하던 선계의 세계로 들어갔다. 무심 도인이 죽자 사내는 산을 내려왔다. 지난 팔 년간 사내는 무심에게서 상당 부분의 무예를 전수 받았다. 아직은 산에 남아 무심이 전수하고 떠나간 무예를 더 연마해 야 했지만 사내는 무심이 옆에 없는 외로움을 참아 내기에는 수 행이 부족하였다. 그보다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에 더 이상 산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깨달음을 가지고 산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무작정 산으로 달려 들어온 사내가 그동안을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버지의 복수와 세상에 대한 처절한 외면이 사내를 참고 견딜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동안에도 수없이 산을 내려오고 싶은 유혹이 있었으나 무심 도인의 견제와 애정이 사내를 붙잡고 있었다. 산을 내려온 사내는 제일 먼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얼굴에 칼자국이 난 시장 통의 건달을 찾아 복수의 첫 발을 내딛었다. 건달 사내는 시장의 규모가 커지자 조직을 결성하여 시장과 그 인근의 상권을 휘어잡고 행세 깨나 하고 있었기에 찾기가 쉬웠 다. 사내는 건달을 간단히 처치하고 광주로 달려가 아버지를 파탄 의 길로 들어서게 한 사기꾼 마저도 처치하였다. 팔 년이 지난 세 상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사내는 세상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팔 년전의 사건 이 후로 사내는 행불자로 처리되어 사내는 이 땅에 없는 것이나 마찬 가지였다. 살인자의 입장으로 관공서를 찾아 다니며 없어진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사내는 무작정 부산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반년을 거지처럼 세상을 포기하고 살아가던 사내는 어느날 일본으로 향하는 선박에 몸을 싣고 한 많은 이 땅을 떠나야 했다. 불법으로 일본 땅을 밟 은 사내는 어쩌다 야규자의 일원으로 살아가다 어딘가에 묶여있 는 자체가 싫어 조직을 이탈하는 과정에서 배신자로 내 몰려 도 피 도중 조직의 오야붕을 살해하고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았으 나 워낙 신출 기묘한 사내의 변신에 일본 경찰은 손을 쓰질 못 하 고 말았다. 사내의 탁월한 도피 능력과 뛰어난 무예가 일본 전 역의 야쿠자들에게 소문으로 전해지며 사내에게 살인을 부탁하는 청부가 하나 둘 들어오더니 언제부터인가 사내는 일본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프로페셔널 킬러로 성장 해 있었다. 전 세계 의 수사진은 사내를 잡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의 변장술과 치밀한 도주 방법에 속수무책 이었다. 그 점이 청부를 의뢰하는 자들에게는 전설처럼 알려져 사내의 몸값은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거래가 이루어 졌다. 수사기관에서 사내를 부르는 이름은 후리맨, 자유인이었다. 자유인 외에는 사내의 진정한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이한 사실은 자유인이 살해하는 방법을 아직도 전문 감식 기관에서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유인 은 총기를 사용 하지 않고 있었다. 자유인에게 살해당한 시체는 대다수가 외상이 없었다. 어쩌다 작은 칼 같은 흉기를 사용 한 흔적도 발견되었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다. 자유인의 살 인 방법은 하나의 수수께기였다. 창 밖으로 보이는 모리 산의 설경이 지는 노을을 흡수하여 오렌 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도로를 달리는 차량들도 하나 둘 미 등 을 밝히기 시작했다. 중년의 사내는 고독한 모습으로 어둠에 묻혀 가는 모리 산을 망연히 보고 있었다. 사내는 산을 보고 있으면 아련한 슬픔이 밀려들었다. 사내는 휴 대용 전화기를 이용하여 스위스 은행의 담당자를 연결해서 자신의 계좌에 입금 여부를 확인하였다. 은행의 담당자는 사내의 계좌로 미화 오십만 불이 입금 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사내는 전화를 끊 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잠시 후 사내는 전화를 다시 걸었다. " 여보세요, 야마다 님과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 " 네, 그러십니까, 실례지만 어디 시라고....." " 북해도에서 곰 사냥을 약속한 사람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내는 좀전에 스위스로 전화를 할 때는 유창한 불어로 말을 했었다. " 여보세요, 야마다 입니다." " 북해도의 곰 사냥꾼입니다." " 아, 안녕하십니까! 모피 값은 송금했는데 받으셨는지요?" " 네, 오늘 확인했습니다." " 그럼 곰 사냥은 언제 시작 할 예정입니까?" " 이틀 안으로 시작 할 작정입니다. 사냥을 맞히면 밀린 모피 값을 같은 방법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 네, 확인이 끝나는 즉시 외상값을 갚겠습니다. 그리고 곰 사냥 에 필요한 자료는 더 없어도 되겠습니까?" " 돼습니다. 그럼 이만....." 사내는 전화를 끊고 소파에 깊숙이 파 묻혀 않았다. 곰 사냥은 내일로 날을 잡았다. 내일 까지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사내에게 청부가 들어온 것은 한 달전 이었다. 의뢰 자는 일본 야 쿠자의 양대 산맥 중의 하나인 다까시오 훼밀리였다. 다까시오 내에도 유능한 킬러가 있는데도 청부를 부탁 한 것으로 미루어 복잡한 사연이 연루된 것 같았다. 상대는 집권당 참의원인 혼도 로 한때는 다까시오 조직의 도움을 받고 있는 몇 몇 정치인들 중 에 하나였다. 무슨 이유로 혼도 의원은 다까시오 조직과 등을 돌 리고는, 공공연한 장소에서 다까시오 조직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였다. 혼도 의원은 자신이 입을 열면 다까 시오 뿐 아니라 이 땅의 많은 정치인이 파멸을 맞고 말 거라는 발언을 술좌석에서 짖꺼린 것이 다까시오 조직의 안테나에 걸려들 었다. 다까시오 조직은 혼도를 처치하는 일이 간단하면서도 어려 운 일이라 이 일을 후리맨에게 맡기기로 하고 청부를 의뢰하는 방 법의 하나인 뉴욕 타임 지와 런던의 헤럴드지 광고 난에 자유로 운 세상을 만들자는 광고를 실었다. 자유인과의 접선 방법은 그 길 밖에는 없었다. 사내는 어둠이 내리자 시장기를 느꼈다. 배고픔 보다는 외로움 이 밀려들었다. 사내는 밤이 무서웠다. 밤이면 찾아드는 고독과 외로움에 사내는 언제나 여자를 가까이 하였다. 여체는 사내에게 모성의 그리움이었고 한 편으로는 구역질나는 경멸의 대상이었 다. 사내는 여자를 학대하는 방법으로 섹스를 택했다. 사내는 상의를 걸치고 룸을 나섰다. 룸밖에는 VIP 룸의 전속 써비스맨이 기립 자세로 서 있다가 사내가 나오자 신속하게 승강 기의 버튼을 눌렀다. 전용 승강기는 버튼을 누르자 바로 문이 열 였다. 써비스맨이 승강기에 타려는 것을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손 으로 저지하고는 주머니에서 상당량의 돈을 꺼내어 팁으로 건네 주었다. 써비스맨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였다. 승강기가 1층에 도착하자 후론트맨이 승강기 입구에 서 있다가 사내가 나 오자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사내는 호텔을 빠져나와 찬 바 람이 어깨를 움츠리게 만드는 삿포로의 밤거리를 한 동안 걸었다. 지하 상가로 발길을 옮긴 사내는 상가 구석진 곳에 자리한 물 품 보관소에서 문을 열고 비닐로 덥혀있는 캐주얼한 상의와 바지 그리고 조그만 손가방을 손에 들고 앞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 다. 화장실은 외진 탓에 아무도 없었다. 사내는 빈 화장실로 들 어갔다. 좁은 화장실 안에서 사내는 능숙하게 옷을 갈아입고 머리 채를 양손으로 붙잡고 들어올리자 사내의 머리에서 가발이 떨어져 나왔다. 사내의 머리는 짧은 스포츠형의 머리였다. 사내는 가방에 서 화장수 병 같은 것을 꺼내 손에 따라 붓고는 얼굴에 바르고 티슈로 닥아냈다. 티슈로 닥아낸 사내의 얼굴은 박꽃처럼 하얀 얼굴의 해맑은 모 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귀공자 티가 철철 넘쳐 흐르고 오뚝한 코 와 여인처럼 선이 고운 입술은 매력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캐주얼 옷을 입은 사내의 모습은 순식간에 50대 중년 의 모습에서 20대의 나약해 보이는 귀공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 다. 사내는 화장실을 나와 보관소에 바꿔입은 옷을 넣고 문을 닫 았다. 삿포로의 명물은 몇 가지가 있지만 아무래도 첫 째는 모리 산 이고 둘 째는 해마다 열리는 눈 축제 그것도 눈으로 조각한 각양 각색의 조각품이 그 하나지만 그것은 겨울에만 국한 된 것이라 아쉬운 점이 있었다. 삿포로의 외곽에 자리 한 기생 요리집 춘설 을 삿포로의 명물로 꼽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삿포로 시민은 몇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춘설에 가보지 못 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이유는 상상 할 수 없는 요리 값과 춘설 의 전통에 있었다. 춘설은 그 한 자리에서만 150년을 지켜온 삿포로 뿐 아니라 북해 도 전체의 자랑이었다. 춘설의 얼굴 마담 요시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사내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요시꼬는 가슴이 뛰었다. 작년 까지도 중앙 TV 의 인기 있는 탤런트로 활동한 요시꼬는 방송국 내에서 인기 있 는 사내들의 잘난 얼굴을 수 없이 보아 왔었다. 그들을 볼 때는 그저 잘 생겼다는 감탄만 나왔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요시코의 정신을 흔들어 놓았다. 사내는 감싸안고 보호해 주고 싶을 만큼 나약해 보였다. 여자의 피부보다 고와 보이는 피부와 섬세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눈과 코와 입, 가냘파 보이는 몸매 와 섬섬 옥수처럼 긴 희디흰 손가락 모든 것이 흠잡을 곳이 없었 다. 그럼에도 이따금 번뜩이는 눈은 사내가 쉽사리 근접 할 수 없다는 것을 요시코는 느낄 수 있었다. 사내 앞에 선 요시코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실수를 하였 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한 번은 오차를 사내의 무릎에 쏟는 큰 실수 를 하였고 또 하나는 술잔에서 술이 넘쳐 흐르게 따르고 말았다. 사내가 고운 목소리로 저지를 하지 않았다면 술병의 술을 모두 상위에 쏟아 붓고 말았을 것이다. 사내는 여타 사내들과는 달리 조용히 술을 마셨다. 북쪽 지방의 전통 요리는 추위에 견디기 위한 고 단백질의 음식이 주류를 이 루고 있어 자칫하면 느끼한 맛이 날 수도 있지만 춘설의 요리 장은 북해도 최고의 요리 실력을 인정받는 가문에서 배출한 요리 부문의 장인 이었다. 그가 만든 요리는 전 일본에 소문이 자자 했다. 요시코는 사내의 곁에 무릎을 끓고 고개를 숙인 체 사내의 음식 그릇에 음식이 비면 다양한 음식을 사내의 그릇에 옮겨 놓 았다. 요시코는 상위에 수 없이 많은 음식 중에서 무엇을 사내의 그릇에 옮겨 놓아야 사내가 맛있게 먹을 수있을까 하는 생각에 다 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손님과 농담도 하고 우스개 소리를 잘하는 요시코의 재치에 손님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워했다. 요시코는 고개를 들고 사내의 얼굴을 쳐다 볼 자신이 없었다. 한 번 더 사내와 눈길이 마주치면 가슴이 폭발하여 죽을 것만 같았다. 자연 술 자리는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적 막이 감도는 이상한 술 자리가 되었다. 기녀는 술좌석의 흥을 돋 구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도 요시코는 어쩌지를 못했다. " 창문을 열었으면 한다." 사내의 말소리에 요시코는 화들짝 놀랐다. " 네, 답답하십니까, 기온이 차가울 텐데...." " 밤하늘을 보고 싶구나" 사내의 말에 요시코는 까닭 없는 서러움이 밀려 들었다. 단지 밤하늘을 보고 싶다는 사내의 말이 세상의 어떠한 시 보 다 아름답고 가슴 뭉클하게 하였다. 문을 열자 밖에는 눈이 내리 고 있었다. " 어머, 눈이 내리고 있어요." 요시코는 어린아이처럼 명랑한 목 소리로 말을 하다가 깜짝 놀라며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 괜찮다, 눈을 보고 즐거워 할 수 있는 너의 여유로운 마음 이 좋다." 사내의 말에 요시코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쁨이 전신을 타 고 흘렀다. " 이리 와 내 옆에 앉아라, 너는 피부가 참으로 곱구나 화장 을 안 하고도 이런 자리에 나올 수있으니....." 요시코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빛 쳤다. " 오늘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이 외로운 밤이구나, 요시코라 고 했지." " 네," " 얼굴이 참 곱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 같은 편안함이 있구 나." 요시코는 춘설이 자랑하는 얼굴 마담이었다. 사내들은 요시코에 게 수많은 수식의 감탄사를 발했다. 요시코는 사내의 말이 수많은 감탄사보다 뛰어 난 표현이라고 생각 했다. 역시 이 사내는 뭇 사 내들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 나는 오늘밤을 요시코와 함께 지내고 싶다. 그리고 요시코가 챙겨주는 아침밥을 즐거이 먹고 싶다. 무리한 부탁이라면 응하지 않아도 관계없다."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떠한 명령 보다도 거역 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춘설의 기녀들은 손 님이 잠자리를 함께 하기 원하면 거역 할 수 없는 규칙이 있었다. 그러나 요시코만은 예외였다. 손님들도 요시코가 거부 할 경우에 는 순순히 포기를 하였다. 요시코는 사내의 물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내의 물음 에 대답을 하는 것조차도 자신이 사내의 눈에 추하게 보일 것 같 아 가슴을 졸였다. 요시코는 많지는 안치만 사내의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요시코의 가슴은 소녀적 춘화도를 보고 가슴 뛰던 순간과 흡사한 기분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마음은 사내 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북해도의 차가운 밤을 녹이고 싶었다. 요시코는 끝내 사내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 했다. 그러나 요 시코의 마음은 술자리가 끝나면 사내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 할 생각이었다. 물론 춘설에는 호텔 수준을 능가하는 방이 여럿 있 었지만 요시코는 사내를 다른 남녀의 췌치가 묻어있는 춘설의 방 에서 재우고 싶지 않았다. 술자리는 어색함만을 남기고 끝이 났다. 사내는 요금 외에 많 은 돈을 요시코의 앞으로 남겨두고 호텔로 돌아갈 차편을 부탁하 였다. 요시코는 사내가 건네주는 요금 외의 많은 돈에 아련한 슬픔이 번져 왔다. 왠지 사내에게는 돈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리고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사내가 야속했다.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요시코는 황망히 놀라며 작은 소리로 얼굴을 붉히며 말 했다. "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을 저의 집으로 초대하고 싶습니 다. 불편하시지 않으시다면 저의 바램을 수락해 주시면 영광으로 알 겠습니다." 사내는 일순 기분이 좋았다. 요시코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여타 기생과는 사뭇 다른 점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집 으로 초대하려는 요시코의 배려가 가슴에 와 닿았다. 요시코는 사내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사내를 냉기가 감도는 자동차에 태우고 싶지 않은 요시코의 정성이었다. 요시코는 사내가 기다리는 방으로 걸어가며 오늘따라 정장을 하 지 않고 무스탕에 청바지를 입고 나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사내 앞에서는 조숙한 정장이 어울릴것이라고 요시코는 생각했다. 사내는 요시코를 보고 잠깐 미소를 지었다. 기모노를 입고 있 을 때는 요염한 아름다움이 흐르던 여인이 무스탕 잠바에 청바지 를 입자 여인은 소녀의 발랄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요시코의 집은 삿포로 시내에서 조금 벗어 난, 모리 산 아래에 자리 한 부촌이었다. 이 곳은 신흥 부촌으로 고급 빌라와 재계 와 연예계 인사들의 별장도 많이 있었다. 온천이 솟아나는 이 곳 은 어지간한 재력으로는 입주 해 살기도 힘든 곳이었다. 사내는 요시코의 집이 온천지에 있는 것에 조금은 놀라는 눈치였다. 그 리고 내일 있을 곰 사냥의 사냥터가 요시코의 동네라는 것이 느 낌을 좋게 하였다. 요시코의 집은 작은 정원이 아담하게 꾸며져 있는 목조 주택이 었다. 목재는 주목을 사용하여 붉은 색이 은은히 감도는 안정감 을 주었다. 쌓인 눈으로 요시코의 집은 동화속의 집처럼 아름다 웠다. 실내는 주인의 취향을 대변하듯 밝은 아이보리 색으로 전체 적인 분위기를 연출 해 냈다. 가구는 꼭 필요한 것만 간략하게 배치 되어있어 요란하지않고 집주인의 품위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요시코는 학이 날아가는 그림이 수놓아진 기모노로 바꿔 입고 사내에게는 물방울무늬의 전통 잠옷을 내어 놓았다. 사내의 잠옷 을 내 놓으면서도 요시코는 사내가 혹시나 오해나 없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사실 요시코의 집에 남자가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 음이었다. 요시코는 남자를 집까지는 절대 끌어들이지 않았다. 진정한 사 내를 위하여 요시코는 잠옷을 준비하고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다. 요시코는 이제서야 사내다운 사내를 만난 것이다. 요시코는 사내를 위하여 목욕물을 받았다. 욕실의 욕조는 옛날 방식으로 나무로 만들어 놓았다. 욕조에 쏟아지는 물은 지하에서 끌어 올리는 온천수였다. 물이 욕조 가득 채워지자 요시코는 사내 를 욕실로 인도했다. 입구에서 요시코는 무릎을 끓고 사내의 잠옷 을 받아들 자세를 취했다. " 요시코 일어지 않아도 된다. 여기는 춘설이 아니라 바로 요시 코의 집이다." " 아닙니다, 요시코의 집은 지금 이 시간부터 선생님의 집입니 다." 사내는 요시코의 양 겨드랑이에 두 손을 넣어 요시코를 일으 켜 세우고 가만히 요시코를 가슴에 안았다. 요시코의 몸이 사시나 무 떨 듯이 떨고 있었다. 욕실의 은은한 불 빛 속에서 쳐다본 사내의 몸은 조각가가 심 혈을 기울여 가꾸어낸 하나의 작품 같았다. 사내의 몸은 군살이 하나도 없는 근육질의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요시코는 사내의 몸을 넋을 잃고 잠시 바라보다가 사내의 몸에 물을 끼얹고 비누칠을 하였다. 사향 냄새 같은 비누 냄새가 욕실 의 분위기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사내는 손수 비누를 잡고 요시코의 몸에 비누칠을 하였다. 요시코 는 당황하며 사내의 손을 저지하려고 했다. " 선생님 천한 저의 몸은 제가 씻겠습니다." " 아니다, 너는 천한 여자가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 결한 나의 여자다. 이 밤은 나의 여자를 기쁘게 하기위해 모든 일도 할 수있다." 요시코는 사내의 말에 감격하여 눈물이 흘러 나왔다. 사내는 욕 조의 물로 요시코의 몸을 씻어 내리고 커다란 나무 욕조 속으로 요시코를 가볍게 안아 들고 들어갔다. 나무로 만든 욕조의 바닥에 서는 모터를 이용하여 계속적으로 온천수가 뿜어져 나왔다. 삿포 로의 온천수는 목욕하기 알맞은 온도의 온천수가 용출되어 온천 지역의 가정에서는 파이프만 땅에 묻으면 바로 목욕하기 알맞은 온천수를 얻을 수있었다. 그런 이유로 온천 지역에 신흥 부촌이 생겨난 것이다. 사내의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욕실을 걸어 나오는 요시코 의 다리가 후들 거렸다. 요시코는 침대에 누워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내가 눈물 겹도록 사랑스러웠다. 첫 눈에 반해서 목숨까지 버리며 사랑을 했다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있었다. 요시코는 사내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물론 요시코 자신만의 일방적인 사랑의 느낌 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 다. 요시코의 마음은 온통 사내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요시코는 사 내의 옆에 누우며 머리를 가만히 사내의 가슴에 묻었다. 요시코는 이 순간이 이제껏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다. " 요시코 너는 정말 훌륭한 몸을 가지고 있구나." " 고마워요, 실망을 안 하셨다니 안심입니다." " 실망은.... 너는 남자에게 사랑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어..." 요시코는 진정으로 사내에게 사람을 받고 싶었다. " 참, 선생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 시면 알려 주세요. 못하는 솜씨지만 아침 밥상을 제가 준비하고 싶어요." 사내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민어 매운 탕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요시코는 사내가 잠들기 좋게 스탠드의 불빛을 약하게 하였다. 사내는 잠시 후에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 이 들었다. 요시코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내가 잠이 들면 할 일이 있었다. 사내가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 려온 요시코는 평화롭게 잠든 사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잠든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요시코는 시계를 보았다. 새 벽 2시였다. 고기 배가 들어오는 삿포로 외곽의 포구까지는 승용 차로 대략 왕복 3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요시코는 사내가 민 어 매운탕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사내의아침상에 신선 한 민어로 매운탕을 끓여 올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요시코는 옷을 입고 조용히 집을 나와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길은 내린 눈으 로 얼어붙어 있었다. 이런 빙판 길에 포구까지 갔다 온다는 것은 여간 위험 한 일 이 아니었다. 요시코는 위험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으며 2시간만에 포구에 도착 할 수가 있었다. 때마침 포구에 들어온 어선에는 싱싱한 민 어가 다행히도 서너 마리가 있었다. 요시코를 알아보고 극구 돈 을 안 받겠다는 어부에게 돈을 던져주다시피 건네주고는 요시코 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이따금 차량이 지나칠 뿐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자동차의 속력을 높였다. 한 시라도 빨리 달려 가 사내의 잠든 모습도 보고 싶고 사내의 옆에 눕고 싶었다. 잠 을 못 잔 탓에 피곤은 하였지만 사내에게 만들어 줄 싱싱한 민어 를 손수 구한 것에 마음은 뿌듯했다. 속력을 내서 달리던 차량은 커브 길에서 중심을 잃고 건너 편 차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당 황한 요시코는 브레이크 페달을 힘껏 밟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요시코의 차는 건너 편에 설치된 추락 방지 가드레일을 부수고 낭 떠러지로 곤두박질 쳤다. 차량은 두 바퀴를 구르고 다행히도 중간 나무에 걸치며 멈추었다. 요시코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이를 앙 다물었다. 사내는 오랜만에 달콤한 잠을 실컷 잤다. 사실 사내는 지난 보 름 동안에 잠다운 잠을 자 본적이 없었다. 청부 살인을 의뢰받고 는 사냥감의 신상 명세와 취미, 습관, 행동 반경 그 모든 것을 체크하며 사냥감을 쫓아 오사카에서 이 곳 삿포로까지 따라 올라 왔다. 사냥감은 삿포로의 별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눈을 뜬 사내는 옆 자리에 요시코가 없음을 알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요시코가 눈에 보이지 않자 사내는 요시코가 아침 을 준비하려고 자리를 비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내는 간 밤의 섹스를 생각해 보았다. 요시코는 정말 여자다운 여자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조용하고 때로는 명랑하고 남자를 편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었 다. 얼굴도 찾기 힘든 미인이고 몸매도 완벽한 것이 나무랄 데가 없었다. 사내는 잠시 요시코의 모든 것에 빠져드는 것 같은 자신 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사내의 철칙은 여자를 믿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내의 어린 시절 자신이 살해한 계모의 악행이 머리에 각인 되어 진 탓도 있었다. 사내는 여자와의 섹스 자체는 좋아 하지만 한 여자를 사랑 할만큼 마음의 여유가없었다. 그래도 요시 코는 사뭇 다른 감정으로 느껴지는 것에 사내는 자신조차 조금 놀라고 있었다. 수많은 나라를 유랑하며 수 없이 많은 여자를 품 어 본 사내에게 요시코는 다른 여자에게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언 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꽤 많이 흘렀는데도 요시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 내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옷을 입고 침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거 실에도 요시코는 없었다. 식당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자 그 곳에도 요시코는 없었다. 가정부도 눈에 안 띄는 것으로 미루어 요시코는 이 집에서 혼자 살던가 아니면 사려 깊은 그녀의 재치 로 가정부를 어제 밤에 다른 곳으로 보냈는지도 몰라 사내는 무 심코 마당을 쳐 다보다 간밤에 타고 온 요시코의 자동차가 없는 것을 뒤 늦게 알아 차렸다. 곰곰이 생각 해 보니 눈을 뜨고 지금 껏 자동차의 시동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근처의 쇼핑 센터에 아침 장을 보러 갔어도 벌써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였다. 요시 코는 사내가 잠든 사이에 나 간 것이 틀림 없었다. 돌연 사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사내는 서둘러 침실로 돌아와 잠옷을 벗 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사내의 눈은 주위를 경계 하였다. 만약 요시코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사냥감의 조직에게 알렸다면 자신을 제거키 위해 달려온 킬러는 지금쯤 어딘 가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 동안의 철칙을 져버리고 여자를 조금이라도 믿고 여자의 집에서 이토록 깊은 잠에 빠져든 자신의 실수가 어처구니 없었다. 사내는 주위를 경계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막 나서려는 순간에 낡은 화물 차가 집 마당으로 들러서는 것을 보고 온 몸이 살기로 긴장하고 있었다. 요시코는 머리에 통증을 느끼며 추위에 몸을 움츠렸다. 깨진 자동차 유리 창 사이로 강한 바람이 밀려 왔다. 요시코의 눈은 옆자리에 놓아둔 민어를 먼저 확인하였다. 사내에게 맛있는 민어 매운탕을 어쩌면 못 올리게 될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요시코는 화가 치밀었다. 요시코는 찌그러진 문을 열 려고 힘을 주었지만 허사였다. 괜스레 눈물이 흘렀다. 사내가 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돌아가고 싶었다. 요시코는 추위에 한 참을 떨고 있었다. 한 참만에 위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작업복 차림의 중년 사내가 내려와 찌그러진 문짝에 나무를 대고 문을 열었다. 요시코는 차량에서 빠져 나오면서 옆자리의 민어를 들 고 나왔다. 중년의 사내는 생선을 실어 나르는 화물차의 기사였 다. 요시코는 병원으로 먼저 가야 한다는 화물차 기사의 말을 무 시하고 집으로 가 줄 것을 부탁했다. 사례금으로 요시코는 주머 니에 있던 돈을 모두 기사에게 털어 주었다. 그 중에는 사내에게 어제 받은 거액의 돈도 있었다. 기사는 때아닌 횡재에 기뻐하면서도 요시코의 이마에서 흐르 는 피가 걱정이 되어 병원 행을 몇 차례 요구했지만 요시코는 막 무가내였다. 사내는 화물차에서 내리는 요시코를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요 시코의 얼굴은 피가 낭자했다. 요시코는 사내가 옷을 차려 입고 문을 열고 나서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땅 바닥에 무릅을 끓고 자 신의 불찰에 용서를 빌었다. 뒤 따라 내려온 화물차 기사에게 자초지정을 들은 사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내는 요시코를 일 으켜 세웠다. 요시코의 한 손에는 민어가 들려 있었다. 사내는 요시코의 손 에 들려있는 민어를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하는 감격이 밀려들었다. 요시코는 집안으로 들어오면서도 연신 사내에게 죄송 하다는 말 을 되 뇌였다. 사내는 그런 요시코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 요시코, 너는 아무 잘못도 없다. 너는 정말 나를 감격하게 만 드는구나." " 아닙니다, 요시코의 잘못으로 선생님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 다." " 아니다. 요시코는 내가 만난 여자 중에 가장 훌륭한 여자다." 사내는 요시코를 가슴에 안아 주었다. 요시코는 사내의 가슴에 서 꿈 속같은행복을 느꼈다. 사내의 가슴에 안겨 있던 요시코는 긴장이 풀리자 아련한 현기증에 정신을 잃고 혼절하고 말았다. 지 금껏 버틴것만 해도 대단한 정신력 이었다. 사내는 무너져 내리는 요시코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혔다. 사내 는 손가락 끝을 이용하여 요시코의 혈을 제압 하였다. 그리고는 요시코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요시코는 놀랍게도 이마의 상처 외에 다리가 심하게 삐어 있었다. 이런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 요 시코의 정신력이 사내를 놀라게 하였다. 나약한 여자의 몸에서 이 런 정신력이 어디서 생겨나는지 사내는 알 수가 없었다. 사내는 요시코를 달리 생각하였다. 조금은 다른 여자와 다르게 편안한 느 낌을 주는 여자라고만 느꼈는데 지금의 감정은 사내도 알 수가 없 었다. 왠지 보호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꽃처럼 가꾸고 싶은 마음도 생겨 나는 것이 사내는 자신 조차도 이해하기가 힘들 었다. 지금껏 여자에게서 이런 감정이 생긴 것은 처음 이었다. 사 내는 여자를 정성껏 치료 하였다. 사내의 손 길이 닿자 요시코의 이마에서 흐르던 피도 멎었고 다리의 부기도 가라 앉았다. 사 내는 오늘밤에 집행하려던 사냥을 내일 밤으로 연기하였다.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빙판 진 먼길을 다녀오다 사고를 당 한 요시코를 이대로 혼자 두고 사냥을 떠날 수가 없었다. 냉정한 킬러의 세계에서는 금기시 되는 사항의 아량과 자비였 다. 오사카의 밤은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 온 추위로 거리는 다소 한산했다. 시내를 우회하는 도로에는 차량도 많치않았다. 가로등의 불빛에 검은 색의 대형 승용차가 먼지를 휘날리며 질주하고 있 었다. 선두에 선 차량은 최고급 승용차로 주로 사업에 성공한 중소 기 업의 대표들이 즐겨 타는 독일제 벤츠 승용차였다. 그 뒤를 같은 종류의 승용차가 뒤따르고 중간에는 영국제 수제품 차량인 롤스 로이드가 달리고 있었다. 롤스로이드 차량의 앞뒤에서 달리는 벤 츠 승용차는 롤스로이드를 호위하며 달리는 것 같았다. 차량의 무리는 오사카의 시내를 벗어나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거대한 궁궐 같은 일본 전통 가옥으로 방향을 잡았다. 전통 요릿집 만호는 일본이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기생집이었다. 규모 면에서도 엄청났다. 만호에 소속된 타고난 기녀들만도 천 여 명에 달하고 요리사들도 일본 전역에서 스카웃 된 장인들이 십 여명 그 밑에 요리원들은 백명에육박하였다. 이처럼 거대한 요릿 집이 오늘은 어느 누구의 예약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을 닫은 것도 아니었다. 만호의 전 직원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주위의 청소에 신경을 쓰고 만호의 사장은 손수 직원들을 닦달하며 주위 정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좀 전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대형 버스 두 대를 나눠타고 만호에 도착하여 만호의 모든 곳을 탐색하고 다 녔다. 직원들은 건장한 사내들의 출현에 오늘 방문하는 귀빈 의 정체를 짐작 할 수가 있었다. 오늘의 귀빈은 오야봉 이었다. 요리집 만월의 운영권은 다까시 오 조직이 맡아 하고 있었다. 삼 년 전에 다까시오 조직이 운영 권을 인수 한 뒤로 대대적인 수리 작업과 빼어난 미녀 기생들의 스카웃이 전국적으로 한차례 크게 일어 났었다. 그 노력 탓에 지 금의 만호는 전 경영주 보다 뛰어난 영업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만호의 중요 직책에는 다까시오 조직의 조직원이 모두 자리를 차 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만호의 전직원이 나서서 호들갑을 떠는 것은 평생에 보기 도 힘든 오야봉이 만호에 행차한다는 사실이 오야봉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크나큰 영광으로 알고들 있었다. 검은 양복과 새하얀 와이셔츠 차림에 깔끔한 모습의 사내들이 만호의 정문과 안 채로 연결된 아치형의 다리 위에 양쪽으로 도열 해 있었다. 밤 기온이 차가웠지만 사내들은 검은 양복 외에는 더 이상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 없었다. 다만 만호의 사장만이 코트 를 걸치고 있었다. 그것도 추위를 막기 위해 임시로 어깨에 걸 치고 있었다. 오야봉이 도착하면 빨리 벗을 수있기 위한 자세였 다. 정문에서 무전기를 들고 있던 사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 오야봉께서 1분 후에 도착하신 답니다." 사내의 외침에 도열해 있던 사내들은 새삼 자세를 바로 잡았 다. 만호의 사장도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놓고 정문으로 나아갔 다. 어둠을 뚫고 자동차의 불빛이 전진해 오고 있었다. 선두 차량 은 정문을 조금 지나쳐서 정차하고 오야봉의 롤스로이드가 정확 하게 정문에 멈추었다. 선두와 후미의 차량에서 날카롭게 생긴 사내들이 뛰어나와 오야 봉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살폈다. 정문에 서 있던 사장과 사내 들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절을 하였다. 오야봉은 사장에게 다 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안 채로 향하는 다리에 들어서자 도열 해 있던 사내들이 일사 불란하게 머리를 숙였다. 오야봉은 몇 몇 사내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걸음을 옮겼다. 오야봉이 안 채로 들어서고 얼마 안 있어, 다썩은 고물 자동차 가 만호의 정문에 도착하더니 덩치가 산만한 사내가 신문으로 얼 굴을 가리고 자동차에서 내렸다. 도열해 있던 사내들은 얼굴을 가린 사내에게도 깍듯이 허리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사내가 안 채로 들어서자 오야봉은 손수 입구까지 달려 나와 사내를 영접하 였다. 그 뒤로 여러 명의 사내들이 신문이나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만호의 안 채로 들어갔다. 오야봉은 그들 모두를 일일이 입구 에서 맞이 하였다. 사내들이 타고 온 차량은 한결같이 서민이 타 고 다닐 법 한 소형차나 낡은 차가 전부였다. 오야봉의 오른 팔 역할을 하고 있는 야마다는 만호의 여기 저 기를 뛰어 다니며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관여를 하였다. " 이봐, 요시다, 오늘 밤 어른들을 모실 아이들은 어찌 됐어?" " 네, 말씀 하신 데로 준비하였습니다." 만호의 사장은 야마다의 물음에 공손히 대답을 하였다. "그래, 교육은 철저히 시켜겠지?" " 네." 야마다는 손수 사장을 앞세우고 여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방으 로 가 보았다. 방에는 십 여명의 여자들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여자들은 한결 같이 현란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요 즘 TV의 광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기있는 모텔도 있었다. 여자들은 하나 같이 지적으로 보이며 청순 해 보였다. 만호의 안 채 깊숙한 곳에 자리한 특실에는 길다란 앉은뱅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윤기가 흐르는 다다미가 깔려 있 었고 천장에는 창호지로 둘리어진 전등이 여러개 매달려 있었다. 가운데 자리에는 고풍스러운 병풍이 놓여 있었고 병풍의 양옆에 는 푸른빛의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전통적인 일본의 고 가였다. 병풍 아래의 상석에는 거대한 체격의 늙은 사내가 앉아 있었 고 그 양옆으로 각기 세 명씩 여섯 명의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 내들이 앉아 있었다. 상석의 사내 정면에는 오야봉이 단정하게 무릎을 끓고 앉아있었다 " 장군님, 그 동안 건강 하셨는지요." 오야봉의 인사에 상석의 사내는 잠깐 미소를 지었다. 오야봉을 쳐다보는 사내의 눈길은 자애로워 보였다. " 그래, 너도 별 일 없었느냐." "네." 오야봉은 머리를 다다미에 부딪치며 대답하였다. 오야봉에게 있 어 상석의 사내는 하늘이었다. 상석의 사내는 현 집권당인 자 유당의 총리 모리야게 다음으로 인정받는 이인자였지만 그를 따 르는 의원들이 많아 실질적인 집권당의 실세였다. 사내는 자신을 장군님 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좋아했다.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 시절에 사내는 별을 어깨에 달고 군을 호령하고 있었다. 사내의 옆자리에 도열 해 앉아있는 사내들도 그 당시 장군의 휘하에 있 던 고급 장교들로 지금은 각기 자위대의 사령관과 국방성의 내무 대신 참의원 등등 모두가 내노라 하는 막강한 실력자였다. 상석의 사내가 묵직한 저음으로 말을 하였다. " 혼도 의원은 어찌 되었나?" " 네, 내일 중으로 해결됩니다." " 그래, 어떻해?" " 완벽한 킬러를 고용했습니다." " 믿을 만 한가?" " 네. 장군님도 이름은 혹시 아시리라 봅니다. 자유인 이라고." " 아. 그 후리맨 인가하는 킬러 말인가." " 네." " 그자라면 믿을만 하겠지, 그 자의 소문은 익히 들었으니까."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고 곤혹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여기 모인 형제들도 나의 고초를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참의 원인 혼도를 제거하는 내 마음도 아프다. 혼도를 제거하므로 우 리의 입지적인 위치에도 손해가 있지만 무엇보다 한 때는 전장 을 함께 누렸던 우리의 동지를 제거하는 내 마음도 형제들이 이 해 하여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일깨우는 바이지만 배 신자는 그 누구도 절대 용서 할 수 없다." " 명심하겠습니다, 장군님." 장내의 사내들은 큰 소리로 대답하며 머리를 숙였다. 장내는 잠시 깊은 적막이 감돌았다. " 오야봉, 한국에 진출한 진리교의 사세 확장은 어찌 되는가?" " 네,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 진리교의 사제장이 임무를 성 실히 실행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한국의 유능한 인재들의 대 다 수가 진리교의 신도가 될 날이 올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 그래, 그럴수록 한국 경찰이나 정보 기관의 안테나에 걸려들 지 안토록 신중히 사세를 확장하고 될 수 있으면 반도체 부문에 종사하는 인재들을 많이 포섭하는 것이 우리 정부나 한국 반도체 의 추격에 힘들어 하는 우리 기업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오야 봉도 알겠지만 반도체 시장은 황금 시장이야 그런 시장을 식민지 의 백성들에게 넘겨 줄 수는 없잖아....." " 네, 명심하겠습니다." " 빠르게 그러면서도 서서히 한국의 유능한 인재들을 성의 노 예로 만들어야 해, 우수한 두뇌 집단부터 정신이 황폐 해지면 자 연 일반인들의 정신 상태도 뒤 따라 황폐 해지지, 그런 날이 빨리 올수록 우리의 계획은 앞당겨 지는 것이야, 한국의 상류 집단이 썩어빠져 온통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상상 해 봐, 통쾌한 일이 아 닌가....하하하하." 사내는 눈을 지그시 감고 크게 웃어 제켰다. 다른 사내들도 따라 웃었다. 사내는 웃음을 돌연 멈추고 눈빛 을 빛 내며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하였다. " 한국 사회가 정신을 못 차리고 흐느적거리면 북한이 밀고 내 려올 공산이 크지, 그러면 우리는 구경을 하다가 어느 시기에 한 국을 도와주는 빌미로 우리의 막강한 군대를 지원하여 북한을 쳐 부수고 혼란 정국에 빠져있는 한국 사회를 우리가 통치하는 것이 야, 그것은 거대한 중국을 우리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교두보가 되는 것이지, 지금은 평화를 주장하는 우리 시민들도 막상 그런 날이 오면 대 일본 제국의 막강한 힘에 박수를 보낼 것이야, 위 대하신 천황 폐하의 자식들이 언제 지진이나 화산으로 물 속에 가라 앉을지 모르는 섬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은 치욕이야. 우리는 다시 한 번 제국 군인의 위상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그래야만 먼저 간 전우들을 떳떳이 볼 수가 있지. 특히 오야봉은 위대한 제국 군인의 영원한 신이되신 자네 아버 님의 뒤를 이어 나가야 해, 다시 한 번 말 하지만 여기있는 우 리 모두는 아니 수많은 천황의 군인들은 자네 아버님의 희생이 없 었다면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겠지, 지금도 그 때를 생각 하면 분통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아, 무례한 조센진 들이 자네 아버님을 무참히 짓밟아 죽이는 장면을 우리는 자네 아버님 덕분에 올라탄 배 위에서 보아야 했어 자네 아버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도 조센진 놈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맞이 했을 거야, 우리는 그 당시 힘이없던 패전국의 군인으로 본국으로 눈물을 머금고 돌아오는 것이었어, 그런데 조선의 무지한 조센진 들은 무장 해제 한 우리를 잡아죽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어." 사내는 눈물을 쏟고 있었다. 도열한 사내들도 손으로 눈물을 닥 아내고 있었다. 오야봉은 이빨을 앙 물고 눈물을 참았다. 사내의 이 말은 벌써 서너 번을 들었다. " 이제 위대한 천황 폐하의 제국 군대는 더 이상 패전국의 군인 으로 이 세상을 끝낼 수는 없어 후세에게 창피한 제국 군대의 기 억을 물려줄 수가 없다고, 알았나, 제군들." 사내의 커다란 외침에 다른 사내들도 큰 목소리로 회답 하였 다. " 네, 알겠습니다, 장군님." " 우리에게는 빼앗긴 제국 군대의 영광을 되찾을 임무가 있다." 사내는 감정이 복 받쳐 목 소리가 잠기는지 조용히 눈을 감 고 침묵을 지켰다 사내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오야봉을 쳐다 보았다. " 오야봉, 이번 달에 한국에서 촬영된 집회 장면을 보았네, 테입 의 국내 판매와 해외 판매 실적은 어찌 되는가." " 네, 이번 달 판매에 들어 간 테입까지 총 12편의 테입이 판매 되었습니다.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포로노 테입 수입상 들의 주문이 점차적으로 쇄도하고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나비 의 향연이 여타 포르노 테입의 판매율을 순식간에 앞지르고 있 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반인의 판매를 엄격히 금하도록 지 시를 하였기에 한국에서는 유통이 안 되고 있습니다. 또한 테입의 복사 방지 프로그램은 과학처의 긴따로 수석 연구원이 지속적으 로 만들고 있기에 테입의 복사는 불가능합니다." " 그래, 나비의 향연은 우리 국민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도 테 입의 촬영 장소를 일본으로 알고 있고, 또한 생산자도 일본으로 알고 있다. 한국의 정보 기관도 테입의 생산지가 일본으로 알 고 있기에 조사 할 생각도 안하고 있다. 국내의 여러 기관에서도 나비의 향연 촬영 현장을 은밀히 수사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우리는 잠시나마 세간의 오해와 질타를 받고 있는 현실이다. 대 외적으로도 국가의 위신이 실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을 감수하는 이유를 모두가 잘 알고 있으리라 본다. 우리와 동등 한 실력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무례한 조센진들의 의욕을 잘 라 버리기 위하여 우리는 분통이 터져도 절대 한국에서의 촬영 현 장과 진리교의 실체를 세간이 알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 길이 한국을 패망으로 빠뜨리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모든 채널을 동원하여 한국의 진리 교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 도록 하라." " 네, 장군님, 명심하겠습니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가네와 참의원이 말 문을 열었다. " 오야봉, 이건 내 생각 이네만, 그 동안 나비의 향연을 모두 보 았네, 일본과 주변국에서 나비의 향연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대규모의 남녀가 벌이는 향연과 연출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지금까지는 판매에 지장이 없지만 이대 로 나간다면 문제가 야기되리라 보네. 지적하자면 내용면에서 별 변화가 없다는 것이네, 이번 달 테입이나 지난 달 테입이나 거의 비슷한 내용의 장면이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이런 방법은 어떻 겠나?" 가네와 의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 " 한국 진리교 제사장의 이름이 무엇이었지?" " 네, 박 팔성 이라고, 한국의 중부 지방에 속하는 대전 이라는 도시에서 명성을 날리던 팔성파의 오야봉 입니다." " 그럼, 휘하에 똑똑한 아이들도 더러 있겠구먼." " 네. 잘은 모르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팔성 이라는 자의 조직원 몇 놈에게 교육을 시킨 뒤 진리교의 집회 시간에 일반 신도로 위장하고 신도들의 틈에 섞여 있다가 의식이 진행되면 교육 받은 데로 관계를 맺는 거야, 조금은 변태스럽게 말이야, 그 순간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는 것이지, 그러면 나비의 향연에 싫증을 느끼려고 하던 인간들도 다시금 테입을 구입하겠지." 묵묵히 가네와 의원의 말을 듣고 있던 상석의 사내가 끼어 들 었다. " 그 방법도 테입의 판매 향상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 오야봉 은 참고 해 보도록 하고 테입 판매의 수입은 얼마나 되나?" " 네, 지난 달 수입이 조직 전체 수입의 20프로에 육박하고 있 습니다. 이번 달에는 더 오르리라 예상합니다." " 엄청난 수입이구먼, 그렇다면 테입의 판매는 우리 영광회에 도 많은 재정적인 도움이 되니 더 더욱 조심을 하도록." " 네, 명심하겠습니다." " 자...형제 여러분, 이것으로 우리 제국 군인의 영광회 모임을 맞히고 오랜만에 모였으니 술 한 잔씩 합시다." 사내의 말에 모두가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쳐 됐다. 오야봉이 본 채에 연결 된 인터폰을 누르자 잠시 후에 화사한 미소를 흘리 며 만호의 오야 마담이 들어 왔다. 마담은 실내의 사내들에게 일 일이 절을 하였다 사내들이 앉아 있는 상위에 보기에도 군침이 도는 요리들이 가 득 올려지자 마담은 인터폰을 눌렀다. 곧 이어 기모노를 단정히 차려 입은 여자들이 하나씩 들어와 사내들에게 절을 올리고 마담이 손짓하는 자리로 앉았다. 야마다 의 지시를 받은 만호의 사장이 사내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 자들을 섭외 해 놓았다. 마담은 사장이 일러 준데로 들어오는 여 자들을 각각의 사내들에게 앉히고 있었다. 여자들은 모두가 찾아보기 힘든 미인들이었다. 사내들은 여자들의 몸매와 미모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담 은 오야봉의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술좌석은 흥에 겨웠다. 사내들은 방금 전의 은밀하면서도 기품 있는 사내들이 더 이상 아니었다. 떠들고 웃고 여자에게는 짓궂 은 장난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모두가 그들의 짓궂 은 장난에도 일체의 거부를 나타내지 않고 순종하고 있었다. 술좌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술좌석이 끝나자 사내들은 여 자들의 안내로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하는 여자들을 따라 사라져 갔다. * * * 오야봉은 찬바람이 불어오는 현관에 서서 떠나가는 늙은 사내 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사내들은 시간을 두고 한 사람씩 나와서 는 서둘러 차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상석의 사내가 맨 마지막으로 만호를 떠나가자 잠시 후 오야봉 을 태우기 위하여 롤스로이드가 오야봉의 앞에 다가섰다. 오야봉 을 태운 차량이 만호의 현관을 서서히 빠져 나오자 도열해 있던 사내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오야봉의 차량이 현관문을 통과 하자 밖에서 대기하던 차량들이 서둘러 오야봉 차량의 앞쪽에 두 대가 앞서 출발하고 또 다른 두 대의 차량은 오야봉 차량의 뒤를 쫓아 만호를 떠나갔다. 겨울로 들어선 세운 상가는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난방기기를 판매하는 상점은 손님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지 만 다른 업종의 상점들은 추워진 날씨 탓에 손님이 없어 울상이 었다. 세운 상가 이 층에 밀집한 음란 테입 판매상가들도 장사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몇칠전 동네 친구의 소개로 이 곳에 나온 강식이는 어제부터 한 개의 테입도 팔지를 못 했다. 아직은 경험 부족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 손님인지 상가 사람인지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삐끼들은 용케도 테입을 구하고자 오는 손님을 식별하 고 한 발 먼저 달려들었다. 석유 난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녹이던 강식이는 계단을 올 라오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재빠르게 다가갔다. " 아저씨, 끝내주는 테입 있는데요." 사내는 얼굴을 땅으로 향 한 채 막아서는 강식을 비켜 나가려 고 하였다. " 아저씨, 죽여주는 테입 이라니 까요, 어디 단골 있어요." 경식은 집요하게 사내를 가라 막았다. 사내는 막아서는 경 식을 피해 몇 번을 좌우로 움직였다. 경식은 쉽사리 비켜주지않고 사내의 앞길을 막아섰다. 사내는 짜증이 나는지 경식의 어깨를 밀어 부쳤다. " 아..., 안 사면 그만이지 밀긴 왜 밀어 재수 없게..." 사내의 얼굴이 들쳐지며 강렬한 눈빛이 경식을 쏘아 보았다. 사내 의 얼굴은 날카로우면서도 험상궂어 보였다. 사내의 눈빛과 마주친 경식은 움찔 하였으나 이내 주위에 있 는 동료 삐끼 들을 떠올리자 객기가 치솟아 올랐다. " 아...니미, 보면 어쩔 거야...." 경식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사내의 손바닥이 경식의 볼따구 니에 작렬했다. 경식은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 거리며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바로 세우고 있었다. 그 순간에 사내의 발이 경식의 복부를 걷어찼다. 경식은 배를 부여안고 주저앉았다. 사내는 재차 경식의 턱을 발 로 후려 갈겼다. 경식은 입가에 피를 흘리며 땅 바닥에 나뒹굴었 다. 멀리서 이 광경을 발견한 경식의 동네 친구와 몇몇의 삐기들 이 사내에게 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 형님, 무슨 일이세요." " 이 자식 언제부터 여기 나왔어?" " 네, 형님, 이틀 되씁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 자식들아 사람 보는 법 좀 가르쳐 알았어." " 네, 알겠습니다." 사내는 돌아서며 경식의 옆구리를 또 다시 걷어차고 상가 안으 로 사라져 갔다. 사내는 좁은 상가의 길을 통과 해 삼 층으로 올 라가는 어두침침한 계단을 올라갔다. 세운 상가의 삼 층은 상가는 몇 개 없고 작은 사무실들이 작 은 아크릴 상호를 붙인 채 늘어서 있었다. 대다수가 컴퓨터와 관 련 된 사무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사내는 상호도 붙어있지 않은 사무실의 문을 당겨 보았다. 문이 잠겨 있자 사내는 호주머 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섰다. 사무실 안은 여 타 사무실과는 달라 보였다. 사무실 중앙에는 커다란 원탁이 있 었고 원탁을 덥고 있는 녹색의 천은 당구장 당구대에 깔려있는 천이었다. 그 위에 흩트려진 카드가 널여 있었다. 바닥에는 지저분 하게 담배꽁초가 수북히 버려져 있었다. 사내는 눈 살을 찌푸리 며 구석에 있는 내실이라는 붉은 글씨가 써 있는 방의 문을 열 려고 하다가 멈칫 손을 멈추었다. 내실 안에서 들려오는 간드러 진 신음 소리에 사내는 몸을 돌려 원탁 주위 의자에 앉아 담배 를 빼어 물었다. 사내는 원탁에 흩어져 있는 카드를 추슬러 패 를 맞춰보기도 하였다. 사내의 카드 다루는 솜씨는 신기에 가깝 게 능숙했다. 내실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조용한 사무실 공기를 뒤 흔들고 있었다. 사내는 내실의 벌어진 문틈으로 눈길을 가져갔다. 조잡하게 급조한 내실의 문은 문짝이 엉성해 문을 닫아도 틈 이 많이 벌어져 있었다. 틈새로 내실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사무실을 얻어 도박판을 벌리며 하우스 장 행세를 하고 있는 친구 녀석과 세운 상가 일 층 도로 가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는 여자가 붙어 있었다. 여자는 혼자 산다고 했는데 돈만 생기면 삼 층 사무실로 찾아 와 돈이 떨어질 때까지 노름을 하는 여자였다. 여자의 생김새는 밉상이 아니고 몸매도 그런 데로 잘 빠져 노름꾼들이 간혹 군침 을 흘리기도 하는 여자였다. 사내의 친구 녀석은 허우대가 멀쩡하 여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터라 자연스럽게 여자와 가까워 졌 다. 사내도 노름꾼 여자와 몇 번의 관계가 있었지만 그것은 여자 와 친구의 관계를 알고 난 뒤로 사내가 반 강제로 여자를 취했던 것이다. 여자도 사내의 요구를 거절 할 경우에 세운 상가 일대를 휘어 잡고 있는 사내의 기세에 포장마차라도 온전히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사내는 만족한 표정으로 먼저 옷을 입고 내실을 빠져나갔다. 여자 는 책상에 엎드린 채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흥분이 되었던 육체가 서서히 식어오자 여자는 갑자기 밀려 드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여자가 옷을 입고 내실을 빠져 나오자, 사내 둘은 원탁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여자는 아직도 눈물을 흘리며 사내들 곁을 급히 벗어나고 있었 다. " 거기 서 봐." 만식이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여자를 불러 세웠다. " 이리 와 봐, 어제 또 얼마 잃었어." 여자가 말을 안 하고 고개만을 숙이고 있자 사내는 친구인 하우 스장을 돌아보았다. " 야, 얼마나 잃었냐?" " 글세, 한 백만원 정도 잃었을걸.." 사내는 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백 만원 짜리 수표를 꺼내 어 여자에게 건네었다. 여자는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받으려 하지를 않았다. 그 돈은 대가처럼 느껴졌다. " 빨리 안 받어, 누군 돈이 남아서 주는 줄 알아. 그리고 당신 실 력으로는 맨 날 해봐야 오링이니깐 정신 차리고 장사나 잘해, 앞으 로 또 한 번 이 사무실에서 내 눈에 띄면 손모가지를 잘라 버리겠 어." 여자는 사내가 건네주는 수표를 마지못해 받아들고는 하우스장을 흘겨보며 사무실을 나갔다. " 야, 장팔아, 계획은 어떻해 되가고 있냐?" 하우스장인 장팔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뜸을 들이고 있었다. " 빨리 자식아 어떻게 되가고 있냐니깐." " 걱정 하지말어 자식아, 다 잘 돼가고 있으니깐, 앞으로 이틀 있 으면 물건이 들어 온다니 깐, 그럼 우리도 이 동네 뜨는 거야." " 확실해, 이번 일 틀어지면 너나 나나 다 끝장이야 알어." " 자식 되게 걱정이네." " 야 씹세야, 걱정 안 하게 됐냐, 돈이 자그마치 십 억이야 자식 아, 그리고 지난달에 용산 전자상가 용팔이 형도 다 와서 망그러 졌 잖아." " 야, 용팔이 형은 미련하게 부산으로 들어 왔으니 걸려 들었지." " 그럼, 여수는 정말 안전하지..." " 그래 임마 염려 붙들어 매..응, 여수 바닥에서 가장 난다 긴다 하는 선장들이야, 일본은 눈감고도 왔다갔다 하는 애들이야, 그리고 여수 칠복파 애들이 앗쌀하게 도와준다고 했어." " 어찌 되었든 이번 일에 우리 목숨이 걸여있어, 그리고 이번에 들어오는 테입의 화질은 깨끗하지." " 자식, 나비의 향연인가 하는 테입의 화질은 끝내 주기로 유명 하잖아, 일본 놈들이 얼마나 잘 만들었게, 걱정하지마.... 응, 물건 만 이틀 후에 들어오면 하루만에 세 곱 장사로 다 풀어 버릴 수 있으 니깐." " 그렇게 빨리." " 지금 세운 상가나 용산이나 어디고 간에 나비의 향연을 찾는 인 간이 줄을 섰어 줄을....인간들이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밑에 이 층에도 하루에 수 백명씩 찾으러 온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중학생 녀석들도 찾는다니 말 다했지. 가격도 부르는 게 값이라 지금은 개 당 십 만원으로 책정됐어, 물건만 도착하면 박스 채로 사겠다는 나 까마가 수 도 없어..." " 그래, 그런데 그 테입말야 정말 복사가 안 되냐?" " 용산도 그렇고 이 곳에도 날고기는 놈들이 수 없이 복사 방지 프로그램을 풀어 보려고 메 달렸지만 허사야 쪽발이 놈들이 어찌나 완벽하게 해 놨는지 오죽하면 303호에 있는 거... 뭐냐, 게임 시디 푸는 애들도 손을 들었으니 말 다했지 그리고 그 놈의 테입이 복사 기계에만 들어갔다 하면 화면이고 자시고 간에 몽땅 날라 버리는 것이야, 그러니 테입 구하기는 어렵고 될 리가 없지...." " 아...좌우지간 쪽발이 새끼들 장사 속은 알아 줘야 한다니 깐." 사내 둘은 이틀 후의 거사를 다시 한 번 검토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요시코는 거의 하루종일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깊은 잠은 잘 수가 없었다. 하루 내내 악몽 속에서 헤메이다 놀라서 깨어나기가 일수였다. 요시코는 눈을 뜰 때마다 옆에서 지켜 보고 있는 사내를 발견 할 수가 있었다. 요시코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눈은 자상 하고 자애로워 보였다. 요시코는 사내의 정성에 눈물이 흘렀다. 교 통 사고의 악몽이 찾아 올 때도 의식의 끝자락에 사내가 있음을 느끼면 참을 수가 있었다. 삿포로의 해는 밀려오는 추위에 쫓겨 모리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둠은 차가운 냉기를 가득 품고 천천히 주위를 덮어오기 시작했다. 요시코는 어둠이 온통 찾아온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자리에 누워 있기에는 사내에게 큰 죄를 짖는 기분이 들었다. 몸을 움직이니 여기 저기가 쑤시고 저렸다. 사내는 일어나는 요시코를 극구 제지하였지만 요시코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선생님 죄송해요, 공연히 저 때문에...." " 아니다, 요시코, 오히려 내가 너에게 미안하구나." 요시코는 정색을 하며 사내의 말을 막았다. " 선생님 그게 무슨 소리 세요, 미안하시다니.. 그럼 제가 송구스 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사내는 잠자코 요시코의 등을 당겨 요시코를 가슴에 앉았다. 요시 코는 감격에 겨워 눈물이 흘렀다. 요시코는 지금껏 살아온 순간 중 에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사내였 다. 단 하루를 보았고 단 한 번 품에 안겼는데 사내는 수 십 년을 언제나 옆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과 사랑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 참, 선생님 식사는 어떻게..." " 나는 괜찮은데 요시코가 시장하겠군." 사내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다. 그저 멍하니 요시코의 곁에서 앉아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마음과 요시코의 행동 을 수 없이 반문하며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요시코의 자신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마음 씀씀이는 일반 화류계 여성의 친절이 아 니었다. 직업에서 비롯되는 친절과 복종은 이내 알 수가 있었다. 요시코의 정성은 그런 눈치를 전혀 찾을 곳이 없었다. 요시코의 정성과 순종은 지극히 사랑하는 지아비에게나 할 수 있는 행동 이였다. 사내는 요시코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알 수가 없 었다. 그리고 요시코를 대하는 자신의 현실도 이해하기가 힘이 들었 다. 그저 요정 집에서 만나게 된 아름다운 여자, 다른 기녀들 위에 서 군림하는 얼굴마담, 전직 탤런트, 그래도 엄격히 말하면 요시 코는 사내에게 웃음을 팔고 있는 기녀임에는 틀림없었다. 기녀가 맘 에 드는 손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 할 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 이였다. 있을 수 있는, 손님과 기녀의 사이였지만 사내의 마음 은 이제껏 만나 보았던 여자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 무엇이 가슴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 느낌은 야릇한 감정으로 사내의 사냥 계획마저도 연기하게 하는 힘이 숨겨져 있었다. 비정하고 냉철한 전문 킬러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 이였다. 요시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에 사고의 원인 이 된 민어를 요시코는 정성껏 손질하여 민어 매운탕을 준비 하였 다. 사내를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는 요시코의 마음은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음식을 식탁에 모두 준비하고 요시코는 사내를 부르러 침실로 들 어 왔다. 침실은 불을 밝히지 않아 어두웠다. 커다란 창문으로 정원 의 오렌지 색 수은 등 불빛이 침실의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사내는 어두커니 창가에 서서 그녀가 들어온 것조차도 모르는 듯 미동을 하지 않았다. 요시코는 가만히 사내의 눈길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 를 돌렸다. 맞은 편 주택의 응접실이 한 눈에 들어 왔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응접실에는 집주인으로 보이는 사 내와 그의 부인 같은 여자가 아이들의 재롱에 함빡 웃고 있었다. 아 이들은 작은계집 아이들로 둘 이였다. 하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고 하나는 노래에 맞혀 어설 픈 춤을 추고 있었다. 요시코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얼굴 에는 희미한 미소가 묻어 있었다. 요시코는 볼 수가 있었다.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에서 흐르고 있는 처절한 고독의 흔적을, 요시코는 사내의 등에 얼굴을 묻고 가슴을 끌어안았다. 사내의 손이 요시코의 두 손을 가만히 잡아 쥐었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 다. 서로의 아 프고 슬픈 사연을 침묵으로 메 만져 주고 있었다. 요시코는 밤새 사내의 팔을 베고 잠을 잤다. 편안하고 아늑한 숙 면이었다. 요시코가 정성껏 준비한 아침을 먹은 사내는 볼일이 있다 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시코는 사내가 일어나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사내에게서 느꼈던 이 틀의 행복이 꿈속처럼 느껴졌다. 사 내는 지금 떠나면 다시는 찾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문득 요시코는 아직까지 사내의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사내에게 물어 볼 자신이 없었다. 요시코 는 가슴이 답답했다. 다시는 사내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안타까 움에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요시코의 자동차가 사고로 없는 탓에 택시를 불러야 했다. 요시코 는 차가 있었다면 시내까지만 이라도 사내를 모셔다 주며 시간을 함께 하고 싶었다.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사내에게 함께 택시를 타 고 시내까지 나가고 싶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사내는 택시가 현관 앞에 도착하여 경음기 소리를 내자 무표정하게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서며 사내는 혼자 말처럼 감정 없이 말을 하였다. " 요시코, 시내에서 볼일을 맞히고 돌아오겠다. 일이 늦어지면 늦 은 밤이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은가?" 요시코는 사내의 말에 너무도 놀라 깜짝 놀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다시는 사내를 볼 수가 없을 것 같은 초조함과 절망에 빠졌던 요시코는 감격에 겨워 말이 심하게 떨렸 다. " 네, 아..아무..때.때나 상관이 없습니다. 요..요시코는 선생님을 기 다리고 있겠습니다." 사내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 다시 한 번 택시를 갈아타고 는 지하 상가 입구에 내렸다. 택시에서 내린 사내는 지하도를 내려 가 상가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물품 보관소의 문을 열었다. 보관함에는 양복과 조그만 가방이 있었다. 사내는 양복과 가방을 꺼내들고 주위를 살핀 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화 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는 50대의 품위 있는 중년의 사내가 손에는 조그만 가방과 캐주얼 옷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 사 내의 희긋희긋한 흰머리가 보기에 좋았다. 사내는 지하상가를 빠져나와 택시로 호텔로 향했다. 후론트 맨은 정문에서 걸어 들러오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났다. 엄청나게 값비싼 룸을 3일 씩이나 예약하고는 이 틀을 다른 곳에서 자고 들어오는 사내가 조금은 의아스럽게 생 각되었다. 룸으로 들어선 사내는 팬티만을 남겨두고 옷을 모두 벗었다. 그 리고는 작은 가방에서 설계 도면을 꺼내었다. 도면은 사냥 할 곰이 묵고 있는 집의 상세한 도면이었다. 사내는 집을 설계한 설계 사무실에 몇 칠 전 잠입하여 어렵지 않게 도면 을 입수 할 수가 있었다. 도면을 찬찬히 검토한 사내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눈앞에 말을 더듬으며 눈물을 보이던 요시코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내는 요시 코의 순진하고 맑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확실히 그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기녀임에도 그녀에게서는 아침 이슬 같은 상쾌함이 있었다. 사내는 이번 일이 끝나면 몇 칠은 요시코의 집에서 숨어 있기로 작 정을 하였다. 사냥터가 바로 옆에 있었지만 의외로 사건 현장 주변 이 오히려 안전한 경우가 있었다. 사내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 다. 사냥 바로 직전에 충분한 휴식은 그만큼 실패의 확률이 적어 지는 것을 사내는 경험으로 알 수가 있었다. 오후 늦게야 잠에서 깨어난 사내는 짐을 챙겨 호텔을 빠져 나왔 다. 택시를 잡아탄 사내는 삿포로 역으로 향했다. 역에 도착한 사내는 역사 안에 자리한 물품 보관소로 향했다. 역사 안의 물품 보관소는 요금에 따라 크기가 다양한 캐비넛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사내는 커다란 캐비넛의 보관함에 동전을 넣고 비밀 번호를 눌렀다. 보관함 안에서 사내는 큼지막한 등산용 배낭을 꺼내었다. 배낭을 들고 사내는 역사를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모리산 입구에 내렸다. 양복 차림에 배낭이 어색해 보였지만 누구 하나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개울가에 위치 한 화장실 을 발견하고 발길을 화장실로 옮겼다. 거리가 조금 떨어진 화장실은 사람들 이 잘 이용을 안 한 탓에 다소 지저분했지만 사람은 없 었다. 사내는 화장실 문을 잠그고 배낭을 열었다. 배낭 속에는 등산 복과 등산화 그리고 자일과 몇 몇의 소품이 있었다. 사내는 작은 가 방에서 분장용품을 꺼내어 얼굴의 분장을 말끔히 지우고 새롭게 화장을 하였다. 화장실을 열고 나오는 젊은 사내는 검게탄 얼굴이 꽤나 산을 좋아하는 산악인 같았다. 사내가 입고 있는 등산복은 고 가의 고어텍스로 몸에 착 달라붙고 부피가 적은 반면 보온성과 활 동 성이 뛰어난 고 기능의 등산복이었다. 사내는 배낭을 짊어지 고 씩씩한 걸음으로 모리산을 향 해 걸어갔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가벼운 저녁을 서둘러 먹은 사내는 매표소에서 표를 끊 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매표소의 직원은 눈 덮인 산을 야간에 오르려는 사내가 염려되 었으나 사내가 입고있는 옷이나 배낭하며 장비 일체가 전문 산악 인으로 판단되어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내는 머리에 헤드렌턴을 부착하고 눈이 조금 남아 있는 등산 로를 걸어 올라갔다. 중턱에 이르자 길이 상당히 미끄러웠다. 사내 는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내 등산화에 부착하고 발길을 빨리 하 였다. 얼마 후 정상에 오른 사내는 방향을 동북 방향으로 잡고 하 산을 시작했다. 동북 방면의 길은 요시코와 사냥감이 살고 있는 지 역이었다. 중간쯤 내려온 사내는 등산로를 버리고 숲길로 헤쳐들어 갔다. 등산로에 비해 숲길은 많이 눈이 쌓여 진행이 더디어 졌다. 사내는 숨을 고르며 무릎까지 빠져드는 눈길을 헤치며 길을 재 촉하였다. 어느 정도 내려오자 멀리 민가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 기 시작했다. 사내는 머리에서 비추던 헤드렌턴을 벗어버리고 배낭 에서 소형의 야간 투시 경을 꺼내 썼다. 조금 더 내려오자 주택가 의 모습이 투시 경을 벗고도 보일 정도로 가까워 있었다. 사내는 오 른쪽 방향으로 숲길을 옮겨 나갔다. 저 만치에 요시코의 집이 눈에 보였다. 요시코의 집은 환하게 밝 혀 있었다. 정원이며 안채 할 것 없이 모든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내는 불현듯 불을 밝히고 기다리고 있을 요시코가 보고 싶었 다. 사내는 머리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고 상념을 떨쳐 버렸다. 혼도 참의원이 휴가를 즐기고 있는 저택은 크기가 흡사 성을 방불케 했다. 숲 속에서 바라본 저택은 정원의 크기도 운동장 넓이 만 했다. 이 층 목조 건물에 값비싼 외장제를 사용한 저택은 고급 스러우면서도 품위 있게 지어져 있었다. 저택의 원 주인은 다까시 오 조직과 앙숙 관계에 있는 후마모토 조직의 오야봉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내는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저택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정원과 현관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고 이 층에 있는 접대용 방에는 불이 밝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혼도 의원이 묵고 있 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내는 추위를 참아가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늦어지자 아래층의 불들이 하나 둘 꺼지고 정원과 현관에 서 있던 경호원들 도 집안으로 사라져 갔다. 혼도 의원이 묵고 있는 이 층의 방에만 불이 밝혀 있었다. 사내는 배낭에서 작은 가방을 꺼내어 어깨에 걸치고 커다란 배낭 은 낙엽을 파 헤쳐 그 속에 감추었다. 숲을 빠져나온 사내는 저택의 정문을 먼발치에서 살펴보았다. 경비원 초소에는 서너 명의 사내들 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사내는 인적이 없는 사거리에 설치 된 하수도 맨홀 뚜껑을 재빠르게 열고 밑으로 내려갔다. 조그만 손전등으로 비쳐 본 하수도는 수증기가 가득 하여 앞을 분간키가 어려웠다. 저택으로 연결 된 하수구에서 더운 온천수가 흘러 내려오며 수증기를 만들고 있었다. 혼도 의원이나 아니면 경 호원들 중에서 누군가가 목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수증 기로 가득 찬 하수구를 무릎 걸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수구의 크 기는 사내가 무릎을 끓고 두 손은 발을 삼아 네 발로 걸어가는 데도 머리를 쳐들 수 없는 높이의 동그란 형태에 관이었다. 앞으 로 전진하던 사내는 심한 수증기와 하수관 안에 가득한 유황 냄새 로 숨을 쉬기가 곤란하였다. 사내는 단전에 기운을 모으고 몸 안 에 남아 있는 산소를 온 몸의 신경으로 천천히 돌려 보내며 호흡을 최대한 억제하며 앞으로 전진을 하였다. 한참을 칠흙같은 어둠 속을 전진하던 사내의 앞에 희미한 불빛 이 보였다. 조금 더 나아가자 동그란 하수관이 끝나며 상자 같은 모양의 공 간이 나타났다. 사방은 좁았지만 허리를 펼 수 있을 정도로 높이 가 있었다. 머리 위에는 철근으로 가로 세로로 엮어서 그물 같은 모양의 쇠창살이 있었다. 아마도 저택의 정원을 물 청소 할 경우에 많은 양의 물이 쉽사리 하수구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하수도 덮개 같았다. 사내는 두 다리를 양옆으로 뻗어 몸을 지탱하 며 쇠창살에 가까이 접근 해 창살 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한 참을 있어도 인기척이나 주변 공기의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사내는 손에 힘을 주어 창살을 들어 올렸다. 창살은 쉽사리 움직이지를 않았다. 사내는 정신을 가다듬고 호흡을 멈춘 채 몸 안의 모든 기운 을 일시에 두 팔에 실어 보냈다. 창살은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밖으로 내보낸 사내는 빠르 게 주위를 둘러보고 민첩하게 하수관을 빠져 나왔다. 어둠을 틈타 사내는 흡사밤 고양이처럼 가볍게 이 층과 연결 된 빗물 홈통을 타 고 메달였다. 홈통을 타고 사내는 손쉽게 이 층을 지나 지붕까지 오 를 수가 있었다. 지붕에 도착 한 사내는 잠시 숨을 고르며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쏟아져 내릴 것 만 같은 하늘에는 차가운 쓸쓸함이 바람에 움 직이고 있었다. 사내는 몇 칠을 두고 암기 한 저택의 설계 도면을 머리에서 그 려보았다. 그리고 연체 동물처럼 자연스럽게 지붕을 기어 가기 시작 했다. 지붕 위에 튀어나온 서너 개의 굴뚝 중에서 크기가 제법 큰 굴뚝 앞에 몸을 멈춰선 사내는 굴뚝의 폭을 눈여겨 보았다. 어린아 이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의 크기였다. 사내는 심호흡을 크 게 한 뒤 몸을 최대한 이완시키며 천천히 굴뚝 안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별 빛에 움직이는 사내의 모습은 문어나 낙지처럼 느 리고 부드러워 보였다. 저택의 이 층에 자리 한 접대용 방과 붙어있 는 커다란 응접실의 벽난로 덮개가 작은 금속음을 발하며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머리와 온 몸에 시커먼 숯 검정을 잔뜩 묻힌 사내 가 힘겹게 벽난로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벽난로를 빠져나온 사내 는 곧 바로 벽난로 위로 사뿐히 뛰어 올라가 천정을 밀어 올렸다. 그 곳은 손쉽게 들어 올려졌다. 저택의 규모에 걸맞게 복잡한 전 기 배선을 수리하기 위하여 천장 한 곳을 틔어놓은 곳이었다. 사내 는 거미처럼 천장 속으로 사뿐히 올라가고 있었다. 천장 안은 허리 를 굽히고 앉아 있을 높이의 공간이 있었다. 사내는 천장 안에서 아 주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나아갔다. 소리를 죽이기 위해 사내의 움직임은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움직임의 속도도 느려 터졌다. 한참 만에야 사내는 양철로 만들어진 환풍기의 닥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드라이버를 꺼내어 닥트의 아래 부분 에 있는 나사를 풀었다. 나사를 모두 풀고 닥트를 들어 옮기자 환풍 기가 있었다. 환풍기 날개 사이로 어둠이 입을 열고 있었다. 사내는 환풍기에 부착 된 나사도 모두 풀었다. 그리고 환풍기를 가볍게 한 번 들어보 고는 제 자리에 다시 놓았다. 그리고 환풍기와 연결된 전선을 끊어 놓았다. 환풍기는 목욕탕의 불을 켜면 자동으로 돌게 되어 있었다. 환풍기를 제 자리에 놓은 사내는 옆으로 조금 자리를 옮겨 나아갔 다. 그 곳에도 전기 수리를 위하여 틔어 놓은 사각의 패널이 있었 다. 사내는 패널을 조금 들어 실내를 살펴보았다. 사내는 머리에 헤드렌턴을 부착하고 눈이 조금 남아 있는 등산 로를 걸어 올라갔다. 중턱에 이르자 길이 상당히 미끄러웠다. 사내 는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내 등산화에 부착하고 발길을 빨리 하 였다. 얼마 후 정상에 오른 사내는 방향을 동북 방향으로 잡고 하 산을 시작했다. 동북 방면의 길은 요시코와 사냥감이 살고 있는 지 역이었다. 중간쯤 내려온 사내는 등산로를 버리고 숲길로 헤쳐들어 갔다. 등산로에 비해 숲길은 많이 눈이 쌓여 진행이 더디어 졌다. 사내는 숨을 고르며 무릎까지 빠져드는 눈길을 헤치며 길을 재 촉하였다. 어느 정도 내려오자 멀리 민가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 기 시작했다. 사내는 머리에서 비추던 헤드렌턴을 벗어버리고 배낭 에서 소형의 야간 투시 경을 꺼내 썼다. 조금 더 내려오자 주택가 의 모습이 투시 경을 벗고도 보일 정도로 가까워 있었다. 사내는 오 른쪽 방향으로 숲길을 옮겨 나갔다. 저 만치에 요시코의 집이 눈에 보였다. 요시코의 집은 환하게 밝 혀 있었다. 정원이며 안채 할 것 없이 모든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내는 불현듯 불을 밝히고 기다리고 있을 요시코가 보고 싶었 다. 사내는 머리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고 상념을 떨쳐 버렸다. 혼도 참의원이 휴가를 즐기고 있는 저택은 크기가 흡사 성을 방불케 했다. 숲 속에서 바라본 저택은 정원의 크기도 운동장 넓이 만 했다. 이 층 목조 건물에 값비싼 외장제를 사용한 저택은 고급 스러우면서도 품위 있게 지어져 있었다. 저택의 원 주인은 다까시 오 조직과 앙숙 관계에 있는 후마모토 조직의 오야봉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내는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저택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정원과 현관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고 이 층에 있는 접대용 방에는 불이 밝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혼도 의원이 묵고 있 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내는 추위를 참아가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늦어지자 아래층의 불들이 하나 둘 꺼지고 정원과 현관에 서 있던 경호원들 도 집안으로 사라져 갔다. 혼도 의원이 묵고 있는 이 층의 방에만 불이 밝혀 있었다. 사내는 배낭에서 작은 가방을 꺼내어 어깨에 걸치고 커다란 배낭 은 낙엽을 파 헤쳐 그 속에 감추었다. 숲을 빠져나온 사내는 저택의 정문을 먼발치에서 살펴보았다. 경비원 초소에는 서너 명의 사내들 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사내는 인적이 없는 사거리에 설치 된 하수도 맨홀 뚜껑을 재빠르게 열고 밑으로 내려갔다. 조그만 손전등으로 비쳐 본 하수도는 수증기가 가득 하여 앞을 분간키가 어려웠다. 저택으로 연결 된 하수구에서 더운 온천수가 흘러 내려오며 수증기를 만들고 있었다. 혼도 의원이나 아니면 경 호원들 중에서 누군가가 목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수증 기로 가득 찬 하수구를 무릎 걸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수구의 크 기는 사내가 무릎을 끓고 두 손은 발을 삼아 네 발로 걸어가는 데도 머리를 쳐들 수 없는 높이의 동그란 형태에 관이었다. 앞으 로 전진하던 사내는 심한 수증기와 하수관 안에 가득한 유황 냄새 로 숨을 쉬기가 곤란하였다. 사내는 단전에 기운을 모으고 몸 안 에 남아 있는 산소를 온 몸의 신경으로 천천히 돌려 보내며 호흡을 최대한 억제하며 앞으로 전진을 하였다. 한참을 칠흙같은 어둠 속을 전진하던 사내의 앞에 희미한 불빛 이 보였다. 조금 더 나아가자 동그란 하수관이 끝나며 상자 같은 모양의 공 간이 나타났다. 사방은 좁았지만 허리를 펼 수 있을 정도로 높이 가 있었다. 머리 위에는 철근으로 가로 세로로 엮어서 그물 같은 모양의 쇠창살이 있었다. 아마도 저택의 정원을 물 청소 할 경우에 많은 양의 물이 쉽사리 하수구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하수도 덮개 같았다. 사내는 두 다리를 양옆으로 뻗어 몸을 지탱하 며 쇠창살에 가까이 접근 해 창살 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한 참을 있어도 인기척이나 주변 공기의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사내는 손에 힘을 주어 창살을 들어 올렸다. 창살은 쉽사리 움직이지를 않았다. 사내는 정신을 가다듬고 호흡을 멈춘 채 몸 안의 모든 기운 을 일시에 두 팔에 실어 보냈다. 창살은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밖으로 내보낸 사내는 빠르 게 주위를 둘러보고 민첩하게 하수관을 빠져 나왔다. 어둠을 틈타 사내는 흡사밤 고양이처럼 가볍게 이 층과 연결 된 빗물 홈통을 타 고 메달였다. 홈통을 타고 사내는 손쉽게 이 층을 지나 지붕까지 오 를 수가 있었다. 지붕에 도착 한 사내는 잠시 숨을 고르며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쏟아져 내릴 것 만 같은 하늘에는 차가운 쓸쓸함이 바람에 움 직이고 있었다. 사내는 몇 칠을 두고 암기 한 저택의 설계 도면을 머리에서 그 려보았다. 그리고 연체 동물처럼 자연스럽게 지붕을 기어 가기 시작 했다. 지붕 위에 튀어나온 서너 개의 굴뚝 중에서 크기가 제법 큰 굴뚝 앞에 몸을 멈춰선 사내는 굴뚝의 폭을 눈여겨 보았다. 어린아 이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의 크기였다. 사내는 심호흡을 크 게 한 뒤 몸을 최대한 이완시키며 천천히 굴뚝 안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별 빛에 움직이는 사내의 모습은 문어나 낙지처럼 느 리고 부드러워 보였다. 저택의 이 층에 자리 한 접대용 방과 붙어있 는 커다란 응접실의 벽난로 덮개가 작은 금속음을 발하며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머리와 온 몸에 시커먼 숯 검정을 잔뜩 묻힌 사내 가 힘겹게 벽난로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벽난로를 빠져나온 사내 는 곧 바로 벽난로 위로 사뿐히 뛰어 올라가 천정을 밀어 올렸다. 그 곳은 손쉽게 들어 올려졌다. 저택의 규모에 걸맞게 복잡한 전 기 배선을 수리하기 위하여 천장 한 곳을 틔어놓은 곳이었다. 사내 는 거미처럼 천장 속으로 사뿐히 올라가고 있었다. 천장 안은 허리 를 굽히고 앉아 있을 높이의 공간이 있었다. 사내는 천장 안에서 아 주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나아갔다. 소리를 죽이기 위해 사내의 움직임은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움직임의 속도도 느려 터졌다. 한참 만에야 사내는 양철로 만들어진 환풍기의 닥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드라이버를 꺼내어 닥트의 아래 부분 에 있는 나사를 풀었다. 나사를 모두 풀고 닥트를 들어 옮기자 환풍 기가 있었다. 환풍기 날개 사이로 어둠이 입을 열고 있었다. 사내는 환풍기에 부착 된 나사도 모두 풀었다. 그리고 환풍기를 가볍게 한 번 들어보 고는 제 자리에 다시 놓았다. 그리고 환풍기와 연결된 전선을 끊어 놓았다. 환풍기는 목욕탕의 불을 켜면 자동으로 돌게 되어 있었다. 환풍기를 제 자리에 놓은 사내는 옆으로 조금 자리를 옮겨 나아갔 다. 그 곳에도 전기 수리를 위하여 틔어 놓은 사각의 패널이 있었 다. 사내는 패널을 조금 들어 실내를 살펴보았다. 혼도 의원은 힘없이 욕실로 향했다. 잠들기 전에 목욕을 하는 습관은 수 십 년을 지켜온 철칙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의원은 잠들기 직전의 목욕을 거른 적이 없었다. 욕실의 불을 밝힌 의원은 욕조의 밸브를 열었다. 알싸한 유황 냄 새가 풍기며 많은 양의 온천수가 쏟아져 나왔다. 욕실은 온천수의 열기로 수증기가 가득 찼다. 의원은 고개를 들어 천장에 설치된 환 풍기를 올려다보았다. 환풍기는 고장이 났는지 돌지를 않았다. 환풍기 앞에 도착한 사내는 살며시 환풍기를 들어 올렸다. 욕실은 수증기가 가득 하여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의원은 평소 보다 빨리 욕조에서 일어서려고 하였다. 가득한 수증기로 호흡이 힘들었다. 유황 냄새도 환풍기가 고장이 나 심하게 코를 찔렀다. 의원은 욕조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눈을 감고 일어섰던 의원은 눈을 뜨는 순간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의원의 코앞에 낮선 사내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사내는 두 발의 발등을 천장의 환풍기 턱에 걸치고 거꾸로 메 달 려 있 었다. 의원의 다리가 힘이 빠지며 막 주저앉으려는 순간 사내 의 두 손이 의원의 양 쪽 귀밑으로 빛살처럼 다가왔다. 의원은 귀가 터지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의식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순간에 욕실의 문이 열리며 뜻밖에도 잠에 빠져드리라고 예상 했 던 여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여인은 문을 열고 들어서다 천장에 메 달려 있는 사내와 욕조의 물에 얼굴을 묻고 쓰러져 있는 의원을 발견하고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대었다. 여인의 비명은 체구와는 다르게 상당히 컸다. 사내는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여인은 뒤 걸음으로 욕 실을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사내는 사뿐히 욕실로 내려와 막 등을 돌리고 욕실을 빠져나가는 여인의 목을 수도로 거세게 내리쳤다. 여 인은 맥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갑작스런 사태 당황한 사내가 손끝 에 사정을 두지 않아 여인은 목뼈가 부러지며 절명 한 것 같았다. 황급한 발 걸음소리가 계단을 뛰어 오르고 있었다. 이내 문을 두드 리던 소리는 발로 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저택의 정원과 담장 밑의 모든 가로등이 밝혀지며 저택은 순식 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사내는 침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한 구석에 장식장이 보였다. 장식장 안의 진열대에는 금빛의 과일꽃이 가 도자기 같은 키가 낮은 항아리에 수북히 꽂혀 있었다. 사내는 장 식장을 열고 과일 꽃이를 한아름 손아귀에 잡아 넣었다. 뾰족한 끝 이 두 갈래로 갈라진 과일꽃이는 훌륭한 암기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사내는 몇 개의 꽃이를 오른 손에 쥐고 방 한 켠 에서 문을 주시 하고 있었다. 문은 거칠게 흔들리더니 이내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며 몇 명의 사내들이 뛰어 들어 왔다. 사내들의 손에는 권총과 일본도 가 들여 있었다. 뛰어들던 사내들은 방 한 구석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사내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 추었다. 손에 든 권총을 들어올리 던 맨 앞의 경호원은 사내의 손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희미하게 본 것 같았다. 곧 이어 경호원은 총을 든손에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경호원의 손에는 금빛의 과일꽃이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뒤따르 던 사내들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고 있었다. 뒤따르던 사내들의 한 쪽 눈에도 과일꽃이가 하나씩 박혀 있었다. 앞서던 경호원들의 전열이 흐트러지며 뒤따르던 몇 몇의 사내 들은 주춤거리고 있을 뿐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를 않았다. 그사이 사내는 정원과 연결 된 대형 유리의 고리를 풀었다. 사내의 손이 재 차 허공을 가르자 서너 개의 과일꽃이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 갔다. 경호원 중에 다시금 총구를 사내에게 겨누었던 경호원은 비명을 지 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과일꽃이는 정확하게 경호원의 이마에 박혀 있었다. 사내가 다시금 손을 위로 쳐들자 경호원들은 재빠르게 복도 쪽의 벽으로 몸을 피했다. 그사이 사내는 대형 유리 창을 열고 아래 층 정원으로 몸을 날렸다. 경호원들은 앞을 다투어 유리창으로 달려 왔으나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이층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화단으로 몸을 굴 렸던 것이었다. 경호원들이 유리창을 떠나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짧은 시간에 사내는 밖으로 향한 담 옆에 솟아있는 나무를 흡사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뛰어올랐다. 경호원들은 정원에 도착하는 순 간에 사내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높다란 담을 넘어가는 것을 보았 다. 저택은 갑자기 소란스러워 졌다. 사내가 담을 넘어가는 순간에 담에 설치 된 경보 시스템이 작동하여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밤 공 기를 흔들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경찰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와 방 범업체의 순찰차가 속속 들이 닥쳤다. 경찰은 신속하게 신흥 부촌의 진입로와 모든 길목을 철저히 봉쇄하였다. 모든 경비보안 시스템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점은 부촌에 워낙 쟁쟁한 사람들이 살고 있 기에 삿포로 경찰청의 배려로 가능한 일 이였다. 담을 넘어 골목으로 뛰어내린 사내는 가로등을 피하며 어둠 속으 로 빠르게 걸음을 옮겨 나갔다. 사내가 요시코의 집 근처에 이르렀 을 때는 부촌의 큰 길 여기저기에 경찰과 방범업체의 요원들이 상 당수 깔려 있었다. 사내는 등에 메 달린 작은 가방에서 티셔츠와 청 바지를 꺼내어 옷을 갈아입었다. 사내를 기다리고 있던 요시코는 요란한 경찰 순찰 차의 사이렌 소리와 집 앞의 도로를 달려가는 차량들의 소음에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건너 편 집의 방에도 불이 밝혀지며 사람들이 창 가에 서서 소란스러워진 동네를 호기심의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 었다. 요시코는 동네에 무슨 사고가 생긴 거라고 생각하였다. 밤 공기가 쌀쌀하여 요시코는 이내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 다. 요시코는 응접실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지 고 있었다. 요시코는 소파에 앉아 정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움직 임도 없이 정원만을 응시하고 있는 요시코의 눈앞에 커다란 손이 덮쳐오며 눈을 가렸다. 요시코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려 하였으 나 눈을 가린 손이 힘을 주며 고개를 움직이지 못하게 제지하였다. 요시코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 이런, 떨고 있구나, 그저 장난을 한 번 쳐본 것인데." 사내의 목소리였다. 요시코는 안도감과 반가움에 눈물이 솟았다. " 선생님 어떻게..." " 뒤 문이 열려 있길레 요시코를 놀려 주려고 몰래 들어 왔지." 요시코는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얼굴은 왠지 세수를 안 한 것처럼 지저분해 보였고 사내가 입고있는 옷도 구김이 많이 가 있었다. 전체적인 느낌이 사내의 지금 모습은 정상이 아닌 것 같 았다. 요시코는 정원의 불을 모두 끄고 응접실의 불도 희미하게 하 였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 선생님 피곤 해 보이시는데 목욕물부터 준비할까요." " 응, 그래 주겠나." 요시코는 서둘러 욕실의 욕조에 물을 받았다. " 선생님 저녁 식사는 어찌 하셨는지요." " 밥 생각은 없고 술 한 잔 했으면 하는데, 참, 요시코는 저녁을 먹었나?" " 네, 저는 먹었습니다, 그럼 목욕을 하시는 동안 술상을 준비하겠 습니다." 사내는 요시코가 건네주는 가운을 걸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요시 코는 사내가 벗어놓은 옷가지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사내가 벗어놓은 옷가지는 아무렇게나 구겨 놓은 옷을 금방 입은 것 같이 구김이 많이 져 있었다. 그리고 사내 가 들어왔다는 뒷문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금껏 이 집에 살면서 뒷문을 열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런데 사내는 뒷문이 열려있었다고 하였다. 요시코는 머리가 복잡 하 였으나 사내가 돌아와 준 것이 고마워 깊이 생각지 않았다. 사내는 욕조의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은 채 조금 전의 급 박했던 순간을 떠 올려 보았다. 사내는 의원을 처치하기 전에 방안 의 여자부터 처리하지 않은 실수를 아쉬워했다. 그 순간에 방으로 먼저 내려와 여자를 의식만 잃을 정도로 혈을 짚어 났으면 상황이 이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여자도 죽음을 맞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여자의 헛된 죽음에 마음이 걸렸다. 사내가 목욕을 맞히고 나오자 요시코는 깔끔한 술상을 소담하게 차려 놓았다. 사내는 말없이 요시코가 따라주는 술잔만을 비웠다. 사내는 상당히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요시코는 사내의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아 묵묵히 술잔만을 채웠다. " 요시코, 몇 칠 가게에 나가지 않아도 관계가 없다면 함께 몇 칠 간 여행을 하였으면 한다." " 네, 저는 상관이 없지만 혹여 제가 선생님의 여행에 짐이나 되 지않을가 걱정입니다." " 무슨 소리..이곳 북해 도는 너무 춥다. 그래서 내 마음도 얼어붙 는 것 같구나,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면 마음이 풀릴 것 같은데 요 시코 생각은 어떠냐?" " 네, 저는 선생님이 좋으시다면 어디라도 괜찮습니다." " 그럼, 카고시마 나 후쿠오카가 어떻겠냐?" " 네, 그 곳이라면 따뜻할 것 같습니다." " 그래, 그럼 내일 당장 떠나자." 요시코는 사내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사랑하는 사내와 함께 여행 을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사내는 피곤한지 쉽게 잠이 들었다. 요시코는 잠든 사내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동네는 늦은 밤인데도 소란스러웠다. 차량의 통행이 많았고 경찰 순찰차의 붉은 경광등 불빛이 이따 금 창문으로 빛쳐들어왔다. 요시코는 늦게 잠이 들고도 사내의 아침밥을 준비하기 위하여 일 찍이 일어났다. 설렘으로 깊은 잠은 들지를 못 했다. 주방에서 아침 준비를 하면서 요시코는 TV의 스위치를 켰다. TV에서는 요시코도 잘 알고있는 아나운서가 침착한 어조로 간 밤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전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죽은 사람은 현 직 참의원인 혼도 의원과 젊은 여자였다. 그 외에 혼도 의원을 경호 하던 몇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는 내용과 용의자는 한 명의 전문적 인 킬러라는 추측기사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혼도 의원의 살인 현장이 요시코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TV의 화면은 요시코가 살고있는 동네가 비쳐지고 살인현장인 저택의 바깥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중계차의 아나운서는 혼도 의원의 사망 시간과 살인범의 도주 방법을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예상되는 퇴로를 설명하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한 경찰 간부에게 마이크를 들이대자 경찰 간부는 살 인범이 아직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과 뒤편으로 연결 된 모리산으로 도주했을 경우를 예상하여 경찰 병력을 도주로로 예 상되는 모리산 일대의 대대적인 수색이 진행 중이니 동네 사람들 도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나 처음 보는 사람이 있으면 신고를 부탁 한다는 협조의 말을 당부하고 있었다. 요시코는 뉴스프로를 보는 순간에 제일 먼저 사내의 지난 밤 모 습이 떠올랐다. 생각이 사내에게 미치자 갑자기 칼을 든 손이 심하 게 떨여왔다. 귀공자처럼 나약해 보이는 사내의 모습과 구겨진 옷을 입고 소리 없이 등뒤에 나타났던 사내의 두 모습이 격차 되며 요시 코는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요시코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며 사태의 정황을 정리 해 보았다. 의원의 사망 시간과 사내의 출현이 거의 동일한 점과 처음 사내를 보았을 때 느꼈던 사내의 깔끔함과 어제 밤의 초췌한 사내의 모습은 요시코의 불안을 가중시키기에 충 분하였다. 요시코는 침착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내는 잠자리에서 눈을 뜨고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TV의 뉴스 소리를 들었다. 사태가 예상보다 시끄럽게 진행 되어가고 있다는 사 실에 사내는 화가 치밀었다. 지금껏 이번처럼 지저분하게 일을 처리 한 사실이 없었던 사내는 어제의 실수가 다시금 후회 스러웠다. 사 냥은 성공하였지만 실패나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곧 이어 사내는 요 시코를 떠 올려보았다. 뉴스를 보고있을 요시코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결코 미련해 보이지 않는 요시코가 자신을 의심하리라 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 사내는 요시코의 문제에 판단을 내리기가 힘이 들었다. 이렇듯 빠 르게 사건이 보도되리라는 예상은 하질 못 했다. 그래서 어젯밤 요 시코에게 오늘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요시코 와 여행을 떠날 수가 있는지 조차도 문제였고, 요시코를 그냥 두고 혼자 떠나는 것도 문제였다.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요시코를 살려두고 떠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 이였지만 그러나 사내의 마음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요시코는 지금껏 자신이 필요에 의해서 살해한 여인들과는 다르게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에는 무엇 인지 모르지만 야릇한 감정이 판단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내는 머리 를 좌우로 심하게 흔들며 야릇한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하였으나 허사였다. 여자는 지금껏 더 이상의 감정도 없었던 사내에게 요시코는 그 이상의 여자로 느껴지고 있었다. 요시코는 침착하게 떨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사내의 아침밥을 준 비하였다. 아침밥을 차려놓은 식탁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서로가 말 이 없었다. TV는 꺼져 있었다. 요시코는 아침 뉴스에 나왔던 사건 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만 식사 도중에 조금씩 하였다. 사내는 요시코의 침묵이 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뉴스 프로를 보 았다면 당연히 놀라는 기색과 함께 호들갑을 떨면서 밤새 동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해 수다를 떨어야할 정황 인데도 요시코는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내색을 하고 있었다. 식사를 끝맞치고 응접실 소파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어딘지 모 르게 어색한 느낌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침묵을 깨뜨린 것은 요시코였다. " 선생님 시내에 잠깐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 무슨 일이 있나?" " 네, 수리를 맡긴 자동차도 찾아와야 하고 볼일도 조금 있습니 다." 사내는 쉽사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요시코를 믿어야 하는지도 판단이 서질 않았다. 요시코는 사내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살피며 사 내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볼일이 있다면 다녀와야지, 공연히 나 때문에 요시코가 불편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사내의 대답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은 어투였다. 요시코는 전화로 택시를 부르고 외출 준비를 하였다. 잠시 후 택시가 정원 앞에 도착하자 요시코는 서둘러 다녀오겠다 는 말을 남기고 택시에 올랐다.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내는 응접실과 방안을 오가며 현재의 상황을 냉철히 판단하려고 노력하 였다. 혹여 요시코가 신고라도 한다면 지금의 위치에서는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요시코를 믿는 마음에 순순히 외출을 허락하였지만 그래 도 찾아드는 불안감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요시코의 집을 벗어나서 탈출로를 찾는다면 다소 위험은 있겠지만 그래도 완 전히 적에게 포위되는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사내는 어제 밤에 있었던 여자의 죽음과 요시코의 집으로 찾아든 자신의 실수가 모두 여자로 기인된 사실에 불현듯 아버지를 살해한 계모의 모습이 떠오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자를 믿지 않은 지 금까지의 삶이 요시코라는 여자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있다는 현실 이 믿을 수가 없었다. 사내는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사랑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하였다. 요시코를 향 한 자신의 야릇한 감정이 혹시 사 랑이라는 것인가 되새겨 보았다. 도대체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끝 내 사내는 요시코를 믿어보기로 하였다. 최악의 경우에 설사 죽음이 찾아온다 하여도 요시코를 기다려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자 마 음은 평온히 찾아들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요시코는 택시를 타고 동네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두 번이나 검문 을 받았다. 하지만 요시코의 얼굴을 익히 아는 삿포로의 경찰들은 친절한 인사로 검문소를 통과 시켜 주었다. 시내에 들어선 요시코는 정비공장에 들러 수리가 끝난 자동차를 찾아 나오며 사내의 얼굴을 떠 올려 보았다. 요시코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자동차를 쇼핑센터 로 향했다. 남성의류 전문 매장을 찾아 온 요시코는 사내에게 어울 릴 듯한 세련된 옷가지를 고르고 한 편으로는 눈에 확 띄는 요란한 색상의 화려한 의상도 준비하였다. 그리고 안경 점에 들러 조금은 불량기가 흐르는 검은 색의 선글 라스도 하나 구입하였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며 요시코가 한아름의 쇼핑 백을 들고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내는 현관문을 열어주며 요시코의 짐을 받아 주 었다. 요시코는 사내에게 함께 시내에 나갈 일이 있다며 사들 고온 옷 가지 중에 색상이 요란한 옷을 사내에게 입혀 주었다. 사내는 의아심으로 요시코에게 행선지를 물어 보았지만 요시코는 가보면 안다고 하며 웃음을 지었다. 요시코는 사내의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브러쉬로 머리카락을 올려세웠다. 사내의 모습은 영락없는 불량기가 다분히 있어 보이는 건달처럼 보였다. 사내는 자신의 모습 을 거울에 빛춰보고 난색을 표했다. 그렇치 않아도 동네 주변이 경 찰로 깔려있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튀는 옷차림은 검문에 표적이 되 기가 십상이라고 생각하였다. 요시코는 사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짐짓 밝은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 선생님 그렇게 입으시니깐 연예인 같아요, 이래봬도 요시코는 아직까지는 인기가 있는 스타예요, 스타에게는 그런 옷 차림의 남성 이 어울려요." " 그래도 이것은 영....내 취향이 아니데..." 사내는 영리해 보이는 요시코에게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거부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요시코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요시코는 사내를 자동차 옆 좌석에 태우고 집을 출발하였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들어서자 사내의 눈에 검문소가 눈에 띄었다. 사내는 이내 당황하는 눈초리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실수였다. 요 란한 의상을 입고 검문소를 통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였다. 사내 는 왼 손을 좌석의 문 열림 장치에 갔다 데 었다. 요시코의 한 손이 사내의 허벅지에 와 닿았다. 요시코의 눈이 사내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해맑은 눈빛이었다. 사내는 요시코의 맑은 눈동자를 읽을 수 있었다. 사내는 끝내 요시코의 눈을 외면 할 수가 없었다. 사내 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자동차는 검문을 하고 있는 경찰 앞에 멈추어 섰다. "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검문을 하는 경찰은 동네가 동네인지라 지극히 공손한 몸짖이 었 다. 요시코는 자동차 유리창을 내렸다. " 수고 하시네요." " 아, 요시코상 아니십니까, 어디 외출하시나 보죠?" " 네, 방송국에 촬영이 있어서..." " 아, 그러세요, 그런데 옆에 계시는 분은...." " 네, 제 방송 매니저예요." " 아...네, 그러십니까, 그럼 다녀오십시오." 경찰은 요시코의 자동차를 향 해 깍듯이 경례를 붙였다. 요시코의 차량이 검문소를 막 통과하는 순간에 맞은 편에서는 검은 색의 찝 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찝차는 경찰의 제지에 정지 하였다. " 여기는 살인사건이 벌어진 현장입니다. 동네 입주자 외에는 통 행이 금지되었습니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경찰의 저지에 찝차에 타고 있던 대머리의 사내가 신분증을 내 보이며 짜증 섞인 어투로 말하였다. " 우린 동경에서 내려온 검찰 특수대요." 경찰은 사내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자세를 바로 하며 절도 있게 경롓을 붙였다. " 수고가 많소, 그런데 지금 여기를 통과한 자동차는 검문을 제대 로 하였오." " 네, 그 자동차는 탤런트 요시코양의 자동차입니다. 여기 이 동네 에 살고 있습니다." " 그래요, 혼자였소?" " 아닙니다, 방송 매니저하고 둘 이었습니다." 사내는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더니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사건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 혹시 모르니깐 탤런트 요시코양의 매니저에 대해서 조사해봐." 대머리의 사내는 운전석 뒤편에 앉아있는 젊은 사내에게 명령을 하였다. 요시코는 동네를 완전히 벗어난 국도 가의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 으며 운전석에서 내려와 사내에게 운전석을 권했다. 의아한 표정을 짖고 있는 사내에게 요시코는 햇살 같은 웃음을 지 으며 말을 하였다. " 선생님 따뜻한 남쪽 지방으로 여행을 가시자고 하였잖아요, 지 금부터 선생님이 가시는 곳을 이 요시코는 따라가는 거예요." " 네, 여수 경찰서입니다, 네...뭐라고요, 일본이라고요, 잠시만 기 다리세요, 전화를 담당 부서로 돌려드릴게요." 전화를 받은 의경은 일본에서 걸려온 밀수신고 전화를 받고 조금 은 당황하며 전화를 형사 계로 돌렸다. " 네, 형사계 박xx입니다, 네, 정말입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감 사합니다." 박 형사는 메모지 에 받아 적은 것을 들고 반장에게로 다가갔다. " 반장님, 일본이라고 하면서 신고가 들어왔는데요." " 무슨 신고..." " 밀수 신고입니다." " 일본인지 아닌지 확인 해 봤어... 장난 전화인지 어떻게 알아." 반장은 아침에 있었던 회의석상에서 서장에게 문책을 당한 것이 아직도 억울한지 심통을 부리고 있었다. " 밀수 품목이 뭐래?" " 네, 그것이...저...포르노 테이프이라는데요, 그것도 상당히 많은.... 뭐, 수 십억 원어치나 된다고 하면서 이름이 나비의....뭐라드라." " 나비의 향연, 나비의 향연이라고 안 했어?" " 네, 나비의 향연 맞아요, 그런데 반장님이 어떻게 그걸 아세요?" " 아이구, 이 답답한 친구야, 그렇게 맹하니 내가 맨날 서장한데 터지지 터져." 반장은 박 형사가 들고있는 메모 지를 뺏어들었다. " 틀림없지 일본에서 신고 한 것이?" " 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신고자가 일본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기는 재일 동포로서 조국으로 불법 포르노 테입이 대량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신고 한다고 하데요." " 이것 봐, 지난번에 부산에서 적발된 대규모의 포르노 테입의 적 발도 일본에서 교포가 신고했다지...테입의 제목도 나비의 향연이 맞 고..응." 반장은 박 형사를 외면하고 옆에 있는 조 형사에게 물었다. " 네, 반장님, 맞습니다, 이건 큰 건수 같습니다." " 그래, 맞아, 나 서장실에 갔다 올 테니 입 조심들 하고 있어, 알 았어." "따르릉, 따르릉," " 네, 특수부 입니다." 대검 특별수사본부의 오후는 언제나 분주했다. 서울과 지방각지에 서 올라오는 사건의 사안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특수부의 개입 여 부를 결정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 경감님, 이번 여수에서 올라온 보고서 보셨습니까?" 한 달 전에 시경에서 특수부로 옮겨온 김 형사가 물어오는 말에 박 경감은 심드렁하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 이번에도 일본에서 제보자가 있었다는 보고인데, 어째, 이상하지 않습니까?" " 뭐가 이상해, 애국심에 불타는 교포가 조국을 위해 신고 한 것 이 뭐 잘못이야 누군지 알면 상이라도 줘야지." 박 경감은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어딘지 냄새가 나는 구석이 있 다는 느낌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이 십 년을 넘게 일선 형사로서 지내온 박 경감의 느낌은 거의 맞아떨어졌다. 그것이 불안하기도 하 였다. " 그런데, 경감님, 이번에 적발된 테입말입니다. 거 뭐야, 나비의 향연인가 하는 거 말입니다. 포르노 배우들을 그렇게 많이 기용해서 촬영하기란 아무래도 무리 아닙니까, 제 생각은 섹스와 연관된 사이 비 종교 집단의 의식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 하는데...어떻게 생각하 세요?" " 그렇수도 있겠지, 워낙 일본사람들의 성 문제는 상상을 초월하 니깐." 박 경감은 김 형사의 말에 얼마 전에 보았던 나비의 향연이라는 테이프의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수 십 명의 남녀가 집단으로 이루 는 섹스의 향연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자유로움 속에서도 어딘지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출연진 모두가 얼굴에 나비의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들의 몸짓이 누군 가에게 보여주려는 각본상의 몸짓이 아닌 무아지경의 몸짓 같았다. 그것은 약물에 의한 것이나 아니면 종교적인 의식의 지배하에서 나 오는 것 같았다. " 아무튼 누군가의 제보로 일본의 포르노 테입을 사전에 압수 할 수이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야." 박 경감은 정말이지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수 만개의 테이프가 시중에 유포되면 당연히 특수부로 불똥이 떨 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이였다. ㅇㅇ일보 서울 본사 " 야, 박종기, 너 해도 너무하는거아냐." " 헤헤..선배님 한 번만 봐주세요." " 웃지마 자식아." 박 기자는 나무라는 선배 기자인 양 기자에게 웃음으로 아양을 떨었다. " 야, 박종기 그런데 그 동안 어디 쳐 박혀 있었어?" " 집에요." " 뭐라고, 집에 있으면서 전화도 안 받고 삐삐를 그렇게 쳤는데도 연락을 안 해, 이거 사람 정말 미치겠구만." 양 기자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흘러 나왔다. 사회부 기자인 박종기는 다소 엉뚱한 구석이 있어 사회부내에서 도 골칫거리 기자 였지만 탁월한 감각으로 사건을 파고드는 재주가 있어 이따금 큰 건수의 사건을 밝혀내는 능력 때문에 어쩌지 못하 는 사무실 입장이었다. 지난해에도 박종기는 남들은 평생에 한 번이 나 있을까 말까한 특종을 두 번이나 터뜨려 그 해에 올해의 기자상 도 수상한 경력이 있었다. 양 기자는 아침 회의석상에서 보이지 않는 박종기의 결근에 대 하여 편집장에게 꾸지람을 들은 터라 박종기를 보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실실 웃는 후배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 아니, 남들은 취재에 쫓겨 집에도 못 들어가는데, 뭐 집에서 놀 고 자빠져 있었다고." " 선배님, 집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이 말입니다." 양 기자는 후배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박종기의 그간에 행동으로 미루어 요 몇 칠 두문불출한 이유는 어디서 냄새를 맡고 특종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야, 박종기 너 무슨 건수 있냐?" " 네,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문사 창립이래 최고의 특종이, 아 니 우리 나라 신문 역사상 최고의 특종이 나올지도 모르는 순간이 니 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 야, 뭔데?" " 아직은 비밀입니다." 너스레를 떨며 피하는 후배를 양 기자는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 선배님만 아시고 있으세요, 요사이 세간의 이목이 집중 된 나비 의 향연이라는 테이프 아시죠?" " 그래, 알지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 제가 몇 날 몇 칠을 그 나비의 향연이라는 테이프와 씨름을 했 는데 어쩌면 그 테입이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것인지도 몰라요." " 뭐라고.." " 오늘밤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보면서 정리 한 뒤에 내일부터 자료 조사를 마무리 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선배님, 몇 칠만 봐주세 요." " 그게 사실이야, 뭐 집히는 구석이라도 발견했어?" " 네, 선배님, 거의 확실해요, 제 코는 선배님도 잘 알 잖아요." 박종기는 선배 양 기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무실을 먼저 빠져 나왔다. 저녁에 있을 시골집의 제사에 참석하려면 서둘러 떠나야 했 다. 박 기자는 생각 같아서는 제사 조차도 불참하고 테이프 확인을 하고 싶었다. 벌써 수도 없이 보아온 똑같은 테이프였지만 오늘밤만 은 꼭 결정적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단서는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오늘 밤,시골집 제사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마무리하기로 마음을 굳히자 조급함이 밀려 왔다. 박 기자가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얼마 안 있어 김 과장이 사무실 로 들어왔다. " 양 기자, 박 기자 아직도 연락이 없어?" " 사무실에 왔었는데요, 과장님." " 아니, 왔었는데요는 또 뭐야, 어디 있어 그 친구." " 집에 제사가 있어 먼저 퇴근한다고 나갔습니다." " 뭐라고, 퇴근했다고...아니, 이 친구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멋대 로 구만 응, 몇 칠만에 나타나서는 윗사람도 보지 않고 퇴근을 해, 이거 안되겠구먼...." " 과장님, 그게 아니고..." " 이봐, 양 기자 자네는 왜 항상 그 친구를 두둔하고 그래 응, 뭐 받아먹은 거라도 있어..." " 참, 과장님도 받아먹기는 뭘 받아먹어요, 그 친구얘기가 요 몇 칠 안보인 것은 엄청난 특종 감이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 뭐야, 특종, 그게 사실이야, 다른 신문사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 건이래?" " 네, 그런 것 같은데요." " 같은데요는 또 뭐야, 무슨 사건인지 자네에게 얘기하던가?" " 자세히는 안했지만....뭐라더라, 나비의 향연이라는 포르노 테이 프 아시죠?" 나비의 향연이라는 말에 김 과장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짧은 순간의 번뜩임이었기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 하였다. " 나비의 향연이 어찌 되었다는 얘기야, 답답하니까 빨리 얘기 해 봐." " 네, 박 기자 말로는 어쩌면 나비의 향연은 한국에서 만들어 졌 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어요, 오늘 밤 시골집 제사에 참석하고 돌아 와서 밤새 정리하여 내일 보고를 올리겠다는 얘기로 미루어 무엇인 가 결정적인 단서를 찾은 것 같아요, 그렇치 않으면 그렇게 큰소리 치는 친구가 아니잖아요." " 그래...음...참, 박 기자 시골집이 어딘지 아나?" " 네, 지난여름에 한 번 같이 놀러간 적이 있어서 알고 있습니다." " 어디야, 자세히 좀 말해 봐." " 찾기는 쉬워요, 춘천 지나 화천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XX 식 당이라는 큰 간판이 있는 곳에서 식당 옆으로 난 길로 곧장 올라가 면 막다른 길에 있는 집이 박 기자네 집인데...왜 그러세요, 특종이 라니깐 찾아라도 가 보시게요?" " 아냐....그냥 좀...그런데 그 친구 차가 뭐지?" " 다 썩은 짚차 잖아요." 김 과장은 심각한 얼굴로 담배를 빼어 물고 사무실 창가로다가갔 다. 담배를 다 피운 김 과장은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신문사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지하 상가로 내려간 김 과장은 구 석진 자리에 놓여진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따르릉,따르릉. " 에이.. 무슨 놈의 전화야..." 얼굴에 가득 심술이 붙어있는 험상궂은 사내는 여자의 배에서 내 려오며 연신 욕지거리를 하였다. 그러나 막상 수화기를 들자 사내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럽고 상냥하였다. " 네, 여보세요, 어디십니까?" " 여보세요, 저...강 전도사님 좀 부탁합니다." 전화를 걸어온 사내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 제가 강 기호 전도사입니다, 실례지만 어디십니까?" " 아..전도사님입니까, 저는 ㅇㅇ일보 사회부에 근무하는 김 종기 과장입니다." " 아..김 과장님...죄송하지만 세례 번호를....." " 네, J124 입니다." "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내는 벗은 몸을 가릴 생각도 없이 책상 앞으로 다가가 노트북 컴퓨터의 전원을 넣고 J124를 쳤다. 파란 바탕색의 액정 모니터에 J124의 신상기록이 나타났다. " 네, 됐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 네, 제 부하직원 중에 우리 진리교의 실체를 알아낸 기자가 있 는 것 같습니다." " 네, 뭐라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어느 정도까지입니까?" "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일 출근 하는 대로 자료를 공개하여 특종 을 준비하려는 의도 같습니다." " 지금 어디 계십니까? 네, 그럼 근처의 커피숍에서 30분 후에 만 나죠." 사내는 서둘러 옷을 입고 외출을 준비하였다. 그런 사내를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있던 여자가 아쉬운 눈으로 올 려다보았다. 김 과장을 만나 자세한 내용을 전해들은 강 기호 전도사는 급히 진리교의 본당이 있는 이천으로 달려갔다. 진리교의 본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외관상으로는 일본과 합작으로 화공약품을 생산하는 건실한 중소기업으로 알려져있었다. 공장은 큰길에서 한참을 들어와야 하는 산자락 밑에 자리하고 있었 다. 공장 건물 뒤편에 3층 건물의 연구동이 있었다. 연구 동은 철저 한 보안 속에 가려져 있어 공장 직원들도 무슨 연구를 하는지 자세 히 알 수가 없었고 연구원들도 공장 직원들과의 접촉을 꺼려해 출 입구도 별도로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공장 직원들은 연구동 이 진리교의 본당인 것을 알고있는 사람은 없었다. 연구동의 1층은 각종 실험 기기와 자재가 쌓여 있었다. 그것은 만일을 위한 전시 효과였다. 지하 1층은 연구원을 위한 숙 소가 있었고 지하 2층이 진리교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지 상 2층은 공장 중역들의 집무실이 있었지만 중역들은 하나같이 진 리교의 사제들로서 제사장의 심복들이었다. 3층은 제사장의 집무실 과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제사장이 사용하는 3층은 침실과 회의 실 그리고 호화로운 사우나 시설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정치권의 인사들과 인근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돌아 온 제사장은 피곤한 몸을 욕조에 담그고 있었다. 장방형의 커다란 욕조에는 더운물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제사장은 욕조에서 일어나 욕실 한 가운데 마련된 침대에 누웠다. 제사장이 침대에 눕자 욕실의 문이 열리며 벌거벗은 여자 둘이 들 어왔다. 여자들은 제사장이 침대에 눕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눈치였 다. 한 여자는 단발머리가 어울리는 귀여운 외모를 하고 있었고 다른 여자는 검은 생 머리를 어깨선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고혹적으로 보였다. 두 여자 모두가 풋풋한 풀 냄새가 풍길 것 같은 청순함이 있었다. 나이는 대략 20세 전 후로 보였다. 여자들은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 제사장의 알몸을 정성껏 주무르 고 있었다. 제사장의 몸은 단단한 근육으로 다듬어져 있었지만 몸의 이곳 저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많이 있었다. 제사장은 여자들의 손길이 몸을 더듬자 서서히 욕정이 끓어오르 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제사장은 짜릿한 전율이 사타구니에서 전해지자 한 차례 몸을 부 르르 떨었다. 제사장은 손을 뻗어 단발머리의 둥그런 엉덩이로 향했다. 단발머리의 여자는 갑자기 제사장을 손이 엉덩이에 와 닿자 흠칫 놀라며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나 이내 제사장의 섬세한 손길에 속절 없이 다리는 벌어지고 말았다. 단발머리의 다리가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며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 었다. 단발머리는 맹목적인 진리교의 신자였다. 언제나 하늘처럼 숭배하는 제사장의 손길이 자신의 몸에 닿기라도 하면 전기에 감전 이라도 된 것처럼 짜릿한 전율과 희열이 온 몸 구석구석을 휩쓸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들의 신음이 절규에 이르자 제사장은 얼굴을 들고 상반신을 바로 세우고는 무릎걸음으로 단발머리의 엉덩이 쪽으로 향했다. 강 기호 전도사는 거침없이 연구동 건물 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 층 사제관으로 뛰어 올라간 강 기호는 수석 사제관의 방을 거칠 게 두드렸다. 비서 역할을 하고있는 앳된 여 신도가 인사를 건네며 문을 열어 주자 강 기호는 여자를 거세게 밀치며 안으로 들어와 방안의 또다 른 문을 열고서 뛰어들어갔다. 수석 사제를 맡고 있는 김 경범은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있었 다. " 그러니깐, 오늘밤이 지나면 그 기자 놈이 뭔가를 알아내 특종을 터뜨린다는 얘기지." " 네, 형님, 그러니 오늘밤에 그 기자 놈을 제거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시간이 촉박하구먼 갑작스러운 일이라 준비도 안된 상 황이니.." " 형님, 그 기자 놈이 시골에서 돌아오기를 그 놈의 집 앞에서 기 다리고 있다가 처치하면 되잖아요." " 아니야, 그보다, 그 놈의 시골집으로 찾아가는 거야, 거기서 대 기하고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적한 길에서.....내게 좋은 생각이 있 어." 김 경범은 시계를 쳐다보고는 시간이 촉박함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제사장의 방과 직통으로 연결 된 버튼을 눌렀다. 김 경범이 누른 버튼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누르는 버 튼으로 버튼을 누르면 제사장의 집무실과 침실은 물론 욕실까지도 설치되어 있는 붉은 램프가 점멸되게 되어있었다. " 나는 제사장님을 만나보러 들어갈 테니 너는 빨리 독거미를 호 출해.." 어둠이 내리는 춘천 가도를 하얀 색의 수입 외제 차가 기세 좋게 달리고 있었다. 흰 색 차의 앞에는 일행인 듯한 검은 색의 고급 차 가 뒤차를 선도하듯 달리고 있었다. 흰색 차의 앞좌석에는 단정하게 정장을 갗춰 입은 사내가 타고 있었고 뒤 좌석에는 미모의 여자가 타고 있었다. 여자는 대단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질감이 부드러 워 보이는 검정 색 가죽의 미니 스커트 사이로 드러난 여자의 희고 매끄러운 다리는 사내들의 시선을 한 눈에 붙들기에 충분하였다. " 청평 못 미쳐서 있는 저번에 빌렸던 별장으로 애들은 보냈나?" " 네, 지금 앞서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 별장에서 처치하시게 요." " 그래, 운치가 있잖아, 강이 내려다보이는 별장에서 살인을 한 다...생각만 해도 짜릿한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아." " 이번에도 조장님이 직접 처리하시게요?" " 그래, 한 동안 사내의 냄새를 못 맡았더니 몸이 근질거려 미칠 지경이야." " 그래도 저희들 생각은 조장 님이 직접 나서시면 죄송한 마음이 영...." " 괜찮아, 만약 너희들이 처리하면 너희들 중에 하나가 죽어야 해.." " 무슨 말씀인지..?" " 내가 금방 말했지, 사내 냄새를 한 동안 못 맡아 몸이 근질거린 다고, 이 기회를 너희들이 차지한다면 대신 너희 중에 누군가가 내 근질거리는 몸을 달래줘야 한다고 그리되면 내 몸을 만진 사내는 어느 누구라도 살아남을 수가 없어.... 여자는 말을 마치며 눈을 감고 살인의 순간을 음미하는 듯 입가 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여인을 태운 차량은 춘천을 지나 화천으로 통하는 중간에 멈추어 섰다. 검은 색의 차도 함께 멈추었다. 여인이 타고 있던 흰색의 차 는 좁은 1차선 도로에서 회전을 하여 방향을 서울 방면으로 향하고 길옆으로 벗어나 세워졌다. 흰색의 차에서 운전사와 앞좌석의 사내 가 내려와 자동차의 엔진 룸을 열고 몇 가닥의 전기 배선을 꺼내었 다. " 조장님, 됐습니다. 이제 완벽한 고장 난 차가 되었습니다." " 수고했어, 그럼, 빨리 그 기자 놈의 집으로 가 봐." " 네, 혼자 계서도 괜찮겠습니까?" " 괜찮아, 이곳에 도착하기 1분전에 전화하는 것 잊지 말고, 만약 그 기자 놈이 인정머리 없이 그냥 지나치면 그대로 달려가 그 놈의 차를 가로막고 처치해 알았어." " 네, 걱정 마십시오, 어느 놈이 조장 님을 보고 그냥 지나치겠습 니까." 사내와 운전사는 여자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길을 건 너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검은 색의 자동차를 타고 어둠 속으 로 사라져 갔다. 박 기자는 조상의 제사가 끝나고 온 식구들이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서둘러 식사를 맞히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모두 모인 형제들과 친척들이 아쉬움을 나타냈지만 박 기자의 머리에는 온통 나비의 향연이라는 테이프의 마무리 정리에 정신이 없었다. 그 동안의 비밀리에 조사해온 내용과 테이프에서 찾아낸 결정적인 단서를 조합 하면 테이프의 촬영 지는 한국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한국에 섹스를 전제로 진행되는 사이비 종교 집 단이 숨어있다는 사실과도 일치하는 엄청난 특종이었다. 박 기자의 낡은 찝차는 털털거리며 시골길을 내려왔다. 식당 옆 길을 돌아서자 서울로 향하는 도로가 시작되었다. 박 기자의 차 가 포장 된 도로에 올라서는 순간 식당 주차장에 주차해있던 승 용차가 소리 없이 미끄러지며 박 기자의 고물 차를 적당한 거리 를 두고 쫓고 있었다. 박 기자의 차가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을 무렵 뒤따르던 승 용차의 뒤 좌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 여보세요." " 조장님, 접니다, 앞으로 2분 후면 도착 할 것 같습니다." " 그래, 알았어, 놈이 차량을 멈추면 너희들은 별장 근처에 가 서 기다리고 있어, 별장은 빌려 났겠지?" " 네." 독거미로 불려지는 여자는 전화를 끊고 자동차 밖으로 나와 엔 진 룸의 본닛을 열어 놓았다. 멀리서 자동차의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박 기자는 최대한 빨리 차를 몰았다. 하지만 워낙 낡은 차는 힘 겨운 엔진 소리를 토해내며 더디게 달리고 있었다. 언덕길을 힘 겹게 올라온 차량은 내리막길을 만나자 주인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기세 좋게 내려가고 있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한 여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 인이 서있는 옆 가길 에는 흰색의 외제 차가 본닛을 열어둔 채 서 있었다. 박 기자는 급한 마음에 그냥 지나치려다 여인을 조금 지나쳐 자 동차를 급정거 시켰다. 언 듯 지나치는 순간에 보았던 여인의 얼 굴은 대단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치는 자신을 애 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여인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박 기자는 자동차를 조금 뒤로 후진 시켜서 여인의 앞에 멈추었다. " 차가 어디 고장 났나 보시오?" " 네, 갑자기 멈추었어요." 여인은 추위에 떨고 있었다. 순간에 보았던 여인의 아름다움은 가까이 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어디 한 번 볼까요." 박 기자는 여인의 흰색 외제 차로 걸음을 옮기었다. 그러나 사 실 박 기자는 자동차에 대한 정비 지식이 전혀 없었다. 엔진룸 안의 이것저것을 대충 만져보던 박 기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 제가 보아서는 전혀 어디가 고장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비공장 에 연락해서 견인을 하던가 하시는 것이....." " 네, 아무래도 그런은 것이 좋겠네요, 죄송하지만 춘천까지만 태워다 주시겠어요." " 아, 물론 입니다, 제가 춘천까지 모셔다 드리죠." " 고마워요." 박 기자는 운전석에 올라 여인이 탈 좌석의 먼지를 손으로 대충 털어 냈다. " 어이구, 죄송합니다, 차가 워낙 낡아서....." " 괜찮아요, 이렇게 폐를 끼쳐서 정말 미안해요." 여인은 살며시 웃음을 보였다. 박 기자는 여인의 웃음을 보는 순간 가슴이 멈추는 것 같은 전 율을 느꼈다. 박 기자는 천천히 자동차를 몰았다. 천천히 달리는 만큼 매력적인 여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지극히 단순 한 계산이었다. 요란한 소음을 내며 달리는 자동차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감돌 았다. 여인은 차가 출발하자 창 밖만을 응시하며 아무런 말이 없 었다. 그런 여인에게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박 기자의 용기도 없 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여인이 고개를 돌려 박 기자 를 쳐다보았다. " 죄송하지만 담배 한 대만 피워도 괜찮을까요?" " 아...네, 피우세요." " 그럼..." 여인은 조그만 손가방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어 능숙하게 담 배에 불을 붙였다. 여인의 담배 피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기는 처음이라고 박 기자는 생각하였다. "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할지...." " 감사는 무슨 감삽니까, 그러시면 되려 제가 민망합니다." 밤늦은 국도는 차량의 통행도 뜸하여 쓸쓸한 차가움이 맴돌고 있었다. " 선생님, 오늘밤은 왠지 바람이 더욱 서럽게 부는 것 같지 않 아요?" " 네.....아...그런 것 같네요." 박 기자는 여인의 돌연한 물음에 당황하고 있었다. "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 네, 무슨 부탁이신지...?" " 제가 선생님에게 신세진 것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하는데...." " 참..이거, 자꾸 신세 신세 하지 마세요." " 아니에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어 요." " 아닙니다, 그러시면 제가 부담스러워 집니다." " 제 부탁이 부담스러우신가 보죠, 오늘밤이 제게는 한국에서 마지막 밤인데 조금은 아쉽군요" " 아...아닙니다, 거절이 아니라 제가 오히려 부담을 안겨 드리 는 것 같아..." " 그럼 승낙하신 거예요." 여인은 밝게 웃음을 지었다. 여인의 말에 의하면 여인은 미국에 서 부모들과 함께 살아오다가 지난해에 부모들이 교통사고로 세 상을 등지고 일가 친척이 없는 미국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가 평소 친구로 지내오던 미국인 친구의 청혼을 받아들여 다음 주에 는 미국에서 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청혼은 여인이 시기적 으로 힘들어하던 순간에 찾아와 여인은 앞 뒤 가리지 않고 친구 인 미국인의 청혼을 받아 들였다. 하지만 평소 여인의 바램은 한 국 남자와의 결혼 이였다고 여인은 말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생전 에 아버지와 함께 묵었던 작은삼촌의 별장으로 가다가 차가 고장 났다는 것이었다. 별장은 서울로 가는 길에 있는 청평 근처에 있 다고 하였다. 여인은 함께 청평에 있는 별장으로 가서 차를 대접 하고 싶다고 하였다. 박 기자는 여인의 말을 듣고 가슴이 시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미모의 여인이 조국에서 마지막 밤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 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마음 한 구석에는 특종의 기대감이 밀려 들었지만 그것은 하루쯤 미루어도 관계가 없지만 여인은 내일이 면 조국을 떠나 먼 미국 땅에서 영원히 미국인의 아내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여인을 위하여 시간을 조금 잃어도 보람된 일이라 생각하였다. 여인의 별장은 국도에서 조금 들어간 산자락 밑에 있었다. 별장 앞으로는 폭이 좁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별장은 작지만 고 풍스럽게 원목으로 한껏 멋을 내고 있었다. 실내에 들어선 여인은 밝은 형광등을 마다하고 작은 등으로 응 접실을 밝히었다. 박 기자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집안 구경을 하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여인은 두 손에 유리잔을 들고 박 기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인이 들고 온 것은 커피가 아닌 은 은한 호박색의 양주였다. 박 기자는 여인이 건네주는 양주잔을 받아 들었으나 서울로 돌아갈 경우에 음주운전이 염려되었다. 여 인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건배를 요구하고 있었 다. 박 기자는 거절 할 수 없는 야릇한 마력에 빠져 여인이 건네 준 양주 한 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한 쪽에 설치된 오디오의 스위 치를 작동하였다. 실내에는 감미로운 음악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흑인의 애절한 보이스가 영혼처럼 가슴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여인은 박 기자에게 손을 내밀며 함께 춤을 추기를 요구했다. 박 기자는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사실 박 기자는 춤을 못 추었 다. 여인은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망설이는 박 기자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색한 박 기자를 여인은 능수 능란하게 이끌고 있었다. 박 기자는 꿈을 꾸고있는 착각에 빠졌다. 미모의 여인과 한적한 별장에서 감미로운 음악에 취해 춤을 추리라고는 상상 못했던 일 이였다. 애절하고 느리게 흐르는 음악에 취한 듯 여인은 얼굴을 박 기자 의 어깨에 기대고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인의 머리에서는 향긋한 풀내음이 풍겨나고 있었다. 여인의 가슴이 박 기자의 가 슴에 간헐적으로 와 닿을 때마다 뭉클한 감촉이 박 기자의 신경 을 건드리고 있었다. 음악은 점점 애절하게 흐르고 있었다. 여인 은 대담하게 박 기자의 몸에 더욱 달라붙었다. 여인은 박 기자의 손을 손수 잡아끌어 자신의 허리에 갔다 데었다. 여인의 하체가 박 기자의 하체에 밀착되자 짜릿한 전율이 박 기자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박 기자는 혹여 여인이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기 분이나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엉덩이를 뒤로 조금 빼 내었 다. 그러한 박 기자의 행동에 여인은 얼굴을 들고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하체를 더욱 밀착하고 있었다. 여인은 박 기자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돌연 얼굴을 박 기 자의 얼굴에 가까이 하였다. 박 기자가 놀랄 틈도 없이 여인의 입술이 박 기자의 입술에 와 닿았다. 여인의 혀는 박 기자의 입 술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당황한 박 기자는 어쩌지 못 하고 수동적으로 여인이 하는 데로 따라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여인의 손이 밑으로 내려와 박 기자를 쓰다듬자 박 기자는 참을 수 없는 쾌감으로 전신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흐 르던 음악이 갑자기 멈추었다. 레코드판이 모두 돌아간 것 같았 다. 실내에는 숨막힐 것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여인은 박 기자의 목을 끌어안고 그대로 있었다. " 선생님, 제가 추해 보이세요?" " 아닙니다, 무슨 천만의 말씀을..." " 선생님이 어찌 생각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저는 오늘밤 왠지 이 세상에 저 혼자만이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에 미칠 것만 같아 요." " 아...네, 그 기분 저도 이해합니다, 제가 여자라도 이런 밤이 면...." " 선생님 내일이면 저는 한국을 떠나요, 그러면 저는 영원한 미 국인의 아내로 살게 되어있어요, 마지막으로 같은 피부의 남자에 게 안기고 싶었어요...제 생각이 추하다고 생각되세요?" " 아...아닙니다, 전혀..." 박 기자는 얼떨결에 여인의 말에 긍정을 하며 말을 더듬고 있었 다. 여인은 박 기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몸에 걸친 옷을 한 겹 씩 벗고 있었다. " 조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선생님처럼 좋은 분과 함께 지내게되 어 너무 기뻐요, 오늘밤의 추억은 영원히 잊지 않을 거예요." 은은한 불빛에 드러나는 여인의 몸매는 박 기자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군살 하나 없이 조각처럼 가꾸어 진 여인의 하얀 피부는 숨을 멈추게 하였다. 정신을 잃고 서있는 박 기자에게 여인이 다가와 손수 박 기자의 옷을 벗겨내고 있었 다. 박 기자는 여인의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여인은 박 기자를 이끌고 침실로 자리를 옮겨갔다. 침실로 옮겨온 박 기자는 능동적으로 여인을 다루기 시작했 다. 여인은 달뜬 마음에 스스로 박 기자를 끌어 당겼다. 여인은 짧은 신음을 토해내며 박 기자의 목을 끌어당겼다. 여인은 절정에 이르기 직전에 몸을 돌려 자세를 바꾸었다. 박기 자는 천장을 보고 드러누워 여인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는 수동 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여인의 손이 박 기자의 목 언저리에 다가와 양손의 엄지손가락으로 동맥이 흐르고 있는 부위를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박 기자는 천천히 밀려오는 아득함에 빠져들고 있었다. 여인의 이상한 행위도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기술로 느껴졌다. 여인의 손가락이 점점 강하게 눌러오고 있었다. 박 기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편안한 평화로움이 더럭 겁이 났다. 박 기자는 그만 이라는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열었으나 아무소 리도 나오질 않았다. 순간 여인은 박기자의 목에서 손을 떼어 박 기자의 머리를 양손 으로 감싸 앉았다. 그리고는 괴성을 질러대며 손에 힘을 주었다. 박 기자의 머리가 빠르게 옆으로 틀어지며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박 기자의 몸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며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침실에서 응접실로 걸어나온 여인은 응접실의 불을 환하게 밝히 었다. 불이 밝혀짐과 동시에 건장한 사내들이 신속하게 들어왔다. " 조장님, 수고 하셨습니다." 사내들 중에서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내가 여인에게 깊숙이 허 리를 구부리며 인사를 하였다. " 기자 놈은 안에 있으니 빨리 처리해....완벽하게 해야돼...." " 네, 걱정 마십시오." 여인은 앞서 문을 열어주는 사내와 별장을 떠났다. 침실에는 모 두가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가 넷이 있었다. " 야, 날씨도 추운데 대충 처리하고 가지..." " 그래, 어차피 이 새끼 차는 물 속에 빠뜨려야하니 차 속에 함 께 넣어서 처리하지, 괜히 손에 피 묻히지 말고...." " 그래도 형님이 완벽하게 토막내서 처리하라고 하였잖아..." " 아...휴 새끼, 야...형님은 금방 가셨잖아...." 사내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 에..이 그래, 대충 해버리자..." 사내들은 죽은 박 기자의 굳어있는 몸을 힘겹게 들고는 밖으로 향했다. 마당에 주차해 있는 박 기자의 차에 시체를 옮겨 실은 사 내들은 별장을 출발하였다. 선두에 고급 승용차가 달리고 그 뒤를 오래된 지프차가 힘겹게 쫓아가고 있었다. 승용차는 커브 길에 이르러서 정지하였다. 지프 차는 물가가 바로 앞에 보이는 경사진 언덕의 끝 부분에 멈추었 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내 중에 한 사내가 언덕을 조심스럽게 내 려가서 수면을 향해 돌을 던져 보고는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다. " 됐어..아주 깊은데.." 사내가 돌을 던진 곳은 댐의 수문과 가까운 곳으로 수심이 깊은 곳이었다. 밑으로 내려간 사내가 언덕 위로 올라오자, 사내들은 양 방향의 굴곡진 도로를 확인하였다. 도로가 굴곡져 멀리서 오는 차량도 쉽 게 식별 할 수 있는 위치였다. 차량의 통행이 없음을 확인한 사내 들은 지프차의 뒤로 가서 힘껏 차를 밀었다. 지프차는 서서히 언 덕을 구르더니 요란한 소음의 물보라를 일으키며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요시코의 요구로 운전석에 앉은 자유인은 주유소를 빠져 나와 남쪽 지방으로 연결된 국도로 접어들었다. 눈이라도 올 듯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을씨년 스러운 날씨 탓인지 도로는 한적하였다. 추수를 끝낸 들판은 황량 하게 다가온 추위와 맞서고 있었다. 자유인은 말없이 운전만을 하고 있었다. 요시코도 눈앞에 스쳐 가는 주변 풍경을 생각 없이 내다보고 있었다. 자유인은 운전을 하면서도 요시코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재치 있고 다정다감한 요 시코는 정녕 사랑스러운 여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자유인은 그 러한 요시코에게 마음이 다가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냉정한 킬러에게는 사치스러운 감상일수도 있는 사랑이라는 감 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요시코가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도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을 까도 의문이었다. 자유인은 이번 청부를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은 일이 끝 남과 동시에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에 안주하여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바람처럼 나타난 요시코라는 작은 여 인의 출연으로 계획이 일부 바뀌고 말았다. " 요시코, 한가지 물어볼 말이 있다." 자유인이 무거운 침묵의 공기를 흔들어 깨우며 말을 하였다. " 말씀 해 보세요, 선생님." " 요시코는 나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그리고 여태껏 요시코는 다른 여자들처럼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물어보지도 알려고도 하질 않았다. 내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 지 않은가..." " 물론 궁금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알려주지 않는 이상 요시코 는 알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말하기 어려운 상황일지 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히 물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이 어떤 사람인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제게 있어 선생님은 만나기 어려운, 제가 의지하며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 다." " 그런 판단은 어디서 기인한 거지...." " 그것은 느낌입니다, 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 그런가...하지만 난 요시코의 바램과 기대와는 맞지를 않으니 어쩌면 좋은가." " 그렇치 않습니다. 지금껏 선생님 곁에 있은 지는 얼마 안되지 만 요시코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여태껏 제가 기다려온 분이라는 사실을.....하지만 선생님께 부담은 결코 드리지 는 않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저 화류계 여자의 과분한 상상을 탓하셔도 요시코는 달게 받겠습니다." 사내는 잠시 먹구름 사이에서 뻗어 나오는 햇살을 쳐다보았다. 사내는 무엇인가를 결심 한 듯한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창문을 조금 열어두자 담배연기는 순식간에 창 밖으로 쏟아져 나 갔다. " 요시코, 조금전의 네 행동으로 미루어 너는 나를 조금은 알고 있는 눈치였었다, 그렇지 않은가?" " 네, 조금은 하지만 제 생각이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시코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제 자신이 경망스럽고 못나 보여 선생님께 크나큰 죄를 범한 것 같습니다." " 아니다, 요시코, 너의 추측은 모두가 사실과 일치한다, 그리 고 너의 재치 있는 행동에 감사하고 있다." 요시코의 얼굴에 잠시 놀라는 기색이 보였으나 그것은 찰나간에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진 변화였기에 사내는 알 수가 없었다. " 선생님, 제게 감사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요시코는 선 생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어요." " 고맙구나,...요시코, 혼도 의원을 알고있지?" " 네." " 그렇다면 혼도 의원의 죽음도 알고 있겠지?" " 네." " 혼도 의원은 간밤에 살해되었어, 혼도 의원을 살해한 범인은 세계 각국에서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전문적인 킬러 자유 인이라는 사내야, 세인들은 그를 후리맨 이라고 부르지...그 살인 자를 자유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자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 같 아...그자는 어디에도 구속되기를 원치 않아...언제나 떠가는 구름처 럼 세계 곳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고있지, 그자는 세상 누구 에게도 정을 주질 않아 여자든 남자든...그는 이번 청부 살인을 끝 으로 킬러의 세계를 떠나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작은 섬나라에 철 저하게 혼자만의 영역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지...하지만 그런 그에게 계획이 바뀌었어,...작은 섬나라에 같이 갈 수만 있다면 한 여인을 데리고 가고싶은 마음이 들었어...물론 그 생각은 그자 혼 자만의 생각이지 여자의 생각은 그자도 모르지,... 여자는 그자가 전문적인 킬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거든...여자 는 그자가 킬러라는 사실을 알면 차갑게 돌아설 수도 있는 문제 야...그래도 그자는 죽은 어머니 이후에 처음으로 느끼는 여자의 따스한 사랑을 여자에게 느꼈던 거야...그래서 그자는 여자에게 정중히 부탁하기로 했어 아주 조심스럽게...." 사내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는 요시코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하였다. " 요시코, 부탁한다 나와 함께 남태평양의 섬나라로 가잖구 나...." 요시코는 놀란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가슴이 세차게 고동 치며 숨을 쉬기가 힘이 들었다. 사내가 킬러라는 사실에 놀란 것 이 아니라 사내의 부탁에 놀라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 나 왔다. 사내의 물음에 대답을 해야 했지만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가 없었다. 요시코는 또 한 번 울어야 했다. 사내는 자신이 한국인이며, 어 린 시절에 보았던 아버지의 죽음과 계모와 정부를 살해하고 일본 으로 밀항하여 현재의 자신이 있기까지를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요시코는 사모하는 사람의 지나 간 역경이 너무도 안타까워 가 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요시코는 운전을 하고있는 사내의 어깨에 얼굴을 가만히 기대었다. 그것은 말이 필요 없는 순종과 사랑의 몸짓이었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삿포로 경찰서의 불은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져 있었다. 도쿄 검찰청의 주관으로 열리는 간부 회의에는 도쿄 에서 급파된 담당 검사와 특별 수사반이 전체적인 회의를 이끌고 있었고 삿포로 경찰서의 서장과 수사반장은 그들의 지시와 작전 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 이번 혼도 의원의 살해 사건은 정치 판에 강풍을 몰고 온 사 건입니다. 참의원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 판의 실세들이 범인 의 검거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처지지만 수사는 비밀리에 진행 해야 합니다. 지금 각 방송과 신문은 무수한 추측 기사를 난무하 고 있습니다, 아울러 본 사건 수사에 투입된 여러분들은 철저한 자기 관리로 비밀이 새나가지 안토록 각별히 주의를 하여야 하겠 습니다." 나이가 젊어 보이는 담당 검사는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젊은 검사와의 눈을 부딪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떨구었다. " 이미 여러분들도 나누어준 중간 수사 보고서를 보아서 알겠지 만 도쿄 경시청에서 올라온 자료에 의하면 혼도 의원의 살해범은 전문적인 킬러인 후리맨 이라는 청부 살해업자의 소행으로 거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후리맨은 청부살인 업 계에서는 특급에 속하는 살수로서 일반인의 사주는 받지를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자를 킬러로 고용하려면 막대한 비용 과 접선 루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 사건은 혼도 의원의 근 간에 정치적으로 대립된 정당이나 측근들의 사주가 아닌가 합니 다. 그러므로 수사는 더더욱 소리 없이 진행되어야 하겠고 용의자 와 함께 종적을 감춘 요시코라는 여인의 소재 수사에 만전을 기하 데 소문에 주위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검사는 회의 진행 내내 비밀유지에 특별한 주위를 주었다. 요시코와 사내는 행선지를 일본 열도의 최남단인 카고시마로 정 하였다. 사내는 지금쯤 요시코와 자신이 수사진의 안테나에 걸여 있으리라 판단하고 요시코의 차량을 버리고는 기차를 타고 목적 지로 향하고 있었다. 요시코는 기차의 창 밖으로 지나가는 낮설은 풍경에 탄성을 지 르며 소녀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요시코의 얼굴은 삿포로를 떠 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조금은 야한 듯한 얼굴 화장과 입가에 그려 넣은 커다란 점은 요시코의 얼굴 모습과 분위기를 완 벽하게 바꾸어 놓았다. 한 눈에 보아도 요시코의 모습은 도쿄의 밤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펑키 족의 모습이었다. 사내가 요시 코의 얼굴에 약간의 분장을 하고 새로 구입해온 청바지와 빨간 가 죽의 재킷을 걸치자 요시코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다. 사내 또한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바르고 허벅지가 찢어진 청바지 와 굽이 높은 말 장화를 신자 사내의 모습은 불량기가 다분히 보 이는 젊은이로 보였다. 이들 한 쌍의 여인은 아오모리에서 기차 를 타고 카고시마로 향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이들을 눈여겨보 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요란했지만 상당히 어울리는 한 쌍이 었다. 요시코와 사내는 식당 칸에서 간단한 식사와 맥주로 저녁 식사 를 맞쳤다. 객실로 돌아온 요시코는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행복에 빠져 있었다. 요시코는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난 사내에게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가 않다고 생각하였다. 사내의 한국 이 름은 박인홍(朴仁洪) 그의 이름을 알고있는 사람은, 사내의 말에 의하면 요시코 혼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내는 아무도 알지 못 하는 사내가 살고있는 캐나다 거주지의 연락 번호와 위치를 요시 코에게 알려주었다. 요시코는 사내가 자신을 믿고 모든 것을 알 려준 사실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기차는 자력을 이용하여 달리는 관계로 소음도 없었고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빗살처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남의 눈을 의식 한 탓에 사내는 특실을 선택하였다, 특실은 요금이 상당한 거액 이라 언제나 자리가 남아있어 예매가 필요 없는 장점도 있었다. 요금에 걸맞게 객실도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대리석 탁자가 있었고 탁자를 중앙으로 양옆으로는 한 사람이 편 안하게 드러누워 잠잘 수 있는 푹신한 소파가 있었다. 소파의 끝 에는 깨끗한 이불과 베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사카 시내의 한 복판에 검은 색의 빌딩이 햇살에 빛나고 있었 다. 20층의 건물 규모에 비하여 현관을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같은 규모의 다른 빌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현 관을 지키고 서있는 경비원의 숫자는 필요이상으로 많았다. 현관 에는 황금빛의 청동으로 사사키 빌딩이라는 현판이 새겨져 있었 다. 외관상으로는 무역업을 하고있는 사사키 물산의 본사 건물이 었지만 실체는 다까시오 조직의 오사카 본부였다. 건물의 10층에는 오야봉의 집무실이 있었다. 오야봉의 집무실은 원 룸 형식으로 10층 전체를 사용하는 탓에 마치 운동장처럼 넓 었다. 집무실에는 침실과 헬스 기구와 목욕탕 그리고 전용 엘리 베이터가 있었다. 특이한 것은 집무실 한 쪽에 설치된 대형 슈퍼 컴퓨터가 눈에 띠었다. " 따르릉, 따르릉." 책상에 다리를 뻗고 낮잠을 즐기던 야마다는 울리는 전화벨 소 리에 벌떡 일어섰다. 여러 대의 전화가 있었지만 방금 울린 전화 는 특별한 전화로서 거의 한 달에 한 번 울릴까 말까한 전화였 다. 그 전화는 영광회의 회장인 장군의 직통 전화였다. " 네, 야마다 입니다." " 아..야마다 군인가, 그 동안 잘 지냈나?" " 네, 장군님." " 오야봉은 있는가.?" " 네, 계십니다 바꿔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야마다는 신속하게 전화를 오야봉의 집무실로 연결하였다. " 전화 바꿔 습니다, 장군님." " 오야봉, 지금 빨리 아이들을 풀어야겠어..." " 무슨 말씀 이신지....." " 혼도를 처치한 범인이 자유인이라는 수사 결과가 나왔어, 그 리고 그 자유인이 삿포로의 춘설이라는 요정의 마담하고 지금 도 주 중에 있는 것 같아." " 네..." 오야봉은 장군의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 그 춘설의 마담 아이는 탤런트 요시코 라는 구만, 경시청하고 검찰에서는 담당 검사와 수사진을 삿포로로 급파한 상태야...그 리고 자유인의 인상을 모르는 경찰은 요시코의 검거에 집중하고 있다는 보고야....그러니 요시코가 경찰에 검거되기 전에 자네가 먼저 잡아볼 수 있다면 잡아보게나, 만약 삿포로 경찰이 먼저 요 시코를 검거하면 동경으로 압송하게 되어있으니 그리되면 어쩔 수 없이 길목에서 경찰의 호송 차를 급습하는 사태가 야기될 수 도 있으니 그 점도 준비해두고...알겠나.." " 네, 잘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아이들을 풀어놓겠습니다." 오야봉은 전화를 끊고 야마다를 호출하였다. 야마다를 호출 한 오야봉은 창가에 서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냉정한 킬러의 세계에서 그것도 특급에 속하는 자유인이 여자와의 도피 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직 내에도 자유인의 명 성에는 뒤지지만 그래도 실력 있는 킬러가 여럿이 있었다. 그들 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여자의 존재는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도구 이상으로 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한 그들을 가까이 서 지켜 보아온 오야봉 은 자유인의 행동에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냉정하고 잔인한 살 수에게 사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자유인 의 사냥 방법은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엉성한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자유인이 사랑에 빠졌다면, 적어도 그의 생각에 한 여자 가 조금이라도 자리하고 있었다면 자유인의 사냥에 대한 집중력 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야마다는 얼굴에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오야봉의 집무실로 들어 왔다. " 오야봉, 부르셨습니까." 야마다는 허리를 최대한 구부리며 인사를 하였다. 모든 조직원 은 오야봉 앞에서 무릎을 끓고 머리를 바닥에 부딪쳐야 되었다. 그러나 야마다는 오야봉의 배려로 그런 절차를 생략 할 수가 있 었다. " 야마다, 자유인이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이 점을 어떻게 생각 하느냐?" " 네... 야마다는 오야봉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이가 없었다. 그의 표 정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부정적인 기색이 역력하였다. 사 실 조직 내에 여럿의 전문 살수를 두고 있는 오야봉의 입장에서 자유인의 사랑이 사실이라면 살수들을 관리하는 조직의 입장에서 그대로 넘어갈 수 없는 연구 과제였다. " 믿을 수 없겠지, 그러나 사실이다." " 어떻게 자유인이 사랑을...상대는 누굽니까?" " 삿포로의 춘설을 아는가?" " 네..알고있습니다." " 그 춘설의 얼굴 마담이다, 이름은 요시코, 탤런트 였다고 하 더라.." " 탤런트 요시코라면...." " 아는 아인가?" " 아닙니다, 몇 번 TV에서 보았을 뿐입니다." " 자유인이 요시코라는 아이와 도피 중에 있다. 경찰이 이번 혼 도 사냥의 용의자로 자유인을 지목하고 함께 도피 중인 요시코를 검거하려고 혈안이다. 요시코가 경찰에 검거 될 경우에 혹시나 자유인이 검거되거나 요시코라는 아이가 우리의 사냥 계획에 대 하여 알고라도 있으면 심각한 사태가 야기 될 것이라는 장군님의 염려다, 조직의 인원을 총 동원하여 요시코의 행방을 찾는데 최 선을 다하도록 해야겠다." " 네, 알겠습니다." " 북해도 지역은 어느 조직이 관리하고 있는가?" " 북해도의 삿포로라면....저...그게" 야마다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고 있었다. " 모르는가...야마다 자네 게을러졌구만." " 죽을죄를 졌습니다." 야마다는 털썩 무릎을 끓고 머리를 바닥에 소리나게 부딪히었 다. 오야봉은 책상 위에 놓여진 컴퓨터의 전원을 키고 자료를 찾 아보았다. 한 곳의 디렉토리로 들어가자 그 곳에는 전국 모든 조 직의 계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오야봉은 삿포로 지역을 찾아보았다. " 삿포로 지역은 호마모토 조직이 관리하고 있구만....호마모토 라면 어떤가?" " 네, 호마모토라면 저희에게 꼼짝 할 수 없는 아이들입니다, 저희에게 재정적인 도움도 서너 차례 받아갔던 아이들입니다." 야마다는 여전히 무릎을 끓고 있는 자세였다. " 그렇다면 잘 되었군, 우리가 나서서 요시코라는 아이를 찾아 나서면 경찰의 의심을 받을 소지가 있으니, 자네는 호마모토와 협력하여 우리가 요시코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는데 갑자기 요시코 가 사라지자 찾아 나선 것처럼 만들라고...알겠는가....그리고 요 시코가 삿포로에 나가있는 검찰이나 경찰에 체포 될 경우에 동경 으로 압송 할 예정이니 그때는 호송 차를 덮쳐야 할 상황도 벌어 질 수 있으니 입이 무겁고 날렵한 아이들을 삿포로에 대기시키고 다른 지방에서도 검거 될 수 있으니 각 지역에도 아이들을 준비 시키도록 하게나." " 네, 지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 이번 일에 입을 가볍게 하는 아이들은 지위를 막론하고 숨통 을 끊어 놓겠다, 내 뜻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라." " 네, 알겠습니다." 야마다는 서둘러 오야봉의 집무실을 빠져 나왔다. 대검 특수 부의 김 형사는 수사 지시 서를 책상 위에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왜 그래." 박 경감은 김 형사를 향 해 심드렁하니 물었다. "경감님, 여기가 어딥니까, 특수 부 아닙니까?" "특수 부 맞아...그걸 여태 모르고 있어나." "참..경감 님도...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아..특수 부면 특수 부다운 일거리를 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것 봐, 김 형사..대체 왜 그래." "경감님, 그렇지 않아도 미제(謎題) 사건이 수두룩하여 골치가 아픈데 이제는 실종자 수색까지 하라니...이거..참." "그게 무슨 소리야?" "부장님이 실종 된 기자가 있으니 찾아보라고 하더군요." "어디 기잔데?" " oo일보 기잔데...박 종기라는 친굽니다, 이 친구 뒤 배경이 좋은가 보죠, 그러니 특수 부까지 손이 뻗쳤죠..." "박 종기...많이 들어본 이름인데....아..맞아...그 친구 작년인가 언제 올해의 기자상도 받은 실력 있는 사회부 기자지..." "미친놈 그런 놈이 어디에 쳐 박혀서 사람 짜증나게 만드는 거 야." "자...자, 그만 심술 내고 부장님의 지시니 우선 그 친구의 주변 부터 조사해 봐." 김 형사는 얼굴을 붉히며 사무실을 나갔다. 김 형사가 돌아온 시간은 퇴근 시간이 임박해서였다. 김 형사의 얼굴은 사무실을 나갈 때와는 달리 사뭇 상기 된 얼굴로 돌아왔다. 박 경감은 김 형사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것을 읽을 수 있었 다. 김 형사의 버릇 중에 사건의 냄새를 맡으면 얼굴 표정이 석 상처럼 굳어지는 버릇이 있었다. " 김 형사, 뭐 냄새라도 맡았어?" " 경감님, 아무래도 그 친구 실종 신고가 예삿일이 아닌 것 같 습니다." " 그건 왜?" " 예, 그게...제가 오늘 그 친구가 다니는 신문사에 다녀왔는데 요,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선배 기자의 말에 의하면 그 친구 가 무언가 특종을 꾸미고 있는 눈치였는데 그 특종이 나비의 향 연이라고 하였답니다. 선배 기자의 말에 따르면 그 친구가 나비 의 향연이 어쩌면 한국에서 만들어 졌을 거라는 얘기를 했다는 겁니다." 박 경감은 김 형사의 말에 사뭇 놀라고 있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좀 더 정확히 설명을 해 봐. 그리고 그 선배 기자라는 자의 이름은 뭐야?" "예, 양 인석(梁 仁錫) 이라는 기잡니다." "양 인석...양 인석이라...일단은 부장님에게 보고를 해야 하겠 군, 자칫하면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는 사건이 숨어있을 수 있으 니깐." 박 경감은 김 형사가 알아온 내용을 부장에게 보고를 하였다. 부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음 날 박 경감이 직접 박 기자 의 선배인 양 기자를 만나보라고 부탁을 하였다. 박 경감 보다 나이가 어린 부장은 박 경감에게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다. 부장 은 나이는 어리지만 신속한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고 배짱도 두둑 하여 박 경감과는 뜻이 잘 맞는 편이었다. 다음 날 박 경감은 특수 부로 출근을 하지 않고 곧 바로 oo신 문사로 직행하였다. 박 기자의 선배라는 양 기자는 어제 김 형사 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양 기자님, 박 기자가 말했던 특종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 에게도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하질 않았습니다, 특종은 워낙 개인이 은밀하게 진행하는 관례로...." "틀림없습니까, 천천히 잘 좀 생각해 보시죠." 양 기자는 머리에 손을 받치고 그 날의 일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다. " 아...이제 생각났는데 저 말고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그 날 과장님이 박 기자의 결근에 하도 야단을 치시기에 결근에 대한 변명으로 과장님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박 경감은 양 기자가 말 한 과장을 만나 보았다. 과장은 박 기 자의 특종 운운하는 소리를 양 기자에게 들었고 누구에게도 그 사실에 대하여 말 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박 경감은 신문사 관 계자들의 양해를 구하고 박 기자의 책상에서 잡다한 물건을 수거 하여 신문사를 나왔다. 그리고는 박 기자의 마지막 행선지인 박 기자의 고향집으로 차를 몰았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경춘 국도를 시원하게 달리자 가슴이 후 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박 경감이 박 기자의 집에 도착 한 시간은 점심 무렵이었다. 양 기자의 자세한 설명과 약도 탓에 쉽사리 박 기자의 시골집을 찾을 수 있었다. 박 기자의 시골집에는 늙은 부모와 부모를 모시고 살고있는 박 기자의 형이 살고 있었다. 형의 설명으로는 한 달 전 조상 제사 에 참석한 박 기자는 제사가 끝나자 곧 바로 서울로 떠났다는 것 이었다. 서울에 도착하면 부모님이 걱정을 할까봐 언제나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화를 걸어오던 박 기자는 그 시간 이후로 전화도 없었고 행방도 묘연하다고 하였다. 박 경감은 씁쓸한 마음으로 박 기자의 집을 나섰다. 박 기자의 형이 알려준 사실로 미루어 박 기자는 제사가 끝나고 집을 나선 그날 저녁 이후로 한 달 동안 소식이 없었다. 집으로 전화를 안 한 것으로 보아 박 기자는 춘천에서 서울사이의 밤길에 사라졌을 가능이 많았다.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 한 박 경감은 특수부 사무실에 들러 김 형사를 대동하고 박 기자의 자취방을 찾아 나섰다. 박 기자가 자취하는 집은 강남의 끝자락에 있었다. 뒤편에 작은 산이 있었고 지은지 오래 된 연립들이 산자락 밑에 운집하고 있 었다. 박 경감의 예상대로 박 기자의 집은 잠겨있었다. 작은 평 수의 연립주택이라 경비원이 없는 관계로 비상 열쇠를 구할 수가 없어서 박 경감은 열쇠 수리 점의 기술자를 불러와 문을 열 수가 있었다. 박 기자의 방은 혼자 사는 총각의 방치고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박 경감과 김 형사는 집안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책 상 밑에서 여러 개의 비디오 테이프가 발견되었다. 박 경감은 빈 박스를 발견하고는 그 곳에 잡다한 물품들을 챙겨 담았다. 박 기 자의 집을 나온 박 경감은 사무실로 돌아와 박스의 물건을 책상 위에 쏟아 부었다. "김 형사, 퇴근 할거야?" "경감님은요?" "나....나는 좀 더 있다가 갈 테니 먼저 가라구." "그럼 저도 같이 있다 나가죠." 박 경감과 김 형사는 책상 위에 널려진 박 기자의 물건들을 일 일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박 경감의 기대와는 다르게 별다른 점 은 찾을 수가 없었다. 박 경감은 집요하게 단서를 찾아보려고 밤 을 세웠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날이 밝자 박 경감은 박 기자의 친구와 주변 인물들을 조사해 보라며 부하 직원들을 내보냈다. 오후에 돌아온 직원들은 아무런 단서도 얻어 오질 못 했다. 흔히 있을법한 원한이나 치정, 채무 관계 등등 모든 것이 깨끗한 상태였다. 박 경감은 난감했다. 육감으로는 틀림없이 무언가가 있었다. 그 러나 이렇타 할 실마리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박 기자의 실종 수사는 지지부진하게 답보(踏步) 상태로 빠져들 었다. 특수 부에는 당장 시급한 사건들이 산재해있어 막연히 박 기자의 실종 사건에 매달리고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박 경감은 시급한 사건들을 처리하면서도 박 기자의 사건에 미련을 떨칠 수 가 없었다. 그 어떠한 사건보다도 엄청난 사건이 박 기자의 실종 에 연루되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박 경감의 예감이 실체로 드러난 사고가 특수 부에 전달 된 것 은 박 기자의 실종 수사가 있은 지 열 흘 만 이었다. "뭐라구요? 박 기자의 사체가 발견 되었다구요." 박 기자의 사체는 의암댐 수문 근방에서 발견되었다. 박 기자는 자신의 찝차에 갇힌 채 물 속에 빠져 있었다. 박 경감은 관할 경찰서인 춘천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춘천 경찰 서에는 뜻하지 않은 여인이 조사를 받고 있었다. 춘천 경찰서의 수사 계장은 서울 특수 부에서 찾아온 박 경감에게 호의를 베풀 고 있었다. 그는 손수 박 기자의 사체 발견 과정을 설명하였다. 수사 계장의 설명을 들은 박 경감은 야릇한 분위기에 빠져들었 다. 박 기자의 사체가 발견 된 것은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 졌다. 춘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아가씨는 화천에서, 속칭 티 켓 다방으로 불리는 다방에서 근무하는 아가씨였다. 박 경감은 수사 계장의 양해를 얻어 아가씨에게 사고의 내용을 상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미스 김으로 불리는 아가씨는 한 달 전에 목포에서 동료 아가씨 두 명과 이들을 인솔하는 마담 최모 연인의 인솔로 화천으로 옮 겨왔다. 이들은 철새처럼 전국을 떠돌며 한 곳에서 두 달 가까이 영업을 하고는 또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는 티켓 영업의 전형이 었다. 티켓 영업이란 보기에는 일반 다방과 다른 점이 없으나, 실제로 일반 다방과 똑같이 찾아오는 손님에게 차(茶)를 팔고 배달도 하 지만 여타 다방과 틀린 점은 티켓 다방에서는 손님이 원하는 경 우에 윤락 행위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선호하는 영업장소로 는 대체로 도심과 멀리 떨어진 읍 면 단위의 소도시로 인근에 윤 락가나 사창가가 없는 곳이 대부분 이었다. 티켓 다방의 윤락 행 위 방법은 다방에 차를 마시러 온 손님이 다방 안에서 차를 나르 는 아가씨 중에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을 경우에 아가씨의 성 (姓)을 알아낸 뒤 인근에 있는 여관에 투숙하여 다방으로 차 배 달을 주문한다, 이때에 배달 올 아가씨를 지목하면 지목한 아가 씨가 여관으로 배달을 와서 속칭 티켓을 끊는다. 대략 한 시간에 서 두 시간 단위로 요금이 책정되고 아가씨는 손님에게 티켓 비 용으로 받은 돈에서 절반은 자신들을 인솔해서 다니는 마담에게 숙식비와 영업 시간에 빠진 보상의 명목으로 주어야 한다. 마담은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아가씨들의 숙식을 해결하고 두달 동 안의 다방 임대료를 지불하므로 아가씨들이 본인의 사정으로 업 무가 있을 때에도 시간 공제를 하는 형편이었다. 한 소도시에 새 로운 티켓 아가씨들이 들어와 영업을 시작하면 그 도시의 한량들 이 처음 몇 칠은 아가씨들을 선보려고 다방으로 몰려든다, 그리 고 약 두 달이 지나면 소도시의 모든 한량들이 아가씨를 품어본 지라 영업이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그쯤에서 마담은 또 다른 지 역으로 이동을 하고 그 공백을 다른 티켓 마담이 옮겨오는 사이 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가씨들의 티켓 영업은 윤락 행위 뿐 아니라 여러 형태에서 티켓이 판매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남자 들만의 술자리에 불려가기도 하고 노래방에도 불려가고 여자가 필요한 자리에 대가만 지불하면 티켓 아가씨들은 어딘 든지 불려 나갔다. 미스 김은 날씨가 따뜻한 남부 지역에서 영업을 하다가 상대적 으로 날씨가 더욱 춥게 느껴지는 화천으로 옮겨오자 괜스레 부화 가 났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전국을 떠도는 처지라 대놓고 마담 에게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곳도 처음에는 동네 건달이나 한량들이 앞을 다투어 손님으로 찾 아들었다.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인근에 밀집한 군부대의 군인 들이 예상외로 많이 찾아왔다. 화천 읍에서 지역 유지로 행세하는 김 팔봉(金 八奉)씨는 읍내 에서 가장 많은 감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갔고있는 직함은 oo당 선전부장을 시작으로 청소년 육성회 회장, 방범 위 원회 부회장, 지역 발전 협의회 회장, 등등 많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가 물려준 읍내 요지의 건물과 재산이 조금 있는 그 는 이렇타 할 직업이 없는 한량이었다. 팔봉씨는 오늘도 초원 다방으로 출근을 하였다. 한 달 전에 찾 아온 초원다방의 티켓 아가씨들은 그 동안 초원다방을 걸쳐간 수 많은 티켓 아가씨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다. 서너 명의 아가 씨들은 한결같이 젊고 밉상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미스 김의 외모는 팔봉씨의 인내심을 뒤흔들고 있었다. 팔봉씨는 미스 김을 처음 본 한 달 전부터 거의 매일 초원다방에 출근을 하였다. 사실 팔봉씨 에게는 남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팔봉씨는 그 동안 초원다방에 티켓 아가씨들이 새로 오면 한 두 번 다방을 찾아가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점찍어 놓았다가 아가씨들이 떠나가는 시 기인 두 달 무렵에 아가씨를 불러내어 자신의 승용차에 태우고 인적이 드문 의암댐 수문 근처를 즐겨 찾았다. 지역 사람들에게 발각 될 염려도 없었다. 그리고 팔봉씨가 아가씨들이 떠나가는 시점에 티켓을 사용하는 이유는 관계 후에 있을 소문이 염려되어 나름대로 계산한 방법이 었다. 다방에 들어서자 마담이 화사하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하였 다. 팔봉씨는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스 김이 보이질 않았다. 팔봉씨의 얼굴에 잠깐 실망의 빛이 보였다. 잠시 후 미 스 김이 차 배달 가방을 들고 다방으로 들어섰다. 미스 김은 추 운 날씨에도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치마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팔봉씨의 눈은 치마 위로 동그 랗게 튀어나온 미스 김의 엉덩이와 두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팔봉씨는 그 동안의 관례를 무시하고 오늘 밤 미스 김을 불러내 야 하겠다고 작정을 하였다. 팔봉씨는 미스 김을 자리에 앉히고 남들 눈을 피해 기본 티켓 값의 두 배에 달하는 돈을 미스 김의 손에 건네주었다. 다방을 빠져나 온 팔봉씨는 밤이 되기를 기다리며 자동차를 말 끔히 세차도 하고 목욕도 하는 둥 부산을 떨었으나 시간은 더디 게 가고만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가고 어둠이 내리자 팔봉 씨는 약속 한 장소로 차를 몰아갔다. 평소에 사람의 통행이 한적 한 곳에 차를 주차시키고 기다리길 십 여분이 되어서야 미스 김 이 나타났다. 팔봉씨는 화천 시내를 벗어 날 동안 미스 김의 머 리를 숙이게 하였다. 시내를 벗어나자 팔봉씨는 조급한 마음에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팔봉씨는 그 동안 자주 찾아왔던 의암댐 수문 근처의 공터에 차 를 주차 시켰다. 차창 너머로 의암댐의 가두어진 물이 시커멓게 넘실대고 있었다. 이따금 산자락을 휘몰고 돌아가는 바람이 자동 차를 흔들고 있었다. 팔봉씨는 운전석에서 뒤 좌석으로 옮겨 앉졌다. 그리고 미스 김 이 앉아있는 앞좌석의 등받이를 뒤로 젖히었다. 미스 김의 머리 와 상체가 팔봉씨가 앉아있는 뒤 좌석으로 눕혀졌다. 팔봉씨는 몸을 옆으로 돌려 미스 김을 내려다보는 자세에서 손을 뻗어 미 스 김을 만져 보았다. 팔봉씨는 머리를 숙여 미스 김의 입술을 찾았다. 이따금 지나치는 차량의 불빛이 실내를 잠깐 드러나게 하였다. 자동차는 두 사람이 내뿜는 열기로 차창에 수증기가 허옇게 끼 어있어 실내가 보이지를 않았다. 미스 김은 거의 광기에 가깝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엉덩이를 들 썩이고 양다리를 흔들기도 하며 절규하였다. 심한 몸놀림으로 미 스 김의 엉덩이는 운전석 쪽으로 조금 밀려가 있었다. 팔봉씨의 움직임에 맞혀 엉덩이를 들었다가 내리던 미스 김은 허벅지에 와 닿는 딱딱한 이질감에 허벅지에 힘을 주며 딱딱한 이물질을 밀어 버렸다. 미스 김이 허벅지로 밀어버린 이물질은 자동차의 기어변속 레버 였다. 일단에 들어가 있던 기어레버는 중립으로 빠져 있었다. 팔봉씨는 자동차를 주차시키고 기어를 일 단에 집어넣고는 핸드 브레이크는 작동하지 않았다. 핸드 브레이크를 잡아 당겨 놓으면 행위 중에 심하게 거치적거리는 애물단지였다. 팔봉씨가 여태껏 이 장소에 차를 주차해 본 결과 평지와 진배없어 기어를 안 넣어 도 자동차는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러나 팔봉씨는 들뜬 마음에 너무 수면과 가까운 언덕 끝 부분 에 차를 주차하였고 몇 칠 전에 비하여 날씨가 많이 상승한 탓으 로 얼었던 땅이 조금은 녹아있었다. 두 사람의 광란에 가까운 몸 짓에 자동차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 었다. 흔들리던 자동차는 기어가 빠지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 직이고 있었다. 팔봉씨와 미스 김은 조금씩 물가로 움직이는 자 동차를 알 수가 없었다. 자동차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며 미스 김의 배 위에서 헐떡이던 팔봉씨의 몸이 퉁겨지듯 떨어져 나가며 뒤 머리를 앞 유리창에 세차게 부딪치었다. 미스 김의 칼날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미스 김의 비명은 곧 이어 찾아온 커다란 굉음과 물보라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팔봉씨는 뒤 머리에 통증으로 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둥대 었다. 물에 떨어진 자동차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미스 김은 자동차가 물 속으로 가라앉는 사실을 감지하고 소리 높여 비명을 질러 되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팔봉 씨는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당겼다. 문이 조금 열리며 얼음처 럼 차가운 물이 세차게 밀려들어 왔다. 순간 팔봉씨의 입에서 "헉"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손은 가슴을 쥐어뜯으 며 눈동자가 뒤집어 지고 있었다. 미스 김은 물이 쏟아져 들어와 벌거벗은 몸에 와 닿자 바늘로 전신을 찌르는 따끔한 통증에 정신을 잃을 뻔 하였다. 다행히도 정신은 수습하였지만 바로 코앞에서 고통에 찬 얼굴로 쓰러지고 있는 팔봉씨를 보자 심한 공포감에 숨이 막혔다. 물은 순식간에 불어나 얼굴까지 차 오르고 있었다. 미스 김은 무의식 적으로 앞에 쓰러진 팔봉씨를 밀어내고 열어진 문틈으로 빠져 나왔다. 물 밖으로 나온 미스 김은 공포심에 떨며 추위도 잊은 채 언덕을 기어올라 길가로 달려갔다. 서울에서 화물을 싣고 양구로 향하던 화물차 기사 덕팔은 갑자 기 도로로 달려드는 알몸의 여자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며 차를 급정거하였다. 화물차는 여자의 코앞에서 가까스로 정지하였다. 덕팔은 머리가 쭈삣하게 일어서는 놀라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 었다. 여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여자의 알몸에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며 입술은 파랗게 변해있었고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었다. 덕팔은 피곤함으로 인하여 환상을 보았나 싶어 눈을 감았다가 떠보았다. 그래도 여자는 있었다. 덕팔은 혹시 물귀신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싸늘한 전율을 느꼈다. 여자는 운전석 밑으로 다가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덕팔은 용기를 내서 창문을 내려보았다. "회...회...회장님이 ..죽었어요...회...회...회장님이 죽었어 요." 여자는 듣기 어려운 작은 소리로 더듬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마 치 실성한 사람처럼 같은 소리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덕팔은 운전석 뒤칸에서 취침용으로 갔고 다니던 담요를 꺼내어 차에서 내렸다. 여자의 알몸을 담요로 덮은 덕팔은 여자를 차에 태우고 자초지정을 물었다. 여자는 공포에 떨며 회장님이 죽었다 는 소리만을 하고 있었다. 덕팔은 여자의 빰을 세차게 때리며 정 신을 차리게 하려고 하였다. 몇 차례 빰을 호되게 맞은 여자는 머리를 무릎에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 회...회장님의 자...자..자동차가 저..저 아래에..." " 이것 봐, 아가씨 회장님의 자동차가 저 아래에서 어찌 되었다 는 얘기야?" " 물에 빠졌어요, 차..차안에 회...회..회장님이..." " 뭐라구, 차가 물에 빠졌다고?" 여자는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팔은 사태를 짐작하고는 휴대 전화로 119에 신고를 하였다. 한 동안의 시간이 흐른 뒤 119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고 곧 이 어 경찰 순찰차도 도착하였다. 구조대는 신속하게 잠수 장비를 갖추고 아가씨가 말한 물 속으 로 뛰어 들었다. 팔봉씨의 자동차는 쉽게 발견되었다. 구조대는 자동차의 인양을 위하여 크레인을 동원하는 둥 현장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지역 신문사의 취재 기자도 현장으로 달려왔다. 현장 주변은 많은 자동차의 불빛과 구조대의 서치라이트로 인하 여 대낮처럼 밝았다. 크레인의 로프가 물 속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팔봉씨의 자동차가 수면 위로 모습을 나타내었다. 기자가 눌러대는 카메라 후레쉬 불빛이 수면에 반사되고 있었다. 물 속에서 자동차에 로프를 연 결하던 잠수부들이 물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맨 마지막으로 물 속에서 올라온 잠수부는 놀라운 사실을 일행에게 알려왔다. 팔봉씨의 자동차가 가라앉은 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또 다 른 자동차가 빠져 있다는 얘기였다. 또 다른 자동차는 물 속 경 사가 급격히 떨어지는 위치에 가라앉아 자동차의 지붕 부분만이 조금 보이는 상태여서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상황이었 다. 담요를 덮어쓰고 조서를 받고 있는 미스 김에게 전후 사정을 모 두 들은 박 경감은 죽은 박 기자의 발견이 자신에게 앞으로 있을 사건의 열쇠를 보여주는 예감이 들었다. 박 경감은 박 기자의 사체를 서울로 황급히 보내고 김 형사에게 전화를 하여 경찰 병원의 사체 부검위로 근무하는 황 박사의 집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오전까 지는 사체의 부검을 끝 맞히라는 명령을 하였다. 박 경감의 고등 학교 동창인 황 박사는 한 밤중에 사체의 부검을 의뢰하는 박 경 감의 부탁이 짜증스러웠지만 박 경감의 급한 성격을 잘 알고 있 는 황 박사는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일을 해주리라는 사실을 박 경감은 알고 있었다. 춘천 경찰서를 나온 박 경감은 박 기자의 사체가 발견 된 현장 으로 가보았다. 현장은 자동차의 바퀴 자국이 어수선하게 찍혀 있었다. 박 경감은 주위를 세심하게 둘러보았다. 도로에서 자동 차가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자동차가 떨어진 공터까지는 올 수 있는 각도가 아니었다. 도로에서 공터까지는 일부러 진입하여야 했다. 박 기자의 사고는 운전 중에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는 확신 이 섰다. 누군가에 의한 타살이거나 아니면 본인 스스로의 자살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가능성이 없었다. 박 기자를 조사한 바로는 자살 을 할 이유가 없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박 경감은 서울에 도착 할 수가 있었다. 박 경감은 이른 새벽에 집에 들어가기도 불편하여 박 기자의 자취방 을 찾아가 보았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빈 집 특유의 싸 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박 경감은 방바닥에 대자로 드러누 웠다. 특종을 만들기 위하여 밤낮으로 뛰어 다녔을 박 기자의 모 습이 상상되었다. 드러누워 담배를 한 대 피운 박 경감은 자리에 서 일어나 세심하게 실내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이미 단서가 될법한 물건들은 지난번에 가져간 뒤여서 별다른 물건은 없었다. 부엌으로 사용하는 거실의 한 쪽에 놓여진 가스 렌지 위에는 박 기자가 사다 놓았을 법한 라면이 봉지에 담겨 있었다. 갑자기 시 장기를 느낀 박 경감은 그릇을 찾아 물을 붙고 가스 렌지의 불을 켰다. 물이 끓자 박 경감은 봉지 속의 라면을 꺼내어 끓는 물에 집어넣었다. 빈 라면 봉지를 버리려고 쓰레기통을 찾았으나 보이 지를 않았다. 한참을 찾은 끝에 싱크대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쓰 레기 비닐 봉투를 발견하고는 빈 라면 봉지를 쓰레기 봉투에 버 리려던 박 경감의 눈에 쓰레기 봉투의 아래 부분에 버려진 종이 들이 눈에 띄었다. 박 경감은 쓰레기 봉투를 거꾸로 쏟아 붓고 상당량의 종이들을 한편으로 옮겨 놓았다. 종이들은 작은 메모 지부터 연습장 크기의 종이가 여러 장 있었다. 종이에는 박 기자 의 낙서가 가득 적혀 있었다. " 아이구, 기자 생활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아...잘 안 풀리네...씨팔. 양 선배 참 좋은 사람이야, XXxXxx 등, 등, 등, 등이 문제야 틀림없어. 아...배고프다, 밥이나 먹고 들어올걸.. 장가나 갈까...외로운데..미친놈...기자가 외로울 틈이 어딨어 기 자는 사람도 아니다. 왜 좆같으니깐...흐흐흐 아...정말 꼬인다." 박 경감은 박 기자의 낙서를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밤 마다 혼자 썰렁한 방바닥을 뒹굴었을 박 기자의 고독이 느껴지는 듯 하였다. 박 경감은 끓는 물 속에 집어넣은 라면도 잊은 채 박 기자의 낙 서가 적힌 종이에 매달려 있었다. 그릇 속의 물이 줄어들어 라면 이 타면서 메케한 연기가 올라오자 박 경감은 그제야 끓는 물에 라면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창 밖으로 어둠이 물러가고 날이 밝아오자 박 경감은 박 기자의 낙서를 챙겨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 한 부장에게 사고의 경위를 보고하고 나오 려는 박 경감에게 부장은 새로운 요원이 오늘부터 박 경감의 팀 에 합류 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부장의 방에서 자리로 돌아 온 박 경감의 앞에 낮 설은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 저...박 경감님 아니세요?" " 그런데 누구신지?" " 네, 오늘부터 경감님의 팀에서 근무하게 될 장 혜라(張 蕙癩) 입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박 경감은 어이가 없어 장 혜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옆에 있 던 김 형사도 어이가 없는지 장 혜라의 위아래를 째려보았다. 박 경감은 전화기를 들고 부장에게 연결하였다. " 부장님, 새로 합류하는 요원이 여잡니까?" " 네, 맞습니다." " 아니 부장님, 특수 부는 험상궂은 강력 사건만 담당하는 부서 라는 사실을 잊은 신 겁니까?" " 아, 아, 경감님 진정 하세요, 제가 그걸 모를 리 있습니까, 경 감님이 놀라시는 심정도 알지만 장 경사는 뛰어난 소질을 갔고있 는 요원이라 특별히 제가 박 경감님의 팀에 보내드린 겁니다, 화 내지 마시고 그 친구의 리스트를 살펴보시고 연락 주세요." 박 경감은 부장과의 통화를 끊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장 혜라의 리스트 봉투를 열어 보았다. 박 경감의 눈이 조금씩 빛나며 리스 트와 혜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장 혜라의 경력 난은 화려했다. 경찰대학의 범죄 수사 과를 수 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유학 도중 정부의 부탁으로 미국 FBI 수 련 요원으로 근무 중 비중이 큰 사건의 핵심을 찾아내어 사건 해 결에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영어와 불어 그리고 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재원이었다. 또 한 운동 에도 소질이 있어 각종 무술을 섭렵하여 어디에 내 놓아도 자신 의 몸은 보호 할 수가 있었다. 박 경감은 혜라의 관련 서류를 서랍 속에 집어넣고 괜스레 무뚝 뚝한 표정을 지었다. " 경력이 화려하구만,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되어 반갑네." " 감사합니다, 경감님, 경감님의 명성은 수없이 많이 들었습니 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 " 명성은 무슨 명성, 괴팍스럽다는 소문을 들었겠지, 자...인사 들 하라구 같이 근무하게 될 장 경사야." 박 경감은 요원들을 하나씩 소개하였다. " 참, 김 형사, 박 기자의 부검은 어찌 되었나?" " 네, 점심 무렵에 결과가 나온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황 박사 님이 경감님을 가만두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박 경감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사람 좋은 황 박사의 화내는 모습이 눈에 선 했다. " 경감님, 박 기자의 사체 발견 사실이 아침 신문과 방송에 벌 써 나갔습니다." " 할 수 없지, 어제 현장에 기자들이 들이 닥쳤으니깐." " 좌우지간 기자 놈들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쫓는 다니깐." " 김 형사는 장 경사에게 박 기자의 사건 내용을 설명 해주고 황 박사에게 갔다 오게나." 박 경감은 박 기자의 낙서 뭉치를 펼쳐 보았다. 황 박사에게 다녀온 김 형사로부터 결과를 들은 박 경감은 황 박사에게 전화를 하였다. "황가냐? 어떡해 된 거야?" " 야, 박가야, 너 정신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한 밤중에 사람을 불러내고 도대체 너는 전생에 나하고 무슨 원수 진 일 있 냐?" " 야, 황가, 나 지금 급해..어떡해 된 일이야?" " 자식...지 급할 때만 찾는 놈이...타살이야." " 타살인 건 나도 알아, 어떤 방법이냐고?" " 목뼈가 순식간에 돌아갔어, 엄청난 힘의 소유자가 한 방에 틀 어버린 것 같아, 이건 내 생각인데 아마도 전문적인 킬러의 솜씨 야, 운동을 많이 한 전문 킬러들이 즐겨 사용하는 살인 수법이 지, 우리 나라에는 아직 보고된 사건은 없지만 외국에서 입수 된 자료에 의하면 틀림없이 맞는 것 같아...어쩌면 킬러는 외국인인 지도 모르지." 박 경감은 황 박사의 설명에 긴장을 하였다. 박 기자가 어떠한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몰라도 전문적인 킬러가 등장 할 정도라면 사건은 섣불리 접근 할 성질의 사건이 아니었다. 박 경감은 상관인 부장 검사를 동참시키고 박 기자의 사건에 대 하여 수사 회의를 하였다. 회의 결과 박 경감의 팀은 모든 사건 에 손을 떼고 박 기자의 사건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서울의 변두리 허름한 삼 층 건물 앞에 검은 색의 승용차가 급 정거를 하였다. 차에서는 머리를 짧게 깍은 건장한 사내들이 황 급히 뛰어 내렸다. 건물의 삼 층에는 살림집처럼 침대와 가구들이 있었고 식탁에는 건장한 사내 네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 야, 이 일을 어쩌면 좋치?" " 그러게 내가 뭐랬어, 확실하게 처리 하자니깐..." " 야, 개새꺄,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냐." " 아..그 씹할 놈의 노땅은 하필이면 거기서 빠구리를 하다가 빠질게 뭐야." " 야, 그나저나 형님이나 독거미 년도 뉴스를 봤을까?" " 모르지, 지금은 못 보았다해도 신문에까지 났는데 모를 리가 없겠지." " 그럼, 우린 어떻게 되냐?" " 형님은 그렇타 쳐도 독거미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 야, 우리 튀어야 되는 것 아니냐?" "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독거미가 신문이나 방송을 들었 다면 우리를 가만히 두질 않을걸..." " 그럼, 지금 빨리 이곳을 뜨자, 그리고 당분간 잠수 타고 있다 가 사태를 보고 한 달 후에 대전 봉주르 카페에서 만나자, 각자 알아서 잠수하고 어때?" " 그래, 그러는게 좋겠다. 그년 성격에 우릴 죽일지도 몰라?" 네 명의 사내들은 결론을 내리자 서둘러 옷가지들을 챙기기 시 작했다. 사내들이 각자의 가방에 옷가지를 모두 챙길 무렵 현관 문이 벌컥 열리며 사내들이 들이 닥쳤다. 들이닥친 사내들을 보 고 네 명의 사내들은 사색이 되어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였다. " 니들 어디로 튈 라고 그래?" " 형...형님, 가긴 어딜 갑니까, 그냥 옷 정리 좀 하느라고." " 옷 정리, 웃기고 자빠졌네 자식들, 큰 형님이 니들을 본당으 로 모셔 오랜 다." 네 명의 사내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기에 본당으로 끌 려가면 잘해야 병신이고 그렇치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네 명의 사내들은 서로 눈짓으로 다짐을 하고 기회를 엿 보았 다. 들이닥친 사내들은 모두가 일곱 명이었다. " 끌어내." 형님으로 불리던 자의 명령에 사내들이 네 명의 사내들에게 다 가오자 네 명 중 한 명의 입에서 "튀어" 라는 외마디가 터져 나 왔다. 네 명의 사내들은 다가오는 사내들을 향하여 의자며 주변 집기 들을 내 던지며 현관을 가로막고 서있는 세 명의 사내를 향하여 돌진을 하였다. 다가오던 사내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몸을 옆으로 틀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 틈으로 네 명의 사내들이 달려가자 사내들은 신속하게 발을 뻗어 그들의 다리를 걸었다. 앞서 달리던 사내가 발에 걸려 넘어지자 뒤따르던 사내들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 개새끼들 없애버려." 형님이라는 사내가 이를 갈며 소리치자 사내들은 장딴지에서 날 이 시퍼런 회칼을 꺼내 들었다. 사내들은 모두 칼을 들고 네 명 의 사내를 빙 둘러 포위하였다. 네 명의 사내들은 서로 등을 맞 대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사내들 중 하나가 빠르게 몸을 낮추며 허벅지를 겨냥해서 칼을 휘둘렀다. 칼은 정확하게 네 명의 사내 중 한 명의 허벅지를 깊 숙이 찔렀다. 허벅지에 칼을 맞은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거꾸러졌다. 세 명의 사내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사내들에게 돌진 하였다. 피가 튀기는 난투극이 벌어 졌지만 네 명의 사내들은 수 적으로 열세였고 상대는 칼마저 들고있어 무참히 쓰러지고 있었 다. 제일 먼저 허벅지에 칼을 맞고 쓰러진 사내는 잠시 그들의 공격을 면할 수가 있었다. 사내들은 쓰러진 사내를 제쳐두고 미 친 듯이 덤벼드는 세 명의 사내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하였다. 순 간 허벅지에 칼을 맞고 쓰러져있던 사내가 번개처럼 일어서며 창 문으로 뛰어 내렸다. 사내는 창을 부수고 삼 층에서 아래로 곤두 박질하였다. 형님이라 불리던 사내와 또 다른 사내가 창가로 달려와 사내가 뛰어내린 아래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에 뛰어내린 사내가 다리 를 절룩거리며 골목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삼 층에서 뛰 어내린 사내는 요행히 일 층에 있는 침대 공장에서 쌓아놓은 침 대 매트리스 위로 떨어져 멀쩡할 수가 있었다. " 빨리 저 새끼 쫓아" 허벅지에 칼을 맞은 사내는 골목을 허둥대며 뛰어 갔다. 사내는 사력을 다하여 숨을 만 한 곳을 찾아 뛰었다. 그러나 변두리 동 네는 사람의 통행도 많치 않았고 마땅히 몸을 숨길만한 곳도 없 었다. 사내는 구석진 곳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뛰어 들었다. 몸을 바닥에 웅크리고 사내는 전화기를 들고 단추를 눌렀다. 경 찰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사내는 번호를 눌렀다. 다급한 사내는 119를 누르고 있었다. " 네, oo소방서입니다." 사내는 잘 못 걸린 전화에 짜증을 내며 통화를 끊으려고 하였 다. 그 순간 사내의 눈에 추격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추격자들은 아직 사내를 발견하지 못 한 것 같았다. 사내는 공포심에 몸을 떨며 말을 더듬었다. " 살...살려...주세요." " 여보세요, 무슨 사고가 났습니까, 침착하게 사고 내용과 위치 를 말씀 해 주세요, 그래야 바로 출동 할 수가 있습니다." " 사람이...죽었어요. 아마 세 명 모두 죽었을 거예요." " 네, 뭐라구요." 사내는 추격자들이 주위를 살피며 다가오자 소리를 낮추며 짜증 을 내었다. " 야..이..개새끼들아 사람이 죽었단 말야, 그리고 나도 죽게 생 겼고." " 이것 보세요,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신고를 하세요." " 으.....저들이 다가오고 있어. 난 이제 죽었어, 야, 똑바로 들 어 그 기자 놈은 우리가 죽였어...아니, 그년이 죽였어, 우리는 물 속에 빠뜨리기만 했어. 아...나 좀 살려줘요, 저 새끼들은 날 죽일 거야." 소방서 상황실 근무 자는 장난 전화가 아닌가 하여 통화를 끊을 까 하다가 사내의 목소리가 너무도 절박하여 그대로 듣고 있었 다. 연기치고는 완벽한 목소리 연기라고 생각했다. " 개새끼들 그까짓 실수 좀 했다고 사람을 죽여...씹새끼들 그 냥은 나도 안 죽어, 이보슈, 잘 듣고 내 얘기를 경찰에 알려, 알 았어...명령을 내린 자는 진리교의 교주..."헉"..살려 주세요, 제 발....형님 살려 주세요...으...윽...헉..나비의 향연은 일...본에서 지..." 전화는 여기에서 끊어졌다. 박 경감과 김 형사 그리고 혜라는 머리를 맞대고 박 기자의 낙 서를 조사하고 있었다. " 이것 봐, 김 형사, 이 친구 낙서에 등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 오는데 등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 글쎄요, 등허리를 얘기하는 등인지, 불을 밝히는 등인지 알 수가 없네요, 그런데 거의 모든 종이마다 등이라는 단어가 있네 요." " 등...등이라, 이거 참." 박 경감은 사건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등이라는 단어의 의미 를 찾고자 모든 상상을 동원하고 있었다. " 김 형사, 전화야." " 네, 전화 바꿔 습니다, 아...종철이구나, 웬일이냐 니가 전화 를 다하고 응...그래..."뭐라구"..너 지금 어디야, 바로 앞이라구, 그럼 빨리 이곳으로 올라와...그래, 임마, 정문에서 내 이름 대고 빨리.." 김 형사는 전화를 끊고 상기 된 표정으로 박 경감에게 다가왔 다. " 무슨 전화야?" " 네, 고등학교 후배 녀석인데, OO소방서에서 근무하는데요, 상황실에 이상한 전화가 와서 제게 들고 왔다는 겁니다." " 이상한 전화..무슨 전환데?" " 잘은 모르겠지만 박 기자의 사건과 연결 된 것 같습니다. 자 세한 것은 후배가 올라오면 알겠지요." 잠시 후 김 형사의 후배라는 사내가 녹음 테이프를 들고 사무실 로 들어섰다. 사내는 상황실에 근무 중, 신고 전화가 접수되어 통화를 하던 중 상대방의 욕설과 앞뒤가 안 맞는 말에 장난 전화가 아닌가 하 여 전화를 끊으려고 하였으나 상대방의 말에 기자의 죽음이 어떻 다는 얘기에 혹시나 하여 전화를 끊지 않고 녹음도 그대로 하였 다는 설명과 함께 문제의 녹음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박 경감과 요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녹음 테이프의 내용을 들 었다. 녹음 된 내용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절박한 사내의 음성 이 스피커를 통하여 울려 나왔다. 박 경감은 테이프의 내용을 묵묵히 수 차례 반복하여 들었다. " 수고 하셨습니다, 이 테이프를 저희가 보관해도 괜찮겠습니 까?" " 아..네, 괜찮습니다." 사내가 돌아가고 박 경감은 요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였다. " 모두가 들어서 알겠지만 이것은 장난 전화가 아니야, 전화를 걸어온 사내는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주위는 숙연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 녹음 된 내용을 가정하여 추리해 본다면, 사내는 누군가의 사 주로 박 기자를 살해했어, 아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독거미라는 여자가 박 기자를 살해하고 사내와 죽었다는 세 명의 사내들이 시체 처리를 맡았을 가능이 크지, 그런데 이들이 시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해 어제 박 기자의 사체가 발견되고 그 내용이 신문 과 방송에 나가자, 이들에게 시체의 처리를 맡겼던 자들이 처벌 을 위하여 이들에게 손을 쓴 것 같아....사내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사건의 주모자는 진리교의 교주라고 했어...그렇다면 독거 미라는 여자나 사내를 처치한 인물들은 진리교의 신도나 아니면 하부 조직 일 가능성이 커..." 박 경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녹음 된 내용을 다시 한 번 들어보았다. " 모두들 잘 들었지, 뭐 이상한 구석이 없나?" 박 경감의 질문에 혜라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 오전 중에 김 선배로부터 박 기자의 사건에 대하여 상세히 들 었습니다, 박 기자는 특종을 찾아냈을 가능성이 큰데, 박 기자가 찾아낸 특종은 나비의 향연이 한국에서 촬영되고 있다는 힌트를 같은 신문사의 선배에게 언질을 주었습니다, 나비의 향연이 일본 에서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아니 세계가 다 알고있 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박 기자가 찾아냈을 법한 특종은 엄청 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지금 녹음 내용 중에 나비의 향연은 일본 에서 지..라는 말에서 끊어졌습니다, 여기서 제가 의심이 가는 부분은 소방서에 전화를 걸어온 사내의 다급한 목소리는 생생한 현장을 추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제 생각도 녹음을 들어보니 장난 전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을 눈앞에 두 고 왜 하필이면 나비의 향연이라는 포르노 테이프가 사내의 입에 서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첫 번째, 박 기자를 살해 한 조직이 나 비의 향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박 기자 가 나비의 향연을 취재하는 도중에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입증합 니다, 두 번째, 사내는 죽어 가면서 나비의 향연은 일본에서 지.. 라고 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내는 말을 이어가지 못 했지만 일본에서 다음 단어인 지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의 추리를 가능케 합니다, 지라는 단어에는 지금, 지역, 지시, 지도, 등등 여러 단 어가 있습니다, 사내는 과연 무슨 단어를 말하려고 하였는지 모 르지만 만약 지금 이라면 일본에서 지금 만들고 있다 내지는 지 금 판매가 잘 되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라 맞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지시라는 단어가 일본에서라는 단어와 합쳐진다면 그것은 일본에서 지시를 내리는 또는 지시를 받는 이 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추측이지만 지시라는 말을 사내가 하려고 하였다면 그것은 박 기자를 살해한 조직이 나비의 향연을 일본의 지시로 국내에서 은밀하게 제작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박 기자가 발견하자 살인자들은 어떠한 경로로 그 사실을 알고 박 기자를 살해했을 것이라 봅니다, 그렇다면 박 기자가 특종에 대한 사실을 선배 기자에게만 알렸고 그 선배는 직속 상관인 과 장에게만 알렸습니다, 과장은 본인 스스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 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박 기자의 취재 행위가 다른 누구에게 발각되지 않았다면 선배 기자나 상관인 과장이 박 기자 살해범들 과 연결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죄송합니다, 녹음 내 용에 벗어나는 쓸데없는 말을 늘어나서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그 만..." 혜라는 박 경감의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박 경감은 눈을 감고 혜라의 추리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리한 지적과 판단에 감탄을 하였다. 김 형사는 혜라의 기억력에 놀라고 있었다. 박 기자의 사건에 대하여 빠르게 설명을 하였는데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는, 그것도 들은 얘기만을 가지고 사건을 추리하는 언변에 기가 질렸 다. 요원들 모두는 놀라는 표정으로 당돌한 아가씨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장 형사가 제대로 집어내었다, 장 형사의 말대로 이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수사에 임하도록, 그리고 김 형사는 신문사에 사람을 붙여서 그 선배라는 자와 과 장을 24시간 감시토록 하고 그리고 박 형사와 최 형사는 종교 단체에 진리 교라는 단체가 있는가 알아보고 그리고 마 형사는 박 기자의 친구들을 조사 해 보도록 하라구, 정보가 새지 않게 은밀히 진행하라구....자, 자, 모두 빨리 뛰라고." 요원들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혜라는 박 경감이 자신만을 빼 놓자 기분이 상했다. " 장 형사, 이리와 보게나." " 네, 경감님." " 자네 대단하구만...자네의 추리를 듣고 깜짝 놀랐어, 내가 지 적하려던 부분을 자네가 모두 말해서 나는 할 일이 없더군, 내가 자네에게 사과하네." " 경감님 무슨....?" " 솔직히 자네를 처음 본 아침 만 해도 여자라는 편견에 자네를 무시했었네, 그리고 자네가 이런 거친 판에는 어울리지 않게 미 인이라는 사실이 조금 기분이 나빴거든, 미안하네...그리고 앞으 로 열심히 일해 주게나, 그리고 자네는 여기 있는 박 기자의 낙 서 뭉치에 나오는 등 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사실을 알아 봐주 게, 자네라면 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가네, 나는 나이가 먹어서 머리가 예전처럼 돌아가지를 않는 것 같아." 혜라는 박 경감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잘 못을 부하 직원에게 솔직히 말하는 그의 순수함이 좋았다. 박 경감은 문제의 소방서를 찾아가 녹음 된 내용의 전화가 걸려 온 발신지를 확인하여 주변을 탐문 수사 해 보기로 하였다. 혜라는 박 기자의 낙서 뭉치를 집어들고 자신의 책상으로 오면 서 박 경감이 지시 한 등 이라는 단어를 기필코 밝혀 내리라 다 짐을 하였다. 박 경감은 소방서에 들러 전화가 걸려온 지역의 위치를 대충 확 인하였다. 소방서의 상황판에는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여 전화국 의 도움으로 신고 전화가 걸려오면 전화의 발신지역이 동(洞) 단 위로 체크가 되고 있었다. 일 개의 동은 지역이 광범위하여 박 경감은 사건의 전화가 걸려온 시간과 동 위치를 확인하여 전화국 으로 달려갔다. 전화국에서는 다행히 그 시간에 소방서로 전화가 연결 된 전화의 발신 지역을 알 수가 있었다. 신고 전화는 공중 전화로 밝혀졌다. 공중전화가 설치 된 지역을 알아낸 박 경감은 그 곳으로 옮겨갔다. 목격자는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전화국에서 알려준 공중 전화 의 위치에서 얼마되지 않는 거리에 허름한 3층 건물의 1층에 있 는 침대 공장의 공원들은 아침나절에 갑자기 "쿵"하는 소리에 밖 을 내다보니 한 사내가 2층인지 3층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위에서 침대 매트리스가 쌓여진 곳으로 떨어졌고 떨어진 사내는 허벅지 에서 많은 피를 흘리며 골목으로 달려갔고 곧 이어 건물의 계단 을 험상궂은 사내들이 황급히 뛰어 내려와 사내가 사라진 골목으 로 뛰어 갔다는 사실과 잠시 후에 또 다른 사내들이 축 늘어진 3 명의 사내를 들쳐업고 계단을 내려와 차를 타고 사라졌다는 얘기 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화물차와 많은 사내들이 몰려와 3층의 짐을 모두 싣고 갔다는 것이었다. 박 경감은 공원들의 얘기에 부화가 치 밀었다. " 아니, 사람이 3층에서 떨어지고 그것도 피를 흘리고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이 죽어서 업혀져 나오는데도 신고를 안했단 말입 니까?" " "예" 그 업혀서 나온 사람들이 죽었어요, 우리는 죽은지 몰랐 는데." " 꼭 사람이 죽어야 신고를 합니까, 같은 건물에 살면서." " 그 3층 사람들 우리는 잘 몰라요, 무섭게들 생겨서 마주치면 우리가 고개를 돌려 버렸어요, 그리고 신고하면 가뜩이나 바빠서 야간 잔업까지 하는 처진데 경찰에서 오라 가라 하면 우리만 손 해지 누구 손햅니까?" 박 경감은 어이가 없어 한 숨을 내 쉬었다. 아무리 개인 주의가 팽배한 세상이라지 만 같은 건물에 살고있는 사람이 죽어 나자빠 지는데도 모른 채 하는 세상의 삭막함이 한스러웠다. 신고만 되 었다면 그들을 체포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겁 없이도 화물차를 끌고 와 3층의 짐을 싣고가는 대범함도 보여 주었다. 박 경감은 3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3층은 종이 조각 하나 없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소방서에 전화를 걸었던 사내의 절규는 장난이 아닌 현실이었다. 사내는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끝내지 못 하고 죽어갔을 것이다. 박 경감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었다. 박 경감은 황 박사에게 전화를 하였다. 박 경감이 마음 놓고 술 주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황 박사뿐이었다. 혜라는 오후 내내 박 기자의 낙서에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소 득은 없었다. 퇴근 시간이 임박해서 혜라는 정보 보관 실을 찾아 가 나비의 향연이라는 테이프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열 댓 개의 테이프를 빌렸다. 보관실의 근무 자는 여자인 혜라가 포르노 테 이프를 열 댓 개나 가져가자 야릇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혜라 는 자신의 팀이 맡고있는 사건이 나비의 향연이라는 포르노 테이 프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한 번은 테이프의 내용을 보는 것 도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적지 않은 갈등 끝에 결심을 하였다. 사실 혜라는 지금껏 여하한 포르노 테이프도 본 적이 없 었다. 한아름의 테이프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혜라는 가볍게 저녁 식사를 맞히고 샤워를 하였다. 그리고 팬티에 헐렁한 티셔츠를 걸쳐 입고 TV 앞에 앉았다. 미국에서 돌아와 혜라는 작은 오피스 텔을 얻어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바로 밑에 여 동생도 시집 을 간 상황에서 부모의 눈치를 받으며 함께 살기에는 불편 한 것 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혜라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테이프를 넣었다. TV의 화면에는 이상한 복장의 남녀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망사 같은 가운을 길게 늘려 뜨려 입고 있었 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는 가운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 다. 실내의 분위기는 엄숙해 보였지만 한 눈에 사이비 종교 집단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음악이 흐르자 화면 속의 남녀들은 흐느 적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춤이 이어지고 흐르던 음악이 바뀌자 남녀들은 몸에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어 버렸다. 수많은 남녀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체로 춤을 추고 있 었다. 그들의 표정은 흡사 최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몽롱해 보였 다. 각기 떨어져 춤을 추던 남녀들은 어느 순간에 각자의 이성을 찾아 한 쌍의 커플로 춤을 추었다. 그것은 춤 이라기 보다는 전 위에 가까운 밀착이었다. 혜라는 야릇한 감정과 함께 호흡이 가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 하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찰 대학에 들어가 수많은 남성들 과 부딪치며 오로지 최고를 향하여 앞만 보고 뛰어온 혜라는 남 자를 이성으로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러한 그녀가 난생 처음 남녀가 함께 벗은 몸으로 춤을 추는 모습은 충격이었고 잠자고 있던 여자로서의 신경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작아지고 상대적으로 남녀의 신음 소리가 크게 들 려오고 있었다. 화면 속의 남녀들은 더 이상 춤을 추고있지 않았 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몸을 애무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화면 속의 남녀들은 모두가 한 몸이 되어 뒹굴고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리라 예상했던 여자는 고통인지 희열인지 분간키 어려운 신음을 토해내며 사내의 엉덩이를 자신의 두 손으로 끌어 당기고 있었다. 그 모습은 혜라의 예상을 뒤엎은 충격이었다. 화면은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혜라는 화면에 정신이 팔려 본인의 목적을 잃어가고 있었다. 수사에 도움을 얻고자 보려던 당초의 생각은 사라지고 호기심에 빠져 있었다. 화면 속의 남녀들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알려 주고있었다. 혜라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뛰고 심한 갈증처럼 목이 타는 목마 름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혜라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한 컵 가득 따라 마셨다.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하 지만 TV 앞에 앉자 가슴은 또다시 벌렁거리고 전신에 소름이 돋 는 것처럼 싸늘한 느낌이 흐르고 있었다. * * * 혜라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TV의 화면에는 테이프가 모두 돌아갔는지 아무것도 없이 검은 화면에 이따금 흰 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혜라는 침대에 벌렁 누워버렸다. 원래의 계획은 밤을 새워 빌려 온 테이프를 모두 보려고 하였으나 더 이상 테이프를 볼 용기가 없었다. 혜라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눈을 뜬 혜라는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냉정해 야 할 수사관으로서 호기심에 빠져 행동한 자신이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누구에게도 말못할 창피스러운 일 이었다. 혜라는 김 형사의 얼굴을 떠 올려 보았다. 김형사라면 테이프를 보고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아마도 덤덤하게 자리를 지켰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쩌면 화면에 비치는 젊은 여인들의 몸매를 감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상이 아닌 사건 해결의 열쇠를 찾으려고 보았다면 김 형사는 덤덤하게 보았을 것이다. 아니 예리한 눈으로 숨겨진 비밀을 찾으려고 정신을 집중했을 것이다. 혜라는 자신의 실수에 자책하고 있었다. 자신의 실수는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당초의 목적을 잃고 흥미와 호기심으로 테이 프를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혜라는 냉정하게 자신의 실수를 파악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TV 앞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내부에 잠들어있던 육체의 욕망에 이끌릴 수 없다는 오기 가 솟아올랐다. 박 경감의 지시로 특수 부의 요원들은 24시간 OO신문사와 집 을 오가며 박 기자의 선배 기자인 양 기자와 김 과장을 감시하고 있었다. 감시가 시작된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두 사람에게서는 의 심이 갈만한 특별한 행동이나 움직임은 없었다. 김 형사는 낮에 사우나에서 잠깐 잠을 청하고 김 과장을 감시하 던 마 형사와 교대를 하였다. 김 과장은 늦은 밤까지 퇴근을 안 하고 있었다. 양 기자는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사무실을 빠 져 나왔다. 정 형사가 양 기자의 뒤를 쫓았다. "과장님, 퇴근 안 하세요?" "응,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김 과장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의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계 는 오후 8시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 과장은 담배를 피워 물 고 시계를 주시하고 있었다. 오후 9시가 조금 지나서 김 과장은 컴퓨터로 통신에 연결하였다. 수신된 편지가 한 통 있었다. 김 과장의 통신 아이디는 진리교 의 세례명인 J123이었다. 메시지는 간단하였다. "안녕 하세요, 음성에서 고추를 판매합니다. 가격은 한 근에 12.200원 입니다. 생각이 있으시면 고추를 사러 오세요." 김 과장은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책상에서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온 김 과장은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으로 향했다. 김 형사는 김 과장의 자동차가 주차장에서 빠져 나오자 대기하 고 있던 자동차에 올라타고 미행을 시작하였다. 김 과장이 운전하는 자동차는 집으로 향하는 방향과는 반대 방 향인 강남 방면으로 가고 있었다. "눈치채지 않게 조심해서 붙어." "네, 알겠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후배 형사는 능숙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다. 김 과장의 차는 퇴근 시간이 지나서 한적해진 도로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김 과장은 한남대교를 지나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였다. 그곳 은 식당 가가 밀집한 곳이었다. 김 과장의 차는 설렁탕을 전문으 로 팔고있는 한 식당 앞에 멈추었다. 식당에 들어선 김 과장은 시계를 보았다. 메일로 전달 된 고추 가격이 12.200원 이었다. 고추를 판다는 내용은 집회를 연다는 암호였다. 암호는 매달 집회가 끝나면 다른 상품으로 바뀌었다. 고추의 가격은 시간을 의미하고 있었다. 12.200원은 12시20분, 0시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리교의 집회는 각 구역의 전도사에게 시간이 전달되면 전도사 는 자신이 맡고있는 구역의 한 신도에게 시간을 알려준다. 메일 로 시간을 전달받은 신도는 즉시 다음 신도에게 메일을 보낸다. 신도들은 자신이 살고있는 구역에 몇 명의 신도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신도가 알 수 있는 범위는 자신에게 메일을 보내온 신도 와 자신이 메일을 보내준 신도, 그리고 구역을 맡고있는 전도사 이렇게 세 명이었다. 김 과장은 설렁탕으로 늦은 저녁을 하였다. 한 달만에 열리는 집회를 김 과장은 몇 칠 전부터 기대와 흥분 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김 과장에게 진리교의 집회는 세상을 살 아가는 의미와 희망이었다. 진리 교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무섭지 않았다. 설렁탕 집을 나선 김 과장의 차는 강남을 벗어나 성남으로 향하 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김 과장은 국도에서 벗어나 좁은 샛길로 차를 몰았다. 샛길로 들어선 김 과장은 후사 경을 통하여 혹시나 미행하는 차량이 없 는가 살펴보았다. 멀리 자동차의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김 과장 은 진리교의 전도사에게 교육받은 대로 자동차의 속도를 낮춰 보 았다. 멀리서 뒤따르던 자동차의 속력도 상대적으로 느려지는 것 을 알 수가 있었다. 김 과장은 섬짖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하 는 마음으로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아 보았다. 뒤에서 따 라오던 자동차도 속력을 내는 듯 불빛이 멀어지질 않았다. 김 과 장은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확신이 섰다. 다시 한 번 김 과장은 자동차를 길가에 세워 보았다. 뒤따르던 자동차는 잠깐 멈칫 하 더니 서서히 김 과장의 자동차를 지나가고 있었다. 김 과장은 오던 길로 자동차를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후사 경에는 자동차의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뒤차는 적당한 간 격을 유지하며 쫓아오고 있었다. "야, 아무래도 앞차가 눈치챈 것 같은데, 똑바로 운전 좀 하라 니깐." " 선배님, 이런 좁은 길에서 어떻게 안 들키고 운전을 할 수가 있습니까." 김 형사는 후배의 말대꾸에 할말을 잃었다. 상대방이 미행 여부 를 확인 하고자 마음먹고 이런 좁은 길로 들어선다면 김 형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 과장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미행 사 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김 과장은 자동차의 방향을 서울로 향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도사의 교육에 따르면 모든 신도들은 집회 장소로 오 는 과정에서 항시 미행자가 없나 주위를 기울여야 하였다. 김 과 장이 좁은 길로 들어선 까닭도 미행자가 있는가를 확인하는 방법 이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으면 그 날의 집회에 는 참석을 포기하고 자연스럽게 집으로 방향을 바꿔야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김 과장의 마음은 불안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판단대로 미행자가 있다면 그것은 경찰이었다. 김 과장의 머리에 는 박 기자의 사건으로 자신을 찾아온 나이든 박 경감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 형사는 아쉬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한 대의 차량 으로 미행을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많았다. 인원을 좀더 충원 하여 두 대의 차량으로 미행을 하였다면 이렇게 쉽사리 발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지만 한 편으로는 김 과장의 행동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김 과장은 자동차를 운전하며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경찰은 진작부터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자신은 알 수 없었지만 경찰은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 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집 근처에 다다른 김 과장은 멀리 어둠 속에서 전조등을 끄고 따라오는 자동차를 발견 할 수가 있었다. 김 과장은 자신의 집 앞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태연하게 집으로 들어갔다. "선배님, 지금 저 치를 연행할까요?" "그래서, 연행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잡아다가 족치면 되잖아요." "무슨 죄로? 밤중에 잠 안자고 왜 싸돌아 다니냐고? 저 치는 우리가 호락호락 넘볼 상대가 아니야. 명색이 신문사 편집 과장 이야, 물렁한 호박이 아니라고 의심이 가도 확실한 물증이 없으 면 오히려 큰코다쳐.....그나저나 큰일이네, 미행이 발각되었으니 어쩌면 좋지...경감님께 뭐라고 보고를 하지...." "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당장 내일부터 저 치는 몸을 도사릴 게 뻔한데..." 김 형사는 앞일이 걱정이었다. 다음 날 박 경감은 김 형사의 보고를 듣고 조금은 놀라는 눈치 였다. 미행에 실패한 사실은 아쉽지만 상대방이 미행의 존재를 의식하고 일부러 한적한 도로를 택하였다면 자신도 어쩔 수 없다 는 생각이 들어 화를 내지는 않았다. 박 경감은 인원을 좀 더 투입시켜 김 과장의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수 부에서는 유일한 용의자 로 지목되고 있는 김 과장이 사건 해결의 열쇠라고 판단하고 있 었다. 박 경감은 한편으로는 장 혜라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혜라는 박 경감의 지시로 몇 칠 째 출근을 안하고 있었다. 박 기자의 낙 서와 나비의 향연이라는 테이프를 정보 보관 실에서 빌려간 사실 을 알게 된 박 경감은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시 집도 안간 처녀가 보관 실에서 포르노 테이프를 빌리기까지는 대 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박 경감은 그러한 그녀에게 박 기자의 낙서에 수없이 등장하던 "등" 이라는 단어의 숨겨진 비밀과 나비의 향연에서 박 기자가 찾아냈을 법한 비밀을 찾기까지는 출근을 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 렸다. 박 경감 본인은 물론 특수 부의 모든 요원이 나비의 향연 을 수없이 보았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저돌적이고 당찬 혜라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리라는 믿음이 있었 다. 다른 요원들은 장 혜라가 박 경감의 지시로 출장을 떠난 것 으로 알고들 있었다. 김 과장이 자신의 컴퓨터에 메일이 온 것을 확인 한 시간은 점 심 시간이 임박해서였다. "안녕 하십니까, 귀사에 지나간 신문이나 폐지가 있으면 고가로 매입 하고자 합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내용은 간단하였다. 김 과장은 서둘러 사무실을 벗어나 공중전 화로 달려갔다. 메일은 전도사에게 온 것이었다. "안녕 하십니까, OO신문사의 김 과장입니다." "네, 안녕 하십니까, 세례명을 말씀 해 주십시오." "네, J123 입니다." "어제는 집회에 참석을 안하셨더군요." "네, 문제가 생겨서 가는 도중에 뒤돌아 왔습니다." "무슨 문제가...." "네, 누군가가 미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경찰 같습니다." "뭐라구요, 틀림없습니까? 어디서 되돌아갔습니까?" 전도사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묻어있었다. 김 과장은 어제 밤 에 있었던 내용을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잘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바쁜 일이 있으니 1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주십시오." 전도사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진리교의 본당으로 전화를 걸었 다. 전화를 받은 사제는 전도사의 보고를 듣고 곧바로 모든 사제들 을 소집하였다. 회의실에는 벌써 연락이 되었는지 제사장도 달려 와 있었다. 전화를 받은 사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도사에게 들은 내용을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 방금 기호가 알려온 내용을 어찌 생각들 하는가?" 전도사의 이름은 강 기호였다. 제사장이 대전에서 한창 주먹 전 쟁을 벌리고 있던 시절에 강 기호는 언제나 선두에 서서 아이들 을 지휘하던 돌격대장이었다. "형님, 아직은 경찰에서 우리의 냄새를 맡았다는 소식은 없습니 다." "확실한가?" " 네, 신도 중에 경찰 내부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부서에 근 무하는 자가 있습니다." "정보에 의하면 이번 박 기자의 사건을 담당하는 자가 박 경감 이라고 들었다, 박 경감은 대검 특수 부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수 부의 수사 내용은 경찰에서도 모르고 있다, 사 건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특수부가 맡았던 사건의 내막이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 그럼, 형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제사장은 잠시 생각에 빠져있었다. " 내가 보기에도 아직은 괜찮은 것 같다. 박 기자라는 놈이 알 아냈다는 우리의 비밀은 진리교의 실체가 아닌 나비의 향연이 우 리 나라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였다, 그것도 구체적인 내용이 문서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그자의 머리 속에 담겨있 던 비밀이었다. 그자가 알아낸 비밀은 그자의 죽음과 함께 사라 지고 말았다. 그자의 비밀이 특수 부에 넘어 갔다면 어제의 집회 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겠는가?" 제사장의 논리에 모여있던 사제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긍정의 표시를 하고 있었다. 제사장은 잠시 후에 말을 이어 나갔다. "김 과장이 미행을 당했다면 일단은 용의자로 지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은 경찰도 김 과장에게 이렇다 할 혐의를 찾지 못 해 감시만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급해진 그들이 김 과장을 강제 연행해 족치기라도 하다면 우리의 신분이 노출 될 위험이 크다, 아무리 김 과장이 광적인 우리의 신도라 해도 매에는 장사 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 어쩌죠?" "김 과장을 유인하여 없애는 방법이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좋을 듯 하다." 결정이 내려지자 전도사에게 명령이 전달되었다. 본당의 연락을 받은 전도사는 김 과장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과장은 1시간이 조금 지나서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요, 김 과장입니다." "본당의 지시입니다, 지금 즉시 사무실을 나와 그전에 교육받은 데로 돌아다니세요, 지금이 오후 1시20분이니깐 오후 6시에 청 량리 역 앞의 시계탑으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네, 어제의 집회에 불참자가 너무 많아 오늘 저녁에 특별한 장 소에서 불참자들을 상대로 집회가 열립니다. 어제의 집회에서는 제사장님이 직접 모든 신도에게 조물주의 자식이라는 징표를 나 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제 바쁜 일로 불참한 신도에게도 징 표를 나누어주려는 제사장님의 배려입니다." "감사합니다, 전도사님."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세요, 경찰의 미행을 완전히 따돌리지 못하면 약속 장소로 오지 마세요, 알겠습니까?" 김 형사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있는 김 과장을 예의 주시하 고 있었다. "김 형사, 저 사람 수상하지 않아? 사무실에도 전화가 많을 텐 데 일부러 밖으로 나와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것이...." 마 형사가 말을 안해도 김 형사는 수상함을 떠나 오늘 김 과장 의 신변에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김 과장 의 숨은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김 과장이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사무실로 향 하지 않고 시청 방면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조 형사, 새가 날랐다, 조심해서 따라붙어.." "네, 지금 따라붙고 있습니다." 김 과장이 시청 방면으로 걸음을 옮기자, 뒤로는 조 형사가, 앞 에서는 최 형사가 자연스럽게 걸어가며 미행을 시작하였다. 박 경감은 어제 밤 실패로 끝난 김 과장의 미행 사건을 접하고 김 과장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는 특수 부의 요원들을 김 과장 의 주변에 증강 배치하였다. 수많은 사무실이 밀집한 거리는 오가는 사람이 많아 미행을 하 기에는 유리하였다. 김 과장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김 과장은 앞에 있는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주시하며 걸었다. 김 과장이 횡 단보도 가까이 왔을 때는 횡단 신호등의 파란 보행 신호가 점멸 대고 있었다. 정지선에 서있던 자동차들이 주춤주춤 앞으로 나서 고 있었다. 횡단보도의 중앙 부분에 건너는 사람이 없자 성급한 자동차들이 출발을 하고있었다. 그 순간 천천히 걷던 김 과장이 쏜살같이 출발하는 자동차 사이 를 뛰기 시작했다. 요란한 자동차의 경음기 소리가 몇 차례 울렸 다. 김 과장은 횡단 보도를 건너 반대편 인도에서 건너편을 살피 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김 과장의 뒤를 쫓던 조 형사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하마터면 김 과장의 뒤를 쫓아 횡단보도를 건널 뻔하였다. 만약 조 형사가 김 과장의 뒤를 쫓아 횡단보도를 건넜다면 미행은 발각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 과장은 어제 밤의 사건으로 자신의 주변에 감 시자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무모하게 달리는 차량들 속으로 뛰 어들었던 것이었다. "조 형사, 빨리 뛰어가 지하도를 건너서 앞장서고 있어.." 다행히도 김 형사와 마 형사가 건너편에 잠복하고 있었다. 김 형사는 김 과장을 만난 적이 있었기에 얼굴이 팔려 앞으로 나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김 과장은 서점에 들어가 잠시 책을 보다가 걸음을 옮겨 백화점 으로 들어갔다. 백화점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김 형사는 김 과장에게 가까이 접근 할 수가 없어 마 형사가 접 근을 하여 뒤쫓고 있었다. 김 과장은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있는 승강기 앞에 서 있었다. 지하층에서 사람을 싣고 올라온 승강기는 빈 공간이 많지가 않았 다. 앞줄에 서있던 몇 사람이 승강기에 오르고 있었다. 김 과장 은 사람들을 제치고 승강기로 뛰어들었다. 마 형사도 자연스럽게 승강기에 발을 내딛는 순간 승강기에서 부저가 울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마 형사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난감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버티고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마 형사가 승강기에서 쫓 기듯 내려오자 승강기는 위층을 향하여 오르고 있었다. 마 형사 는 황급히 비상계단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승강기는 2층은 그냥 통과하고 3층에 멈추었다. 승강기의 문이 열리자 김 과장은 황급히 쇼핑 객들의 무리 속에 파묻혀 버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3층에 도착한 마 형사의 눈에 승강기는 이 미 5층으로 올라가 있었다. 마 형사는 다리에 힘이 빠지며 그 자 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김 과장이 3층에 내렸는지 아니면 5층에 내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3층의 매장에도 수많은 사람이 쇼핑을 하고있어 설사 김 과장이 3층에 내렸다 하여도 찾기가 힘이 드는 상황이었다. 백화점의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김 형사의 무전기로 다급한 마 형사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김 형사, 놈을 놓쳤어. 아직은 이 안에 있는 것 같으니 출구를 부탁해." "뭐라고, 놈을 놓쳤다고, 대체 어찌된 일이야?" 김 형사는 벌컥 역정을 내었다. " 자세한 것은 나중에 얘기하고 빨리빨리........" 김 형사는 황급히 요원들을 호출하였다. "조 형사, 들리나? 그래, 놓쳤어 그러니 자네는 후문을 맡아.... 최 형사, 들리나? 자네는 지하 출구를 맡아." "저...선배님, 지하 출구는 여러 곳인데 어느 쪽을 지키죠?" "야...그건 니가 알아서 지켜야지 나한데 물으면 어떻게.." 김 과장이 미행을 눈치채고 일부러 자신들을 떨쳐버리려고 복잡 한 백화점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상대방이 미행을 눈치 챘다면 미행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3층에 내린 김 과장은 쇼핑 객의 무리에 파묻혀 자연스럽게 걸 음을 옮겼다. 김 과장의 눈에 화장실 옆에 있는 화물 승강기가 눈에 띠었다. 김 과장은 화물 전용 승강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 다. 지하에는 백화점 직원들이 출입하는 작은 문이 있었다. 작은 문은 곧 바로 지하철을 타러 갈 수 있는 지하도와 연결되어 있었 다. 최 형사는 지하 식품매장으로 연결 된 여러 곳의 출구 중에 지 하철과 곧바로 통하는 출구를 지키고 있었다. 최 형사의 눈에 김 과장이 보인 것은 김 형사의 지시가 있고 나서 5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 선배님, 새가 나타났습니다, 지금 지하철을 타려고 가는 듯 합니다." 최 형사의 무전을 받은 요원들은 서둘러 지하도로 뛰어내려갔 다. 김 형사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김 과장은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지하철 을 타러 내려가고 있었다. 최 형사는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김 과장을 따르고 있었다. 요원들이 지하철 승강장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전철이 떠나고 있었다. 최 형사는 요원들의 달려오는 모습을 전철의 유리창으로 보아야 했다. 전철 안은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았다. 김 과장은 출입문 가까이 서 있었다. 최 형사는 몇 사람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김 과장을 살피고 있었다. 전철이 다음 역에 도착하자 내릴 사람들이 출입구로 밀려들었 다. 김 과장은 자리를 옆으로 비켜주며 내릴 사람들에게 길을 터 주었다. 최 형사는 김 과장이 이번 역에서 내리지 않는 것을 확 인하고는 눈길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렸다. 사람들이 내리고 나 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전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문이 닫히 고 잠시 후 승객의 안전을 확인 하고자 자동문은 잠깐 동안에 두 어 번의 문을 열었다 닫고 있었다. 그 순간 입구에 서있던 김 과 장은 자동문이 열렸다. 닫치려는 순간 쏜살 같이 내리고 있었다. 최 형사가 눈길을 김 과장에게 돌리는 순간 출입문으로 다가 서는 김 과장을 발견하였다. 김 과장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고 사람들을 젖히며 다가가려는 순간 갑자기 열리는 자동문 사이로 사라지는 김 과장을 보았다. 급히 출입문으로다가 갔으나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서서히 출발하는 전철을 김 과장은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김 과장은 지하철역을 벗어나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지나서 내 렸다. 그리고는 한참을 걷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동대문 지하철역 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금 전철을 타고 청량리로 향했다. 전 도사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김 과장은 혹시나 있을 수 있는 감시 자의 추적을 피하고 있었다. 약속 된 시간에 청량리 역 광장의 시계탑 밑에 도착 했을 때는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김 과장은 초조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펴 보았다. 약속 된 시간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전도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 시간이 30분 가량 지났을 무렵, 신문을 팔고있는 어린 소 년이 김 과장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소년은 김 과장에게 작은 종 이를 건네주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길을 건너 이문동 방향으로 오시면 XX렌터카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승용차를 빌려 망우리를 지나 교문리로 해서 팔당댐 방향 으로 천천히 가십시오. 안전을 위하여 우리가 뒤쫓아 가겠습니다. 오늘 임시 집회는 설악산 근처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은 즉시 종이는 불에 태우세요. 강 전도사." 김 과장은 라이터를 꺼내 종이에 불을 붙였다. 작은 종이는 순 식간에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고 있었다. 김 과장은 XX렌터카에서 차를 빌려 느린 속도로 팔당 댐을 향 하여 달리고 있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수시로 후사 경을 확인하 며 뒤쫓아오는 차량이 없는가 살펴보았으나 복잡한 서울에서는 어느 차가 쫓아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교문리를 지나 서자 차량의 통행이 적어졌다. 후사 경에는 승용 차 불빛보다는 조금 높은 불빛이 뒤따르고 있었다. 불빛으로 보 아 화물차나 승합차의 불빛 같았다. 팔당 댐을 지나 양수리를 통과하자 지나가는 차량이 거의 없었 다. 뒤따르던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수 차례 깜빡이기 시작했다. 김 과장은 길 한편의 넒은 공터에 차를 세웠다. 뒤따르던 차량도 길가의 한편에 불을 끄고 정지하였다. 뒤따르던 차량은 레저용으 로 만들어진 수입 차량이었다. 수입 차의 문이 열리며 늘씬한 여자가 김 과장에게 다가오고 있 었다. 어둠 속에서도 여자의 몸매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가까 이 다가온 여자는 몸매만큼이나 미인이었다. "저...김 과장님 되세요?" "네, 그런데요." "안녕 하세요, 저는 과장님이 보내주시는 통신 메일을 받고있는 세례명 J124입니다, 저도 어제 집안에 일이 있어 집회에 참석을 못 했어요." "아...그러세요, 반갑습니다, 제가 보내는 메일을 받는 분이 누 구인가 궁금했는데.....여자 분이라니 뜻밖이네요." 김 과장은 렌터카의 문을 잠그고 여자의 뒤를 따라 수입 레저 자동차로 옮겨갔다. "뭐야, 김 과장을 놓쳤다고? 도대체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고들 있는 거야." 박 경감은 어이가 없는지 허공을 응시하며 끓어오르는 분을 삭 히고 있었다. 도대체가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각지에서 차출 된 특수 부의 요원이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씩이나 따라붙은 미행 이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나고 말다니.... 김 형사는 얼굴을 떨구고 말이 없었다. 전문적인 범죄 단체의 인물도 아닌 신문사의 일개 과장에게 보기 좋게 농락 당한 기분 이, 김 형사를 미치게 만들었다. 김 형사에게 모든 정황을 듣고 난 박 경감은 의아심에 빠져들었 다. 김 과장의 행동은 이미 추적자가 있음을 눈치채고 추적자의 눈을 피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김 과장이 보여준 일련의 행동 은 추적자를 피하기 위하여 특별히 교육을 받은 냄새가 나고 있 었다. 여자를 따라 자동차에 오른 김 과장은 자동차의 실내에 놀라고 있었다. 뒤 좌석은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일자의 좌석이 있었고 좌석 뒤로는 아담한 침대가 있었다. 자동차는 덩치에 비하여 소 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 과장님, 제 차가 조금 이상하세요?" " 아..네, 아닙니다, 이런 차는 처음 타봐서..." 김 과장은 이러한 자동차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물로 보 기에는 이번이 처음 이었다. " 제가하는 일은 지방 출장이 많아요. 그래서 차에서 이동하며 잠을 자는 시간이 많아서...." " 아...그러세요,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어봐도 실례가 아닐지?" " 아..아니에요, 실례는 무슨 실례...저..노래하는 애들 매니저하 고 있어요." " 가수 말이에요?" " 네." 김 과장은 어쩐지 여자가 세련되고 미인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자동차는 승차감 좋게 달리고 있었다. 김 과장은 여자의 얼굴에 나비의 가면을 그려보며 생각을 해 보았다. 혹시나 집회 중에 상 대했던 여자가 아니었나 떠 올려 보았다. 김 과장이 지난 몇 달의 집회를 떠올리고 있을 무렵 전화벨 소 리가 울려왔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었다. " 여보세요, 아...전도사님, 네, 제 차에 타셨어요, 네....네..." 여자는 한참을 대답만 하고 있었다. " 아이...그걸 제가 어떻게 말해요, 전도사님이 직접 말씀 해 주 세요, 네....그럴 게요...네.." 여자는 고개를 돌리며 김 과장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 여보세요, 전화 바꿔습니다." " 과장님, 지금 제사장님의 연락이 있으셨는데요, 시간이 급해 서 집회 장소에 오시면 징표만 나눠주시고 곧 바로 서울로 오셔 야 한답니다. 그래서 집회 장소에 도착하시기 전에 미리 몸짓 경 배는 드리고 오시라는 분부였습니다." "아...네, 그런데 누구와...?" "지금 옆에 같이 가시는 분도 어제 집회에 불참 하셔서 몸짓 경 배를 못 올린 신도입니다." 김 과장은 전화를 끊고 전화를 여자에게 건네주며 다시 한 번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여자의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였다. 여자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 과 장은 여자와의 몸짓 경배를 상상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과장님, 제사장님의 분부라니 불편 하셔도 어쩔 수 없이 제 차 에서 예배를 올려야 하겠네요, 저는 주위를 의식하는 편이라 다 른 곳은....하지만 과장님이 불편 하시다면 가는 길에 어디 모텔 이나 호텔로..." "아...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예배를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김 과장은 대답을 하면서 좌석 뒤의 침대를 힐끔 쳐다보았다. 색다른 경험이 상상되며 기대가 되었다. 여자는 옆 창문 아래에 있는 여러 개의 버튼 중에 하나를 눌렀 다. 그러자 검은 색의 유리가 운전석과 뒤 좌석 사이에서 솟아오 르고 있었다. 운전석과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여자는 뒤 좌석을 앞쪽으로 바짝 당기었다. 그러자 문과 좌석사이로 침대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여자는 먼저 침대에 올라가 무릎을 끓고 앉 았다. 김 과장은 여자의 뒤를 따라 침대에 올라가 무릎을 끓고 진리교의 진리문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그 소리는 주술과도 같아 일반인은 옆에서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리문을 모두 읽은 여자는 진리교의 음률을 입으로 소리내며 앉은 자세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김 과장은 여자의 춤사위가 조금은 어색하다고 생각하였지만 달 리는 자동차 안이라는 생각에 별 관심은 없었다. 여자는 음률에 맞혀 하나씩 옷을 벗고 있었다. 천장에 부착 된 오렌지 빛 실내등에 드러나는 여자의 몸매는 김 과장의 넋을 빼 앗고 있었다. 김 과장은 옷을 벗는 의식조차 잊은 채 여자의 움 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넋이 빠진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김 과장을 발견 한 여자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김 과장 곁으로 다가왔다. 여자가 다가오 자 김 과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옷을 벗으려고 하였 다. 다가온 여자는 김 과장이 옷을 벗는 것을 거들어 주고 있었 다. 김 과장은 여자의 등허리에 있는 브레지어의 끈을 풀었다. 김 과장은 여자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끌어안고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여자의 엉덩이가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여자는 돌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김 과장의 얼굴에 걸터앉은 여자는 엉덩이를 비벼 데기 시작했다. 여자가 입과 코를 덮어 누르자 김 과장은 숨을 쉬기가 힘이 들었다. 김 과장은 숨을 쉬기가 불편하여 머리를 들려고 하였으나 여 자의 엉덩이는 바위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정신이 아득해진 김 과장은 여자의 엉덩이를 밀치려고 손을 뻗어 보았으나 여자의 종 아리와 허벅지 사이에 끼어있는 손은 빠지지를 않았다. 여자는 한치의 틈도 없이 입과 코를 묵직한 힘으로 덮고 있었다. 김 과장은 다리를 바동거리며 여자의 엉덩이 밑에서 얼 굴을 빼내려고 하였으나 여자의 엉덩이는 더욱 무겁게 내리 누르 고 있었다. 김 과장은 손과 발에 마치 쥐가 난 것처럼 저려옴을 느끼고 있 었다. 무릎을 세우고 있던 김 과장의 다리가 힘없이 늘어지며 작 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자의 엉덩이에 닿아있던 손도 힘 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김 과장은 앞을 분간키 어려운 어둠 속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김 과장의 눈에 환한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빛은 수없 이 많았다. 눈앞에 다가온 빛은 갑자기 사람의 얼굴로 변하고 있 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이, 제사장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죽은 박 기자의 얼굴도 있었다. 마누라의 얼굴은 싸늘하 게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가온 얼 굴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모든 빛이 사라지자 어둠은 다시 찾아 왔다. 잠시 후 또 다른 빛이 자신의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빛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김 과장은 자신의 몸이 빛나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어둠 속에서 강하게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김 과장의 몸은 유성처럼 빛 을 발하며 어둠 속으로 빨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찾 아들었다. "어찌됐어?" 박 경감은 종적을 감춘 김 과장의 집과 주변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온 김 형사를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 "아무 곳에도 연락이 없습니다. 김 과장의 마누라가 친척집은 모두 연락을 해 보았지만 어디에도 연락이 없었답니다." 박 경감은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피워 물었다. 특수 부의 요원 들이 김 과장을 미행하다 놓친 것이 벌써 이틀이 지나고 있었다.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었던 김 과장이 실종되자 박 경감은 수사의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죽은 박 기자의 낙서를 조사 하던 장 혜라도 어제부터 연락이 없었다. 집에도 없었고 호출을 하여도 연락이 없었다. 특수 부의 요원들은 사라진 김 과장의 사무실과 집에서 철저한 조사를 하였으나 김 과장은 업무와 관련 된 사항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특수 부는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있었다. 장 혜라는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TV의 화면을 쏘아보고 있 었다. 지난 몇 칠간을 혜라는 박 경감의 배려로 나비의 향연과 씨름하고 있었다. 처음 나비의 향연을 보았을 당시에 빠져들었던 욕망의 유혹은 이제 이겨낼 수 있었다. 혜라는 박 기자의 낙서와 나비의 향연에 사건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단서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확신은 박 경감이 수거해온 박 기자의 물건 중에 나비의 향연이라는 테이프가 일 회분부터 마지막회까지 모 두 있었고, 선배 기자인 양 기자의 말에 의하면 박 기자는 사무 실에 출근을 안한 동안에 집에서 틀어박혀 있었다고 하였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박 기자가 특종을 암시했다면 당연히 박 기자는 나비의 향연에서 다른 사람이 발견 못 한 그 무엇을 발견 했을 가능성이 컸다. 혜라는 자신처럼 몇 날 몇 일을 나비의 향연과 씨름하고 있었을 박 기자의 모습을 그려보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곱 번째의 비디오 테이프가 절반 정도 돌아갔을 무렵 혜라는 갈증을 느끼고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물병을 들었다. 컵에 물을 따르던 혜라는 무심결에 눈을 돌려 TV를 보았다. 혜라 는 물병을 내려놓고 황급히 비디오 리모콘을 들었다. 버튼을 눌 러 화면을 반대로 돌려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응 시하였다. 가까이 보이던 남녀의 중요한 부분이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녀의 앞으로 또 다른 남녀의 뒤엉킨 모습이 보이더니 잠깐 화면이 흔들리며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는 백열등 같은 등이 여러 개 매달려 있었다. 화면은 이내 사람들을 보이고 있었다. 혜라는 다시금 테이프를 돌려보았다. 천장을 보이는 화면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혜라 는 지금껏 보았던 테이프의 내용들을 되새겨 보았지만 어느 테이 프도 신도들의 모습 외에는 내부의 구조나 그 어떠한 장면도 보 이지를 않았었다. 그것은 촬영자의 세심한 의도로 집회 장소를 추측 할 수 있는 단서를 사전에 배제한 약속 된 촬영이었다. 신도들의 모습 외에는 처음으로 나타난 화면에서 여러 개의 백 열등을 발견한 혜라는 불현듯 박 기자의 낙서를 떠 올려 보았다. 박 기자의 낙서에 수없이 적혀있던 등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암 시를 추측하며 혜라는 반복해서 같은 화면을 보았다. 잠깐 동안의 화면에서 그보다 더 잠깐 동안에 반짝이는 등을 발 견한 것은 테이프를 반복해서 보기시작한지 서너 시간이 지난 후 였다. 천장에 메 달려 있던 여러 개의 백열등 중에 하나의 백열등이 두 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임은 찰나간에 이루어져 관심 을 가지고 보아도 찾기가 어려운 순간이었다. 혜라는 TV를 끄고 모든 상상을 동원하여 테이프에 나타났던 반 짝이는 등과 박 기자의 낙서에 나타난 등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단서를 맞추어 보았다. 테이프에 나타났던 천장의 화면은 촬영기 사가 촬영을 위하여 뒷걸음질치다가 사람에 게 걸려서 잠깐 중심 을 잃는 과정에서 촬영 카메라가 천장을 향했던 것 같았다. 혜라가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창문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혜라는 반짝이는 등에 관심을 집중하여 보았다. 혜라의 상식으로 백열등이 반짝이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백열등 안에 들어 있는 필라멘트가 수명을 다하면 한순간에 백열등은 빛을 잃어버 리고 만다. 그런데 화면에 나타났던 백열등은 분명히 두 번을 반 짝이고 있었다. 혜라는 다시금 백열등이 반짝이는 화면을 틀어보 았다. 자칫하면 놓치기 십상인 화면은 틀림없이 반짝이는 백열등 을 보여주고 있었다. 혜라는 부스스한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오피스텔 주변의 상가 들을 살피고 다녔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상점들은 문을 안 열 은 곳이 많았다. 혜라는 전파사 앞에 서성이며 주인이 나타나기 만을 기다렸다. 한참만에 50대의 주인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혜라는 아침 개시부터 물건은 사지 않고 질문만을 하기가 미안하여 필요 없는 물건을 사야만 하였다. "저...아저씨, 말씀 좀 여쭙게요." "뭔데요?" 주인은 가게를 미처 정리하지 못 한 탓에 얼굴을 돌린 채 대답 하였다. 주인의 말투로 미루어 성실한 답변은 기대 하기가 어려 워 보였다. 혜라는 마음이 급하여 할 수 없이 신분증을 보여주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저씨, 실은 제가 경찰인데요, 사건 해결에 필요한 부분이 있 어 바쁘신 것은 알지만 한 가지만 물어 볼게요." 주인 사내는 혜라가 보여주는 신분증을 보고는 의아한 눈으로 혜라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말은 이내 부드러워졌다. "아..말씀하세요." "저..어...백열등이 말이에요, 반짝이는 백열등도 있어요?" "아..백열등도 전선에 타이밍 스위치만 연결하면 반짝거리죠, 하지만 그러면 수명이 짧아져요, 백열등은 전기를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쉽사리 나가죠, 그래서 반짝이는 등은 이렇게 작은 전구 를 많이 이용하죠." 사내는 손으로 작은 전구들을 가리켰다. " 그게 아니고 집안에, 말하자면 천장에 설치된 백열등이 반짝 일 수 있냐는 거예요." "글쎄요...형광등은 스타트 전구가 있어 불을 켜면 처음에 반짝 이지만 백열등은 불을 켜면 바로 들어오는데..." 사내는 고개를 갸웃 거렷다. 혜라는 자신이 생각해 본 상상이 어긋나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가게를 막 나서는 혜라를 향 해 주인은 그제야 생각 난 듯 혜라를 불러 세웠다. " 이봐요, 아가씨...아...아니, 순경...참... 아가씨같이 예쁜 여자가 수사관인 것은 처음이라 뭐라고 불러야 할지...." " 아저씨 편하신 데로 부르세요." " 저..그럼 아가씨 이제 생각났는데, 우리 가게에는 없지만 백 열등이 수명이 다돼가면 몇 차례 반짝이는 제품이 나왔다는 얘기 를 들은 적이 있어요, 말하자면 백열등이 나가기 전에 알려주는 제품이죠." 혜라는 사내의 말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자신의 상상이 맞고 있었다. 혜라는 서둘러 집으로 달려왔다. "여보세요, 공업 진흥청이죠?" "네, 그렇습니다, 어디를 찾으세요?" "네, 전열기구를 담당하는 부서를 찾는데요." "기다리세요." 전화를 받은 안내원은 사무적인 말씨로 대답하였다. "여보세요, 전열기구를 담당하는 부서가 맞습니까?" 혜라의 직접적인 물음에 상대방은 신분을 물어오고 있었다. " 아...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그만...저는 검찰 특수부의 장 혜라 경사입니다. 궁금한 사항이 있어 문의를 드릴까해서..." "아..그러세요, 말씀하세요." "저...혹시 그곳에서 외제 전열 기구도 담당합니까? 말하자면 백열등 같은 전구들도..." "네, 저희가 수입되는 전열기구나 각종 전구들도 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수입 백열등 중에 수명이 다되면 반짝이는 전구가 있습 니까?" "음...수입품에는 그런 백열등은 없습니다, 국내의 업체에서 작 년에 개발 된 제품 중에 그런 백열등이 있습니다." "네, 정말 이세요." 혜라는 기쁜 마음에 큰 소리로 물어 보았다. 사내의 대답은 백 열등을 전문으로 만드는 중소기업 중에 수명이 다해 가면 백열등 에 부착 된 센서가 등의 교체 시기를 알리기 위하여 일 분 동안 점멸 한다는 대답이었다. "저..죄송하지만 그 중소기업의 사업장 주소를 알 수가 없을까 요?" "네, 잠시 기다리세요." 잠시 후 사내가 알려준 주소는 경기도 안산이었다. 사내에게 안 산이라는 말을 들은 혜라는 박 기자의 낙서에서 안산이라는 글을 본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혜라는 박 기자의 낙서를 헤집어 보았다. 한 장의 종이에 수많은 글이 적혀 있었다. 그 중에 안산이라는 글이 분명 히 있었다. 혜라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혜라는 고등학교 동창인 정애를 떠올리고 전화를 걸었다. 정애 는 미국에서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다 귀국하여 한국 과학 기술원 (KAIST)에 근무하고 있었다. 혜라가 미국에 있을 때 시간이 나면 만나고 하였다. "야...장 혜라, 니년이 웬일이냐, 전화를 다하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미친년, 인사가 겨우 그거냐?" "그래 이년아, 어쩌면 그렇게 연락도 안하냐, 정 떨어지게..." 정애는 예나 지금이나 성격이 걸걸 하였다. 그런 걸걸한 성격 때문인지 정애는 맞선을 여러 번 보았으나 지금껏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중매쟁이의 말에 의하면 여자가 너무 똑똑해 신랑감들이 부담스러워 한다는 얘기였다. "미안해, 바빠서 그랬어." "처녀가 뭐가 바빠, 너 시집 가냐?" "미친년, 별소릴 다하네." "야 다 늙은 처녀에게 시집만큼 바쁜 게 어디 있냐?" "그런 너는 안 늙었냐?" "너야 늙어도 얼굴이 반반하니 가망이 있지만 나야 니가 알다시 피 몸매가 좋으냐, 얼굴이 잘났냐...난 포기하고 산다." "잔소리 그만하고 나 좀 도와줘." "뭘 도와달라는 얘기야...남자 빼고는 뭐든지 도와줄게." "정애야, 비디오 테이프에 한 장면을 크게 사진으로 만들 수 있 냐?" "물론이지." "그런데 이 테이프에 정밀한 복제 방지 프로그램이 설치되었 데." "그래....음....좌우지간 가져와 봐, 그거 하나 못하면 미국에서 그 고생하며 박사학위 받은 보람이 없겠지." 혜라는 전화를 끊고 문제의 테이프를 가지고 정애에게로 달려갔 다. "무슨 내용의 테이프야?" "저기...그게...말이야..." "야...왜 말을 못해..." 혜라는 낮 뜨거운 장면이 나오는 포르노 테이프라는 얘기를 정 애에게 말하기가 쑥스러웠다. 하지만 어차피 도움을 얻자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이게 말이야..." "나..참 답답하게 만드네, 야, 이거 포르노 테이프냐?" 혜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애는 소리내 며 웃어 되었다. "어이구...흐흐..야..배꼽이 떨어지겠다, 야...우리가 아무리 혼 자 살지만 20대 청춘이냐....이제는 너나 나나 30이야, 이 순진 한 아가씨야." 정애는 한참을 웃다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혜라를 쳐다보았다. "야, 니가 경찰이라는 사실이 의심스럽다...이렇게 순진해 가지 곤...어느 장면이야?...근사한 남자의 연장이라도 되냐...사진으로 만들어서 니방에 붙쳐 두려고?" "장난 그만 해, 나비의 향연이라는 테이프야." "뭐, 나비의 향연?...그 테이프가 너한테도 갔냐?" "나한테 오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혜라는 정애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다그쳐 물었다. 정애의 말 에 따르면 몇 달 전부터 자신의 개인 우편함에 한 달에 한 개의 테이프가 발신지도 없이 배달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처음에는 호 기심에 집에 가져가 보았지만 왠지 자신의 처지를 조롱하는 기분 이 들어 우편함에 새로운 테이프가 들어와 있어도 가져오지 않았 더니 지난달부터 배달이 끊어졌다는 얘기였다. "테이프가 배달되고 누군가가 너에게 접근을 하지 않았니?" "아니...그건 왜?...누가 내가 혼자 사니깐 장난치려고 하였겠 지...뭐." 혜라는 정애의 말을 곰곰이 생각 해 보았다. 정애는 혜라가 건네주는 테이프를 비디오 카세트에 넣었다. 그 리고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전선을 비디오와 연결하자 컴퓨터의 모니터에 나비의 향연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애는 컴퓨터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점검하며 실험을 한 동 안 하였다. "혜라야, 이거 장난이 아닌데." "무슨 소리야?" "꽤나 까다로운 프로그램이 접근을 막고 있는데....하지만 잠깐 만 기다려 내가 누구니...명색이 컴퓨터 공학 박사 아니냐." 정애는 두 시간 가까이 컴퓨터와 씨름하더니 프린터로 문제의 백열등을 뽑아내었다. 프린터로 출력된 사진은 조금 흐릿했지만 백열등을 식별하는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정애와 헤어진 혜라 는 안산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점심이라도 함께 하자는 정애의 호의를 무시하고 나왔다. 혜라의 마음은 조급했다. 백열 등의 출처지를 확인하는 길이 급선무였었다. 백열등을 만드는 공장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혜라의 신분을 확인 한 공장의 전무는 공장장을 불렀다. "공장장, 이 사진을 자세히 보게나, 거기 보이는 등이 우리 것 같은데 공장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공장장은 천천히 사진을 보고 있었다. 혜라는 도움을 주기 위하여 공장장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하였 다. " 그 사진에는 안 나오지만 원래는 그 백열등이 반짝이고 있는 거예요, 그 사진은 비디오 테이프에서 복사한 것이라 보이지 않 지만...." "비디오요....그..뭐냐...남녀가 그 짓 하는 비디오 말이에요?" "예, 알고 계세요?...보셨어요?" 혜라는 얼굴을 붉히며 창피함도 잊은 채 물어보았다. "네, 봤어요, 전무 님도 아시잖아요, 한 두달 전에 기자라는 사 람이 손수 TV와 비디오를 직접 들고 와서는 아래층 숙직실에서 남녀가 그 짓 하는 모양의 비디오를 보여주며 백열등이 우리 것 이 맞냐고 했던 것 기억 안 나세요?" "그래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는군, 그 기자라는 친구 웃기는 친 구였지 그 무거운 TV를 손수 들고 예까지 찾아와서는 똑같은 장 면을 수없이 보여주며 확인을 요청했었지, 그럼 이 사진이 그 기 자가 보여줬던 테이프에 있던 사진인가?" 전무와 공장장의 말을 들은 혜라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죽은 박 기자의 행보를 그대로 따라 걷는 섬짓한 느낌이 들었다. "이 사진에 나와있는 전구는 저희 회사에서 작년에 개발한 특허 제품이 맞아요." 박 기자가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알고자 노력했던, 그래서 밤마 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 듯이 적어 놓았던 등이라는 단어 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혜라는 결국에 백열등의 감춰진 비밀을 쫓아 이곳까지 다녀간 박 기자의 집념에 머리를 숙였다. "틀림없습니까?" "네, 틀림없어요, 우리가 개발한 제품을 우리가 왜 모르겠어 요." "그럼 혹시 이 회사에서 개발한 이 백열등을 일본에 수출하지 않았나요?" "허...참, 아가씨도 그때 그 기자와 똑같은 질문을 하네요, 일본 과 유럽 쪽에 특허를 내놓은 상태이지만 아직은 국내 수요도 감 당치 못해서 수출은 올 가을에 시작 할 계획입니다." "그럼, 이 백열등이 설치 된 이 사진은 국내에 있는 건물일 가 능성이 크네요." "네, 거의 확실합니다." 헤라는 공장을 빠져 나와 서울로 향하면서 착잡한 심정에 빠져 들었다. 자동차에 TV와 비디오 레코드를 싣고 안산으로 달려와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진 기쁨에 들떠있을 박 기자의 모습이 눈 에 보이는 듯 하였다. 직업은 달라도 기자와 수사관의 공통점은 사건을 쫓아다닌다는 현실은 똑같은 처지였다. 그래서 혜라는 박 기자의 죽음에 애틋 한 연민의 정이 들었다. 혜라는 서울로 향하는 중간에 특수 부로 전화를 걸었다. 박 경감은 잔뜩 화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연락을 하여도 연락 이 되질 않으니 어디 가서 놀고 있는 것이냐고 언성을 높였다. 혜라는 그제야 자신이 급한 마음에 호출기도 빠뜨리고 집을 나 선 사실을 발견하였다. 혜라는 자신의 실수를 사죄하고 안산에 내려온 이유와 박 기자의 낙서에 적혀있던 등이라는 단어의 실체 를 간략하게 설명을 하였다. 혜라의 말을 들은 박 경감은 놀라고 있었다. 사실 박 경감은 장 혜라가 똑똑하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박 기자의 수사 현장에 여자 를 내보내기가 왠지 거북하여 박 기자의 낙서를 장 혜라에게 맡 겼던 것이다. 그러한 장 혜라가 뜻밖에 사건 해결의 열쇠를 찾아낸 사실에 박 경감은 놀라움 뒤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장 혜라의 능력은 믿 고 있었지만 여자라는 편견은 쉽사리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박 경감은 요원들을 소집하고 상사인 부장에게도 보고를 하였 다. 혜라는 차가 밀려 오후 늦게야 특수부에 도착 할 수가 있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시간인데도 박 경감과 김 형사를 비롯한 대부 분의 요원들은 회의실에 앉자 장 혜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 이 놀라운 일은 평소 퇴근 시간이 정확하기로 유명한 오 부장 검 사도 함께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혜라에게 쏠려있었다. 혜라는 박 기자의 낙서에 서 보았던 등이라는 단어의 실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TV와 비디오를 준비하여 문제의 장면을 보면서 설명을 해 야만 하였다. 문제의 장면을 설명하려면 남녀의 섹스 장면을 요 원들과 함께 보아야만 하였다. 혜라는 쑥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조금 붉어졌지만 보다 정확한 사건 설명을 위하여 마음을 굳게 먹었다. 혜라는 문제의 화면을 몇 차례 반복해서 보여주며 문제의 장면 을 지적하였다. 주위의 모든 요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혜라의 예리한 관찰력에 탄복하고 있었다. 그 동안 요원들은 나비의 향 연을 수없이 보았지만 혜라가 찾아낸 문제의 화면을 보지 못 했 었다. 혜라는 TV의 화면을 끄고 추가적으로 안산까지 찾아갔던 결과를 보고를 하였다. "장 형사, 수고 많았어요, 이번에 아주 큰 일을 했어요." 부장의 칭찬에 혜라는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박 경감이 갑자 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곧 이어 요원들도 박 경감의 뒤를 따 라 박수를 쳤다. 박 경감의 박수는 진심으로 장 혜라의 노고를 위로하는 박수였다. 요원들도 장 혜라의 능력에 남녀의 벽을 허 물고 진심으로 격려의 박수를 치고 있었다. 특수 부는 수사의 방향을 두 갈래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하나는 장 혜라의 친구가 말했던 테이프의 배달 사건이었다. 과학기술원 의 개인 우편함에 문제의 나비의 향연이 지속적으로 매달 배달되 었다면 기술원내에 진리교의 신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 다. 박 경감은 김 형사를 주축으로 한 팀을 기술원으로 배정하였다. 그 팀에는 혜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한 팀은 박 경감이 직접 인솔하는 팀으로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은 광범위한 수사였다. 문제의 백열등이 개발된지 1 년이 조금 지났으니 나비의 향연이 촬영되는 진리교의 집회 장소 는 신축된지 1년이 조금 지났거나 아니면 1년이 안된 건물일 가 능성이 많았다. 박 경감의 팀은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신축 건물 에서 문제의 백열등을 사용한 건물을 찾아내야 하는 힘든 일을 맡고 있었다. 특수 부는 새로운 활기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혜라와 김 형사는 기술원에 상주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내노라하는 인재들을 상대로 진행하는 수사는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해야만 하였다. 혜라가 기술원에 상주한지 한 달이 지나고 있었지만 눈에 띄는 용의자는 보이질 않았다. 다만 친구인 정애와 마찬가지로 테이프 를 배달 받았던 인물이 정애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다. 김 형사는 기술원의 우편함을 두 명의 형사에게 24시간 감시토 록 하였으나 한 달이 지나도 수상한 인물이나 테이프의 출현은 없었다. 어쩌면 수사 팀의 정보가 빠져나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 다. 따뜻한 봄 햇살이 산자락을 감싸고 있었다. 공장의 굴뚝으로는 하얀 연기가 평화롭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공장 뒤편의 연구 동 은 햇살을 받아 유난히 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연구동의 이 층에 있는 회의실에는 제사장을 비롯한 진리교의 모든 사제들이 모여있었다. "기술원에 근무하는 한 신도의 제보에 따르면 경찰이 기술원을 상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검찰 특수부 애들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제사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무겁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부득이 이번 달 집회는 연기를 하였다. 각 구역의 전도 사들은 신도들이 동요되지 안토록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고, 당분간 포교 활동은 중단하도록 한다." " 형님, 그럼 당장 이번 달 집회의 촬영을 못하면 일본에서 가 만히 있겠습니까? 아마도 야마다가 난리를 칠 것이 뻔한 일인 데..." " 물론, 야마다는 관리를 어찌 했냐고 난리를 치겠지, 하지만 나비의 향연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여도 안전 이 우선이지, 야마다는 지금 우리의 처지를 모르고 있으니, 정 야단을 치면 우리의 상황을 알려야지....하지만 될 수 있으면 조 용히 넘어가는 것이 조직의 입장에서 좋을 듯 하다." "맞습니다, 괜히 야마다에게 약점 잡힐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조사한 바로는 특수부가 알고있는 사실은 그렇게 걱정 을 안해도 좋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네, 특수부의 손길은 기술원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냄새를 맡고 기술원을 조사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직은 우 리 신도들의 정체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확실한가..?" "네, 확실합니다 형님." 제사장은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다. "형님, 다음 달까지 사태를 주시하고 다음 달 집회는 기술원의 신도들만 제외시키고 진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기술원이 마 음에 걸리시면 아예 기술원에 있는 우리 신도를 잠수 태우던지 요." "기술원에 우리 신도가 몇 명이 있지...?" "두 명이 있습니다, 한 명은 유전자 공학에 있고, 다른 한 명은 식품 공학 연구원으로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의 믿음 정도는...?" "두 사람 모두 광적입니다, 아마도 형님의 말이라면 죽음도 불 사할 정도입니다." "형님, 제 생각인데 두 사람은 아직 특수부에 노출이 되지 않은 상황이니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자칫 그들을 없애는 과정에서 실수라도 한다면 우리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으니 그 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죠, 아마도 그들은 형님의 은총으로 본당 에서 살게 된다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 할 겁니다." 제사장은 한 사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이 죽던 사라지던 그들의 모습이 기술원에서 사라지면 특수부는 그들의 실종에 수사를 집중 할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자객열전 ♠♠ 제 3 장 요시코의 죽음 ♠♠ 요시코와 사내는 카고시마에서 삼 일을 보냈다. 사내는 난생처음 마음속의 긴장을 떨쳐버리고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한 쌍의 신혼부부처럼 해변을 걷기도 하고, 온천 지에서 물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요시코는 더욱 더 사내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세상의 어떠한 난 관도 사내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카고시마에서의 삼 일은 요시코와 사내를 떨어질 수 없는 연인의 사이로 만들어 놓았다. 사내는 카고시마에서 삼 일을 보내고 기차 편으로 도쿄로 올라 왔다. 도쿄에 기차가 도착 한 시간은 저녁이었다. 사내는 일부러 저녁에 도착하는 기차 편을 준비하였다. 사내와 요시코는 화려한 네온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도쿄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사내는 공중전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무슨 전화예요?" "응, 우리가 함께 먼 나라로 떠나려면 이 친구의 도움이 필요해 서...." 사내는 간단하게 말을 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사내가 찾아 간 곳은 유흥업소가 밀집한 도쿄의 환락가였다. 사내는 화려한 네온으로 치장한 업소들을 뒤로하고 골목으로 들 어섰다. 좁은 골목길을 조금 걸어가던 사내는 2층의 목조 건물 앞에 멈추었다. 2층으로 통하는 나무 계단 입구에 인터폰이 있었 다. 사내는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세요?"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인터폰에서 흘러 나왔다. "나요, 이시다." "아...이시다 선생, 어서 올라오세요." 사내의 이름은 어느새 이시다로 변해 있었다. 사내는 요시코를 향 해 잠깐 웃어 보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실내는 어두웠다. 다다미를 깔아놓은 실내 의 중앙에는 마사지용 침대가 놓여있었다. 침대에는 젊은 여자가 하체를 벗고 누워 있었다. 요시코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고개를 숙였다. 누워있는 여자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시다 선생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끝나요." 사내의 손에는 가느다란 바늘이 들려 있었다. 사내는 바늘에다 물감을 찍어 여자의 그 곳에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문신을 새기는 여자는 주위의 시선에는 관심이 없는 듯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보란 듯이 내놓고 있었다. "자...이제 끝났습니다." 여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벽에 붙어있는 거울로 다가가 새겨진 문신을 비쳐 보고 있었다. 여자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사내에게 돈을 건네고는 사라졌다. "여기 술집에 근무하는 아가씨죠, 제들은 얼굴이 두꺼워 남의 눈을 의식 안해요, 심심풀이로 문신을 해주고 있는데 저렇게 문 신을 하는 것이 유행인 것 같아요." 사내는 요시코를 의식한 탓인지 필요 없는 설명을 하였다. "이시다 선생,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렇군요, 그 동안 잘 지냈습니까?" "네, 저야 늘....선생이 아니었으면 죽은목숨인데 이렇게 사는 것도 감사할 일이죠, 언제나 선생의 은혜는 잊지 않고 있습니 다." "또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군요." "아...죄송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여권이 필요합니다, 두 장이..." 사내는 요시코와 자유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선생이 쓰실 거라면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야하니 내일 오후 정 도면 되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시작 하실 수 있습니까?" "네, 물론 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일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실 겁니까?..아가씨도 있는데 웬만하면 호텔에 가셔서 푹 쉬시다가 내일 오시는 것이..." "우리는 상관치 마세요, 그리고 이시다 선생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고 제 성격이 그러니 이해하세요." "어련하시겠습니까, 천하의 이시다 선생이..." 사내는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사내와 요시코 그리고 자유인은 일을 하기에 앞서 저녁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사내는 두 사람을 규모가 큰 전통식당으로 안내했다. 사내의 모 습은 두 사람을 극진히 모시고자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요시코는 사내가 여권이 완성되는 내일 오후까지 2층집에서 움 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하였다. "저...선생님, 내일까지 선생님이 이시다 선생님의 집에 계신다 면 어디 좀 다녀와도 괜찮겠습니까?" "어디를..? 불편해서...?" "아...아니에요, 불편해서가 아니라 도쿄에 아는 언니가 있어 서...하도 본지가 오래돼서...그냥...선생님이 신경 쓰이시면 안가 도 됩니다." 요시코는 말을 하고는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사실 도쿄에 는 아는 언니가 없었다. 옆에 있던 야스게가 조심스럽게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저...선생님, 저희 집은 좀 지저분한데 웬만하면 아가씨는 다른 곳에 있다가 내일 오시는 게 어떨까요?" 사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요시코를 쳐다보며 말을 하였다. "요시코, 내가 걱정하는 것은 너의 안전이다." "네, 선생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내는 똑똑한 요시코가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그럼, 언니에게 갔다가 내일 오후까지는 이곳으로 돌아오기 바 란다, 무엇보다 신변에 각별히 조심하고...." 요시코는 자신을 걱정하는 사내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사내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하고 있었다. 일행은 식사를 맞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간단한 부식을 준 비하였다. 사내는 여권이 만들어지는 내일까지 야스게의 집에서 꼼짝을 안 할 자세였다. 집으로 들어선 야스게는 안채로 일행을 끌고 갔다. 안채의 후미 진 골방에는 수 십 가지의 가발과 안경, 의상들이 있었다. 야스게는 여권 사진을 찍기 위해 적당한 가발과 의상을 사내와 요시코에게 입히고는 분장을 하였다. 거울에 보이는 요시코의 이 미지는 쌀쌀맞아 보이는 여자로 변해 있었다. 기숙사의 늙은 사 감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내의 모습은 조금 어수 룩해 보이지만 사람 좋은 분위기의 얼굴에 커다란 점이 박혀있는 사내로 탈바꿈하였다. 사내의 볼에 붙어있는 커다란 점은 얼마나 정교한지 가까이 서 보아도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분간키 어려 웠다. 야스게는 준비된 카메라로 사내와 요시코의 여권 사진용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요시코는 사진을 찍고 사내의 배웅을 받으며 야스게의 집을 나 섰다. 집을 나선 요시코는 서둘러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다행히도 10시에 출발하는 삿포로 행 기차표를 끊을 수 있었다. 기차가 출발하자 요시코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밀려 왔지만 애 써 자신을 다독 거렷다. 새벽이면 삿포로에 도착 할 수가 있었 다. 요시코는 잠이 오질 않았다. 창 밖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외딴 농가의 불빛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요시코는 새벽에 기 차가 삿포로에 도착하면 유모에게 전화를 걸어서 반지를 가져오 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반지를 떠올리자 코끝이 찡하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10년 전 전기 합선으로 보이는 화재로 요시코의 부모와 남동생은 고통스 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화재가 일어났던 그 날 요시코는 방 송국의 야간 촬영 때문에 다행히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요시코를 어려서부터 돌봐주던 유모도 그 날은 자신 의 집으로 돌아갔기에 죽음을 피할 수가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님은 아버님이 끼고 계시던 반지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아버님이 끼고 계시는 반지는 어머님이 할머니에게 물려 받은 반지로 요시코가 결혼을 하게되면 남편 될 사람에게 전해지 는 반지였다. 요시코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결혼을 하면 남편 의 손에 끼어있던 반지는 사위에게 전해지는 대물림의 증표였다. 야스게가 내일 오후에 여권을 완성하면 자유인은 곧 바로 일본 을 떠나 머나먼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로 떠날 계획이었다. 사 랑하는 사람을 쫓아 일본을 떠나는 요시코에게 가장 아쉬운 것은 재산도 명예도 아니었다. 비명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시신에서 찾 아낸 빛 바랜 반지였다. 사실 문제의 반지는 먼 옛날에 만들어진 탓에 모양도 투박하고 값어치도 없는 볼품없는 반지였다. 그래도 요시코는 부모님의 반지를 사내의 손에 끼워주고 싶었다. 그러한 바램은 요시코가 진정한 사내를 만나면 해주고 싶었던 오래된 바 램이었다. 사내가 염려하는 위험을 요시코도 잘 알고 있었다. 요시코는 유 모에게 부탁하여 반지를 믿을만한 다른 사람에게 전달시키고 안 전유무를 확인 한 뒤에 반지를 가져오려는 계획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반지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포기하고 도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삿포로에 도착 한 요시코는 춘설에서 함께 근무하던 친구에게 전화를 하였다. 친구는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전화를 받은 친구는 요시코의 입장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갑자기 연락 이 안돼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요시코는 친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유모가 반지를 가져오면 그 것을 가지고 시내로 나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뒤따르는 사람 이 없다고 판단되면 둘만이 아는 장소로 오라는 부탁을 하였다. 친구와 전화를 끊은 요시코는 유모에게 전화를 하였다. 전후 사 정을 들은 늙은 유모는 흐느끼고 있었다. 요시코도 눈물이 솟았 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유모는 요시코에게 부모와도 같은 존재였다. 유모는 요시코와의 통화를 끝내고 곧 바로 집을 나섰다. 혼도 의원의 살인 사건을 담당하는 수사본부에 갑자기 긴장감이 돌았다. 혹시나 요시코의 유모에게 요시코가 연락을 할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전화를 도청한 수사본부의 예측이 들어맞았다. 요시 코의 전화내용을 도청한 수사부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화 의 내용에서 확인한 친구의 주소지로도 형사 대를 급파하였다. 동경에서 내려온 형사 과장은 요시코가 나타날 때까지 미행에 철저한 주의를 하라고 전 수사 요원에게 단단히 지시를 내렸다. 도청 사실을 모르는 유모는 허둥지둥 요시코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모의 뒤로는 허름한 노동자 스타일의 형사가 뒤쫓고 있었다. 요시코의 집에 도착 한 유모는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집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미 연락을 받은 잠복 형사들은 유모의 집 안 출입을 막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어선 유모는 요시코의 침실에서 문제의 반지를 찾았 다. 반지를 손에 든 유모는 슬픔에 겨워 반지를 가슴에 끌어안았 다. 집을 나선 유모는 요시코가 알려준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유모에게 반지를 건네 받은 스지미는 옷을 갈아입고 시내로 향 했다. 스지미는 길을 걸으면서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 는 서너 곳의 상가를 걸쳐서 버스를 타고 요시코와 자주 가던 카 페로 향했다. 스지미가 버스에 오르자 형사 대는 둘로 나뉘어 한 조는 버스에 오르고 한 조는 차량을 이용해 버스의 뒤를 쫓았다. 스지미는 버스에서 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두 명의 남자는 갈 길이 바쁜지 빠른 걸음으로 지하도를 향 해 걸어가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부근에는 아무도 없었다. 버스 뒤에 서 있던 승용차 한 대가 정류장을 조금 지나쳐 정지하더니 뒤 트렁크를 열고 짐을 내리고 있었다. 스지미는 요시코의 당부로 조심스럽게 주위를 관찰했지만 의심 이 갈만한 구석은 찾을 수가 없었다. 스지미는 안심하고 카페에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린 두 명의 형사는 어디서 구했는지 청소원 복장을 하고 카페 앞 인도를 청소하고 있었다. 승용차로 버스의 뒤를 쫓 았던 형사 대는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던 한 명의 형사를 남겨두 고 길 건너 편 사무실 창가에 몸을 숨기고 스지미가 들어간 카페 를 주시하고 있었다. 카페는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스지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실 내에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스지미는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전화 벨이 울리고 주인 여자가 스지미 를 불렀다. "여보세요." "스지미, 나야." "요시코, 어디 있어?" "응, 근처에...오는데 수상한 사람은 없었어?" "없는 것 같아....집을 나오면서부터 계속 주위를 살폈는데 아무 도 없었어." "확실하지?" "그런 것 같아." "금방 갈게, 기다려." 스지미는 전화를 끊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가슴이 두근거리 고 있었다. 청소를 하던 형사의 눈에 지하도를 올라오는 여자의 모습이 눈 에 들어왔다. 여자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머리를 단 정하게 묶은 모습이 퍽이나 까다롭게 보였다. 수수하지만 단정한 옷차림에서 풍겨 나오는 그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학교 선생이 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엘리트 여성으로 보였다. 여자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앞을 지나가자 청소원으로 변장한 형사는 그녀의 뒤 모습을 쳐다보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규칙 적으로 움직이는 엉덩이가 눈을 자극하고 있었다. 여자의 뒤 모 습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형사는 여자의 벗은 모습을 떠올려 보 았다. 완벽한 몸매의 나신이 그려졌다. 형사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지는 순간 길을 걷던 여자는 카 페로 들어가고 있었다. 형사대는 긴장하고 있었다. 수사 본부에서 수없이 보았던 요시코의 각종 사진을 떠 올려 보 았지만 방금 들어간 여자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변장을 했을 수도 있으므로 형사 대는 커다란 창으로 카페의 실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스지미는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 는 차가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던 스지 미는 여자의 얼굴이 낮이 익다고 생각하였다. 어디서 본듯한 얼 굴인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여자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본다면 생각이 떠오를 것 같았다. 커피를 주문한 여자는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커피를 마 신 여자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실내에 있는 공중전화로 다가 갔다. 전화 벨이 울리자 주인 여자는 스지미를 불렀다. "여보세요." "스지미, 나야." "어디야?...금방 온다더니 어찌 된 거야?" 요시코는 자신을 몰라보는 스지미가 둔하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아무래도 야스게의 분장 실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앞섰다. 실제 로 거울 앞에 비쳐본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야스게의 분장은 완벽했다. 요시코는 자신이 이미 카페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스지미가 모르는 상황이고 혹시나 자신을 기 다리고 있을 수도 있는 수사진을 염두에 두고는 자신의 위치를 스지미에게 알리지 않았다. "미안해, 아무래도 불안해서...스지미, 지금 화장실로 가서 휴지 통이 있으면 그 밑에 반지를 넣어죠." "뭐라고, 그건 왜?" "혹시 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럼 반지는 누가 가져가게?" "지금 그 카페에 한 여자가 전화를 하고 있지, 그 여자가 내게 가져 올 거야." 스지미는 공중전화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등을 돌리 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스지미는 알 수 없는 음모에 자신이 가담하는 것 같은 불안함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디선가 자신의 행동을 누군 가가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스지미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자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힐 끔 여자를 보았지만 여자는 담배를 피우며 수족관의 열대어를 쳐 다보고 있었다. 카페의 건너편 사무실 창가에 자리한 형사대의 팀장은 마음이 조급하여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여자는 요시코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요시 코가 변장을 하였다해도 스지미가 저렇게 모를 리는 없을 것 아 닙니까?" "그러게, 스지미의 태도는 여자를 전혀 모르는 눈치잖아..." "아직은 요시코가 안 나타난 것 같습니다." 스지미가 화장실에 다녀온지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여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 화장실에 들어선 요시코는 휴지통을 들어보았다. 휴지로 쌓여있 는 반지를 발견한 요시코는 반지를 주머니에 넣고 화장실을 빠져 나왔다. 화장실에서 나온 여자는 자리에 조금 앉아 있다가 카페를 빠져 나갔다. 여자가 카페에서 나오자 말쑥한 정장 차림의 사내가 여자의 뒤 를 따르기 시작했다. 여자가 카페를 빠져나가자 스지미는 화장실로 달려가 휴지통을 들어보았다. 자신이 휴지에 감싸서 놓아두었던 반지가 없었다. 스지미는 불안한 마음에 더 이상 카페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스지미가 서둘러 카페를 나오자 두 명의 형사가 그녀의 뒤를 쫓 기 시작했다. 형사대의 팀장은 판단을 내려야 했다. 팀장은 요시코의 뒤를 쫓 고있는 형사를 불렀다. "지금 어디쯤 가고있나?" "네, 지하철을 타러 가는 듯 합니다." "아무래도 그 여자가 요시코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요원을 그쪽으로 보낼 테니 도착하면 검거해, 절대 혼자 일을 벌리지 말 고.... 뒤 만 쫓아...위치는 수시로 보고하고, 알았어?" 팀장은 다른 형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형사는 요시 코가 사라진 방향으로 빠르게 뛰어가고 있었다. 그 뒤를 팀장이 쫓아가기 시작했다. 요시코는 걸음을 빨리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쫓고있는 느낌이 들었다. 요시코는 지하철과 연결 된 지하 도를 내려서다 전면에 있는 대형 거울을 발견하고는 거울을 향 해 급히 걸어갔다. 거울 앞에 도착 한 요시코는 거울에 비친 뒤 모습을 살펴보았다. 정장 차림의 사내가 황급히 걸음을 멈추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 이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많은 사람의 오고가는 모습이 보였지 만 요시코는 사내의 당황한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요시코는 가슴이 뛰고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만약 경찰이라면 어떻게 자신을 알았 는지가 궁금하였다. 유모나 스지미가 경찰에 신고를 하였다면.. 요시코는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의 추측을 부정하고 있었다. 요시코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미행자를 떨쳐버릴 기회만을 찾 았다. 지하철 표를 끊은 요시코는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한 대의 지하철이 승강장을 막 출발하고 있었다. 요시코는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조금은 위험하지만 지하철이 승강장으로 들어 서는 순간에 철로로 뛰어내려 건너 편 승강장으로 도주할 생각이 었다. 그러나 그런 계획은 위험한 일이었다. 미행자의 손에서 벗 어나려면 지하철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뛰어 내려야만 미행자가 따라올 수 없었다. 정장 차림의 사내는 여자가 자신을 발견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 다. 팀장의 지시가 아니라면 여자 한 명을 체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는 생각을 하면서 합류할 동료를 불렀다. "어디야?" "헉..헉 바로 자네 뒤야..헉...헉" 숨찬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려오자 사내는 뒤를 돌아보았다. 동료 형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로 뒤에 다가와 있었다. "빨리 여자의 앞으로 가라고 여자가 눈치를 챈 것 같아..." 달려온 사내는 곧바로 요시코를 지나쳐 승강장의 맨 앞에 서 있 었다. 승강장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내는 무전기로 체포의사 를 보냈다. "지금 덮치지.." "알았어." 정장 차림의 사내가 걸음을 급히 하며 요시코에게 접근하는 순 간 요시코는 갑자기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전철을 향해 달리기 시 작했다. 요시코의 눈에 놀란 사내의 모습과 사내가 내지른 고함 소리가 들렸다. "잡아..." 요시코의 몸이 허공으로 뛰어 오르고 있었다. 전철의 운전석에 서있던 기관사의 놀란 눈이 보였다. 요시코의 몸이 허공에 떠있는 그 사이 요시코는 자신의 옆구리 를 감싸는 손이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철로로 향하던 자신의 몸 이 강한 힘에 끌려 승강장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승강장 앞쪽에 서있던 형사는 여자가 달려오는 전철로 뛰어들자 무의식 적으로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것은 찰나간에 이 루어진 행동이었다. 형사는 요시코를 감싸 안은 채 승강장 바닥 에 나뒹굴었다. 정장 차림의 사내가 발버둥치는 요시코를 덮쳐 눌러왔다. 두 명 의 사내는 요시코의 양팔을 비틀어 잡고는 바닥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여러 명의 사내들이 요시코의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요시코의 눈에 자유인의 모습이 보였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요시코는 두 명의 사내에게 들리다시피 하여 끌려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 다. 요시코는 삿포로 경찰서에 임시로 만들어진 특별 수사본부로 옮 겨져 왔다. 수사본부는 요시코의 검거로 상당히 들떠 있었다. 수사본부에 상주하고 있던 취재 기자들은 요시코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기자들은 혼도 의원의 살인 사건과 관계가 있는 여자 용의자가 검거되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다. 요시코의 취재는 경찰의 단 속으로 취재가 불가능하였다. "네, 부총리 실입니다." "나, 경찰청장인데...부총리님 계신가?" "네,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비서는 전화를 부총리에게 돌렸다. "장군님, 접니다." "그래, 자네가 무슨 일인가?" "장군님, 그 여자아이가 잡혔습니다." "여자아이라면....그 요시코라는 아이 말인가?" "네, 장군님, 오늘 삿포로에서 검거되었다는 보고가 방금 있었 습니다." "자유인은..?" "여자아이 혼자인 것 같습니다." "그래...언제 도쿄로 오게 되는가?" "네, 삿포로 경찰서의 기본적인 조사가 끝나는 내일 저녁에 이 송할 예정입니다." "알았네, 변동이 있으면 신속히 알려주게." 뚱뚱한 체격의 부총리는 전화를 끊고 비서를 부르지 않고 손수 전화를 걸었다. "오야봉 있는가?" "네, 장군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화를 받은 야마다는 황급히 오야봉의 사무실로 전화를 돌렸 다. "장군님 전화 바꿨습니다." "오야봉, 그 여자아이가 검거되었네." "여자라면....그 자유인과 함께...." "그래, 오늘 삿포로에서 검거되었다는 소식일세, 지난번에 얘기 했던 아이들은 준비되었나?" "네,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삿포로로 출동시키게, 내일 밤이나 이송이 시작 될 걸세." "알겠습니다, 장군님." "실수 없도록 신경 쓰고 절대 흔적을 남기면 안되네." "명심하겠습니다." 오야봉은 야마다를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요시코를 납치할 조직 을 삿포로로 급히 출발 시켰다. 야스게는 두 사람의 여권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다. 전문가가 보아도 야스게가 위조한 여권은 분간키 어려울 정도였다. 자유인은 여권을 받아들고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시다 선생, 여권을 새로이 만드시는 것을 보니 이제는 이시 다 선생을 보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잘 보셨습니다, 이제는 이 바닥을 영원히 떠날 생각입니다." "그러셨군요, 그럼...그 여자 분은?" "네, 같이 떠날 여자입니다, 아마도 평생을 같이 할 여자입니 다." "이시다 선생, 정말 잘 생각 하셨습니다, 축하 드립니다." 야스게는 자유인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자유인을 쳐다보는 야 스게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혀있었다. 자유인도 야스게의 손을 힘 주어 잡았다. 뜨거운 사나이의 정이 흐르고 있었다. 창 밖으로 어둠이 내려도 요시코는 돌아오질 않았다. 불안한 야 스게는 방안을 서성거리며 자유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자유인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연신 피우고 있었다. 야스게는 자 유인이 그토록 초조해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자유인의 의식 속에는 삿포로에 있는 요시코의 집이 연이어 떠 오르고 있었다. 자유인은 요시코가 도쿄에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요시코는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중요한 사연 이 있어 삿포로로 갔을 것 같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여자의 심 리에 대하여 잘 알 수는 없지만 여자들에게는 자신의 생명과도 맞바꿀 만큼 아끼는 물건이 한 두 개는 꼭 있다는 얘기를 언젠가 멕시코의 여성에게 들은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요시코에게도 생명처럼 아끼는 물건이 있었다면.....생각이 여 기에 미치자 자유인은 더 이상 야스게의 집에서 요시코를 기다리 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야스게, 아무래도 요시코는 삿포로에 있을 것 같소." "네, 요시코양은 도쿄의 언니 집에 간다고 했잖아요." "아니요, 틀림없이 요시코는 도쿄에 없어요." "그럼....." "야스게, 휴대용 전화가 있으면 빌려주세요, 그리고 내가 떠난 뒤 요시코가 찾아오면 바로 전화를 주세요." 자유인은 안채로 들어가 야스게의 소품 중에 변장에 필요한 물 건들을 가방에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자유인은 서둘러 도쿄 역으로 향했다. 삿포로행 열차를 타려면은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자유인은 지 하에 있는 상가를 찾았다. 옷가게에서 수수한 옷을 구입한 자유 인은 역 근처의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방에 들어선 자유인은 황급히 분장 가방을 열고 분장을 하였다. 여관의 출입문을 지키고 앉아있던 중년의 주인 여자는 방금 카 운터 앞을 지나 밖으로 나가는 노인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 거렷 다. 여관에 숙박한 손님 중에는 나이 먹은 노인이 없었다. 주인 여자는 이상한 기분에 연신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여관에서 노인으로 분장한 자유인은 역으로 향하는 도중에 상점 에 들러 곶감을 한 꾸러미 샀다. 열차에 오르자 열차는 화려한 도쿄의 네온을 뒤로 한 채 어둠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태양이 모리 산의 정상을 넘어서자 골목길에 잠들어있 던 어둠이 부시시 눈을 뜨고 천천히 도망가고 있었다. 신흥 부촌의 비탈진 언덕길을 초로의 노인이 힘겹게 오르고 있 었다. 노인의 손에는 작은 보자기가 들려있었다. 요시코의 집을 지키고 서있는 두 명의 경찰은 쌀쌀한 날씨에 잔 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봐, 아직 교대시간 안됐어..?" "아직 1시간이나 남았어." "시간 되게 안가네, 그나저나 이 집 여자도 잡혔는데 여긴 뭐 하러 지키는지 알 수가 없어...." "낸들 알아, 그런데 말야, 알다가도 모를 일이 왜 요시코양이 그런 살인범하고 도주를 했을까?" "여자들 속을 어찌 알겠어...그 자식이 밤일을 잘하나보지..." "후후후...밤일...좋지..요시코양 같으면 밤마다 코피를 쏟아도 원이 없겠다." "꿈같은 얘기지...우리 같은 말단 경찰을 어디 거들 떠나 보겠 어..그런데, 자네 말야 지난번에 절도죄로 현장에서 붙잡은 계집 애 정말 그냥 보냈어?" "아...참, 이 사람아, 그럼 그냥 보내지 나이도 어리고 초범인 데..." "에...이, 전혀 모르는 애를 그냥 현장에서 풀어줬단 말야?" "이 사람은....사람 입장 곤란하게..." "사실대로 말해봐 심심한데..." "사실은 훔친 물건도 별거 아니고...잡아넣어 봐야 어린애 신세 만 망칠 것 같아 보내줬어.....본 사람도 없고 해서" "이 친구, 하하하...하하하.." 이야기를 하던 경찰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자 마주한 경찰은 의 아한 눈으로 웃고있는 경찰을 쳐다보았다. "아니, 갑자기 왜 웃고 난리야..." "하하하..이 친구야, 정신차려... 내가 나이가 얼마야, 다 거짓 말이야... 자네가 하도 심심해 하기에 한 번 해본 소리야." "뭐라고, 아니 이 친구가..." 이야기를 듣던 경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며 주 먹을 쥐고 흔들었다. 동료의 장난 주먹질을 피하던 경찰의 눈에 힘겹게 언덕을 올라 오는 노인이 보였다. 경찰의 눈이 노인에게 의아한 눈으로 멈춰 있자, 주먹질을 하던 경찰의 시선도 노인에게로 향했다. "왠 노인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몇 일을 이곳에서 근무를 하던 경찰의 눈은 이른 아침에 언덕을 걸어 올라오는 노인이 이상하게 보였다. 그들이 이 부촌에서 근 무를 시작한 이래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은 보기가 힘이 들 정도 였다. 모두가 자동차를 이용하고들 있었다. 그런 탓에 아침 일찍 부터 언덕을 오르는 노인네가 이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노인은 걸어오면서 집집마다 문패를 확인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노인은 가래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경찰나리, 이 근처에 요시코라는 아가씨의 집이 어딘지 아 슈?....그 뭐냐..탤런튼가 뭔가 하는 아가씬데, 일전에 한 번 왔 다 갔는데 영 찾을 수가 없으니...늙으면 기억력이 없어서..." 두 경찰은 노인의 입에서 요시코라는 이름이 나오자 조금은 놀 라는 눈치였다. "할아버지, 누구 신데 요시코양 집을 찾으세요?" "왜 아슈?....알면 가르쳐줘요." "그러니깐 가르쳐 드리려면 누구 신지 알아야 가르쳐 주죠." "나...원, 집 하나 가르쳐 주는데 누군지는 왜 알아야 한다는 거 요." 노인네는 의아한 눈으로 두 경찰을 둘러보며 짜증을 내고 있었 다. "이것 보세요, 할아버지, 이 동네 안 사세요?" "아...이 동네에 안 사니깐 집을 못 찾지...이거 촌에서 왔다고 사람을 무시 하는 건지...원.." "그게 아니고요, 할아버지가 뭘 모르고 계셔서 그래요. 지금 이 동네는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서 동네 사람이 아니면 모두 조사를 하고 있어요...할아버지는 뉴스도 안 보세요?" 노인은 경찰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는 무척이 나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그럼...호....혹시 요시코양이 죽....죽기라도...." 노인은 거의 울상이 다되어 말을 더듬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누군 신데 그렇게 놀라세요?" 노인은 경찰의 말을 듣자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고는 땅바닥 에 주저앉았다. 노인은 아오모리현의 조그만 산간 마을에서 올라왔다고 하였다. 노인에게는 금지옥엽으로 키우던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산으로 나물을 캐러 갔다가 벼랑으로 실족하여 죽고 말았다는 얘 기였다. 그 이후 노인은 세상사는 재미를 잃고 술로 세월을 보내 던 중 어느 날 우연히 TV의 연속극을 보다가 요시코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요시코의 모습이 죽은 딸과 흡사하여 노인은 요시코가 출연하는 TV프로는 하나도 빼지 않고 보았는데 요시코의 TV 출 현이 뜸해지자 노인은 딸에 대한 그리움에 요시코를 어렵사리 찾 아온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노인은 해마다 산에서 채취한 나물 이며 열매 등을 요시코의 집에 우편으로 보내오고 있다가 몇 칠 전에 곶감을 먹던 중 갑자기 죽은 딸이 곶감을 좋아했던 생각이 미치자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곶감을 싸들고 요시코의 집으로 밤 기차를 타고 달려 왔다는 사연이었다. 두 경찰은 노인의 사연을 듣고 혀를 차며 노인의 신세를 안타까 워했다. "할아버지, 우리가 서있는 이 집이 바로 요시코양의 집이에요." "그래요, 천만다행이구만, 제대로 찾아와서 그럼 들어가 봐야 되겠구먼." 노인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할아버지, 그런데 지금 요시코양은 집에 없어요." "아니 왜, 안 들어왔나...하기사 바쁘겠지....유명 인은...그럼, 일하는 할망구라도 있겠지...그 할망구가 나를 알아보기나 하려 나 몰라?" 노인은 지난번에 왔을 때 일하는 할망구가 밥도 차려줬다며 자 랑을 하였다. "아무도 없습니다 할아버지." "뭐라고, 이 큰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야...할망구가 죽기라도 했나....아...그래서 집이 비어서 경찰 나리들이 집을 지켜주고 있구먼."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다음에 요시코양이 집에 있을 때 다시 오세요." "아니야,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들어오겠지." "네, 할아버지 언제 들어올 줄 알고 여기서 기다리세요, 요시코 양은 바쁜 연예인이라 안 들어오면 이 삼일도 안 들어와요." "괜찮아, 이 삼일이면 어때 가봐야 할 일도 없는데, 이 삼일 기 다리다 요시코양에게 이 곶감을 전해주고 가는 것이 났지." 노인은 옆에 있는 보따리를 가리키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심풀이로 여자 애 얘기를 하였던 경찰은 안쓰러운 마음에 요 시코의 사정을 이야기하기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정말 로 이 삼일 이라도 기다리고 있을 태도였다. "할아버지, 사실은 요시코양은 당분간 이 집에 오지 않아요." "아니 어째서?" "좀 전에 말씀드렸던 살인 사건과 관계가 있어 경찰서에 있어 요."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요시코양이 살인을 했다는 얘기 야...그 무슨 가당치 않은 얘기야..요시코양은 살인을 할 아가씨 가 아니야...경찰서가 어디 있지 내가 가서 얘기를 해줘야지 요 시코양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경찰양반 경찰서를 찾아가려면 어디로 가야되지?" 노인은 바닥에서 일어나 경찰서로 달려갈 자세였다. "할아버지, 요시코양은 특별한 곳에 있어서 우리도 잘 몰라요, 그리고 찾아가셔도 면회도 안돼요." "요시코양이 무슨 죄를 졌기에 면회도 안된다는 것이야, 이봐요 경찰양반 무슨 사연인지 자세히 좀 알려줘요..내 이렇게 부탁하 오." 경찰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노인은 금새라도 눈물을 쏟을 것 만 같았다. "할아버지, 요시코양은 어제 경찰에 잡혔어요 지금 조사중이라 면회는 안되고 몇 칠 있으면 죄가 없어 풀려날 거예요." 노인의 눈이 순간 반짝이는 것을 두 경찰은 볼 수가 없었다. 노 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한참 을 울다가 갔고 온 곶감 보따리를 경찰들에게 안겨주고는 힘없이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참...저 노인네도 불쌍하구만...어쩌다 하나있는 딸을 잃어 가 지곤." "죽은 딸이 요시코양을 닮았다고 하니 미인었겠어...아까운 아가 씨가 죽었군." "참..나, 좌우지간 이 친구는 못 말린 다니깐." 신흥 부촌을 벗어나자 노인의 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큰길 에 이르자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잡은 노인은 시내로 행선지를 잡았다. 노인의 모습으로 변장한 자유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요시코의 집 을 방문한 결과 경찰에게 요시코가 어제 검거되었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다. 혹시나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경찰에 검거 되었다면 삿포로 경찰서에 구속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사건의 중대성으로 미루어 제 삼의 장소에 있을 수도 있었다. 자유인은 요시코가 삿포로에 올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예측해 보았다. 만나야 할 사람은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꼭이나 찾아 야 할 물건이 있었다면 집에 있을 것이고 영리한 요시코가 집으 로 그냥 찾아 갔을 리는 없고 분명 누군가를 집으로 보냈을 것이 다. 요시코의 집에 경찰의 의심 없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유모뿐이라고 자유인은 단정을 지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 치자 자유인은 행선지를 유모가 사는 동네로 바꾸었다. 유모가 사는 동네는 요시코가 유모에게 대하여 얘기를 할 때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동네 이름만 알지 주소는 알 수가 없었다. 유모가 사는 동네에 도착 한 자유인은 먼저 경로당이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다행히도 동네에는 경로당이 있었다. 자유인은 경로당을 찾아갔다. 이른 시간이라 노인들은 몇 명 없 었다. 자유인이 들어서자 경로당에 앉아있던 노인들의 시선이 집 중되었다. 자유인의 예상대로 요시코의 유모도 이따금 경로당을 찾아와 놀 기도 하였다. 유모는 그곳에서 자신이 유명한 탤런트 요시코의 유모라고 자랑을 하였기에 경로당의 노인들은 유모의 집을 알고 있었다. 자유인은 경로당의 노인들이 알려준 유모의 집으로 향했다. 자 유인은 유모의 집 근처를 둘러보았다. 유모의 집을 감시하는 수 상한 인물은 없는 것 같았다. 요시코가 검거되어서 유모의 집은 감시가 느슨해진 것 같았다. 자유인은 유모의 집으로 연결 된 전화선을 확인해 보았다. 집에 서 나온 전화선은 근처의 전신주에 연결되어 뻗어 나가고 있었 다. 전신주에 연결 된 유모 집의 전화선에는 소형의 도청 기계가 달려있고 또 다른 전화선이 도청기계에서 빠져 나와 다른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요시코는 유모에게 전화를 하였다가 전화를 도청하고 있던 경찰 에 꼬리를 밟히고 말았던 것이다. 유모는 집에 있었다. 그녀는 요시코의 검거 사실을 모르고 있었 다. 유모는 낮 설은 노인이 자신을 찾아오자 의아한 눈으로 자유 인을 살펴보았다. 자유인은 늙은 유모에게 자신과 요시코의 관계를 설명 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참 만에야 유모에게서 요시코가 부탁한 반지의 심부름 과정과 반지에 대한 요시코 집안의 내력을 들을 수가 있 었다. 자유인은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을 느꼈다. 값나가는 물건을 찾 으러 온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모님의 반지를 끼워 주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찾아온 요시코의 사랑이 감격 스러웠다. 자유인은 유모의 집을 나서며 무슨 일이 있어도 요시코를 구해 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하였다. 삿포로 전화국의 자재 창고에 도둑이 들은 것은 전화국 직원들 의 점심 시간 이었다. 도둑은 작업복 한 벌과 수리용 공구 몇 개 를 훔쳐 달아났다. 전화국의 자재 창고에는 수많은 자재가 쌓여 있어 도둑이 다녀간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삿포로 경찰서의 형사 계는 몇 명의 교통사고 피해자가 조서를 꾸미고 있을 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책상에 앉아있는 형사들 의 표정은 왠지 심기가 불편한 모습들이었다. 형사 계의 문이 열리며 삿포로 전화국의 작업복을 입은 사내가 허리 벨트에 수리용 공구를 잔뜩 달고는 들어서고 있었다. "수고들 하십니다, 옆 사무실에서 전화가 혼선이 있는지 통화 상태가 깨끗하지 않다는 신고를 해서 나왔는데 전화선 좀 확인하 겠습니다, 여기는 통화 상태가 좋습니까?" "그래요, 그러고 보니 우리 전화도 이따금 지직 거리는 소리가 많이 나는 것 같던데...." "그럼 확인 한 번 해보죠." 전화국에서 나온 사내는 형사들의 책상 사이로 연결 된 전화선 을 일일이 점검하고 다녔다. 형사들은 사내가 전화선을 따라 사 무실 곳곳을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았다. 사내가 전화선을 체크하며 구석진 책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구석진 책상에는 두 명의 형사가 커피를 마시며 불만에 찬 대화 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기분 잡쳐서 이거 해 먹겠어.." "그러게 말야, 자식들이 처음부터 건방을 떨더니....지들이나 우 리나 똑같은 형사 짓거리 해 먹기는 마찬가진데 왜 그리 잘난 척 을 하는 거야.." "그게 다 촌구석에 있다고 무시하는 거지 뭐겠어..." "아...자식들이 우리를 아주 심부름꾼 취급을 하드라고...그리고 서장도 도쿄에서 내려온 검사에게 아양을 떠느라고 정신이 없더 라고 그러니 검사와 함께 온 그놈들도 유세를 떨지....." "아침에 서장 얘기 못 들었어....그 놈들 앞에 놓고 하는 말 이...뭐라고...도쿄에서 내려온 형사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요시코 의 검거는 힘들었을 거라고...나..원 기가 막혀서....." "그 요시코라는 여자는 언제 도쿄로 데려간데?" "글세, 오늘이나 내일 정도 되겠지." 전화국에서 나온 사내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듣느라 일손을 놓고 있었다. 한 형사가 그런 사내를 발견하고는 짜증 섞인 말을 하였다. "이봐요, 일이나 하지 남의 얘기는 왜 엿듣고 있어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도 언짢아들 하시기에....다 됐습니다." 사내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굽실거리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전화국 직원으로 변장한 자유인은 형사들의 대화에서 이번 사건 의 중대성으로 도교 경시청에서 수사 팀이 내려온 사실을 확인하 였다. 자유인은 서둘러 경찰서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살펴보 았지만 요시코의 행방은 찾을 길이 없었다. 자유인은 내친 김에 혹시나 하여 서장실로 들어가 보았다. 서장은 전화선을 점검하러 나왔다는 자유인의 말에 환한 웃음으 로 맞이해 주었다. 자유인이 서장의 책상 밑에 깔려있는 전화선 을 살펴보고 있는 순간에 전화 벨이 울렸다. "네, 서장입니다, 네, 그래요....뭐 좀 알아내신 건 있습니까?... 네..아 오늘 올라가신 다고요....그럼 저녁 식사라도 대접을 해야 하는데 제가 찾아뵐까요...그래도 검사님이 고생하고 가시는데 그래도 괜찮은지....그렇죠...제가 그곳으로 찾아가다가 혹시 기 자들이 냄새라도 맡으면...네...그렇죠...물론 입니다...그럼 여자 도 오늘.....아...네...알겠습니다...그럼 검사님 나중에 시간 나시 면 온천이나 하시러 들러주세요...네...그럼 조심해서 가십시 오....정말 죄송합니다...중대한 사건이 아니라면 이렇게 죄송하 게는....네...그럼 끊습니다." 서장의 통화는 한참 만에야 끝났다. 상대방의 통화 내용은 들을 수가 없었지만 서장의 통화 내용에서 도쿄에서 내려온 수사 팀이 오늘 중에 철수를 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요시코도 도쿄로 이송 되는 것 같았다. 자유인은 서장실을 빠져 나와 황급히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경 찰서를 빠져 나온 자유인은 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하였다. 경찰서를 빠져 나온 자유인은 주변의 상가에 들러 허름한 잠바 를 하나 샀다. 자유인은 잠바를 들고 근처의 화장실로 들어가 전 화국 작업복을 벗고 잠바를 갈아입었다. 자유인은 삿포로 전화국으로 급히 달려갔다. "삿포로 경찰서의 이시다 형사입니다, 이곳을 담당하시는 분을 뵙고 싶은데요." "아...그러세요, 잠시만..." 전화국 직원은 자유인을 의심치 않고 상관을 찾아왔다. "제가 이곳 부서를 담당하는 계장입니다만....무슨 일로?" "안녕 하십니까, 저는 삿포로 경찰서의 이시다 형사입니다, 다 름이 아니라 좀 전에 그러니까...15시20분 경에 저희 서장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안 좋은 협박 전화가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 장님이 노발대발하시며 전화가 걸려온 발신지라도 알아오라는 호 통이 계셔서..." "아...그러세요, 그렇다면 이곳으로 오시죠." 계장이라는 사내는 자유인의 말에 서두르고 있을 뿐 신분증 같 은 것은 확인을 하지 않았다. 사내는 복잡한 기계 앞에 앉아있는 여직원에게 다가가 15시20분에 서장에게 걸려온 전화의 발신지 추적을 부탁하였다. 여직원은 손쉽게 발신지를 찾아내었다. 서장의 통화 시간이 길 었던 점을 상기한 자유인은 통화 시간을 물어 보았다. 여직원이 알려준 통화 시간은 자유인이 서장실에 있었던 시간과 비슷하였다. 발신지는 모리 산 아래에 있는 oo호텔이었다. 자유인은 전화국을 빠져 나와 oo호텔로 향했다. 서장과 통화를 했던 부장과 도쿄의 수사 팀은 oo호텔에 묵고있을 가능성이 높 았다. 요시코 또한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들어선 자유인은 후론트로 급히 뛰어갔다. 급하게 뛰어 오는 자유인을 후론트 담당자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헉..헉, 아이고 숨차네, 이거 늦어서 큰일 났구만, 부장님에게 한방 얻어터지게 생겼는데...이봐요 여기 도쿄에서 내려온 수사 팀이 묵고있는 방이 어디요? 급히 연락 받고 달려오느라 잊어버 렸네." "누구 신데..?" "나요, 도쿄 경시청의 이시다 형사요." "아..그러세요, 1302호와 1303호를 쓰고 계십니다." "고마워요." 자유인은 승강기로 달려갔다. 이 시각, 자유인이 승강기를 타고 13층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요시코는 형사들에 이끌려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13층에 도착 한 자유인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1302호 방을 노크하였다.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문손잡이를 당겨보 자 잠겨있었다. 자유인은 1303호 방을 두드려 보았다. "누구세요?"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삿포로 경찰서의 이시다 형사입니다." 문이 열리고 날카롭게 생긴 사내가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보였 다. 방은 십여 명이 기거해도 충분하리 만치 넓었다. 방안에는 문을 열어준 사내와 또 다른 사내 두 명 뿐 이었다. 그들은 짐을 챙기며 떠날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요?" "요시코양은 어디 있습니까?" "방금 떠났는데 무슨 일이요?" "떠나요, 어디로...?" "아...이 사람이...어디긴 어디야...도쿄지, 대체 무슨 일인데 그 래, 그리고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극비 사항인데 어떻게 알 았어?" "서장님이 얼마 전에 부장님과 통화를 끝내시고 떠나기 전에 요 시코양에게 한가지 확인하고 오라는 지시가 있어서..." "확인은 우리가 해줄 테니 말해봐요." "그건 안됩니다, 언제 떠났죠?" "방금 떠났소, 뭔지는 몰라도 한 발 늦은 것 같소." "그럼 할 수 없죠,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자유인의 말이 끝나자 침대에 걸터앉아 자유인을 주의 깊게 쳐 다보던 사내가 말을 하였다. "이봐요,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죠?" "이시다요." "이시다...이시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 같은데 내가 삿포로 경찰 서 형사들의 이름은 거의 알고있는데 이시다는 처음 들어보는 이 름인데...그리고 당신을 경찰서에서 본 기억이 없어...죄송하지만 신분증 좀 보여주쇼." 자유인은 일순 당혹 감이 들었다. "급히 오느라 신분증을 두고 왔군요." "그래요, 그럼 잠시 기다려요 경찰서에 확인을 해보게..." 사내는 침대에서 내려와 전화기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옆에 서있던 사내는 자유인을 쏘아보며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자유인은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사내가 전화기를 드 는 순간, 자유인은 옆에 있는 사내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사내 는 갑작스러운 자유인의 공격에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바닥에 뒹 굴었다. 전화기를 들던 사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며 황급히 손을 양복 안으로 집어넣었다. 사내의 손이 양복 안에서 빠져 나오며 손에는 권총이 들려있었 다. 사내가 총구를 자유인에게 겨냥하는 순간 자유인의 몸이 허 공으로 날아오르며 사내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사내를 향해 솟구쳐 오른 자유인은 허공에서 재빠르게 오른 다 리를 휘둘렀다. 사내의 총구가 자유인에게 향하는 순간에 사내는 왼쪽 귀밑에 극심한 충격을 받으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자유인은 쓰러진 사내의 손에서 권총을 뺐어들고 사타구니를 얻 어맞아 바닥에 뒹구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바닥을 뒹굴던 사내는 권총의 총구가 눈 밑에 다가와 있자 아픔 도 잊고 깜짝 놀라고 있었다. "요시코는 지금 곧장 도쿄로 가는가?" 사내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가지?" 사내는 쉽게 입을 열지를 않았다. "내가 누군지 아직 감을 못 잡는 것 같구만..." 자유인은 사내의 혈을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기절한 사 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유인은 침대 위에 있는 베개를 들어 권 총 앞에 대고는 쓰러진 사내를 향 해 방아쇠를 당겼다. "퍽" 하는 둔중한 소리가 나며 화약냄새가 풍겨 났다. 기절한 사내는 가슴 언저리에 총상을 입고 몸을 순간적으로 꿈틀 거렷 다. 자유인은 쓰러진 사내에게 다가와 총구를 사타구니에 들이밀 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나, 이곳이 아픈 것 같은데 아예 고통을 없애줄까?" "자...자동차로 가...갑니다." 사내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몇 대로?...그리고 몇 명이 호송하지." "한대입니다, 그리고 호송하는 인원은 세 명입니다." "차종과 번호는?" "검은 색 찝차입니다, 번호는 도쿄6432입니다." "어느 길로 가지?" "국도로 가기로 되어있습니다." 사내의 말을 모두 들은 자유인은 권총의 손잡이로 사내의 머리 를 내려쳤다. 사내는 힘없이 기절하고 말았다. 자유인은 가슴에 총상을 입고 피를 흘리는 사내에게 다가가 긴 타월로 지혈을 하였다. 자유인은 사내의 심장을 피하여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위치로 총을 발사하였던 것이다. 로비에 내려온 자유인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후론트 담당자에게 다가가 중요한 업무를 보고 있으니 2시간 후에 1303 호실로 찾아오라는 부탁을 하였다. 가슴에 총상을 입은 경찰이 2 시간 후에 발견되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자유인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주차를 하기 위하여 내려오는 차량들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빨간 색의 BMW Z3을 몰고 한 남 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구석진 곳에 빈자리를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남 자가 문을 잠그는 순간 그림자처럼 다가온 사내를 발견하였다. 놀란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던 남자는 사내의 손이 빛살처럼 자신 의 얼굴을 향 해 덮쳐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남자는 그 다음 을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자유인은 쓰러지는 사내를 구석진 곳에 옮겨놓고 사내의 손에 쥐어진 자동차 열쇠를 빼어들고 황급히 사내의 차에 올랐다. 스 포츠카답게 자동차는 폭발하는 엔진 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자유 인은 주차장을 빠져 나와 어둠이 내리는 도로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조장 바꿔." "누구 신데...?" "이런 병신 같은 새끼....나 야마다야." 전화를 받은 사내는 상대방이 벌컥 화를 내자 당황하며 조장을 바꿔 주었다. "네, 전화 바꿔 습니다." "준비는 완벽하겠지?" "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 출발하도록, 그 계집을 태운 찝차가 방금 삿포로를 출발 했다는 연락이 왔다. 방향은 사람의 눈을 피해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올라온다, 실수 없도록...만약 실수가 있으면 온전치 못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내는 전화를 끊고 사무실에 있는 10여명의 사내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지금 막 삿포로에서 물건이 떴다, 이 곳까지는 1시간 정도 걸 릴 테니 서둘지 말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기 바란다, 요시무라, 너는 선두 화물차를 운전하고, 사사끼, 너는 후미 화물차를 운전 한다, 그리고 너희들은 승용차로 사사끼의 후미 차를 따른다, 모 두 이리 모이도록." 사내는 지도를 꺼내 놓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나는 이 지점에서 물건을 실은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쫓아가겠 다. 너희들은 내가있는 이 지점에서 좀 더 앞 선 이 지점에 대기 하고 있다가 내가 연락을 취하면 자연스럽게 달리면 된다, 후미 에 있는 차량에 가까이 접근하면 연락을 할 테니 후미 차량은 물 건을 실은 차량이 추월 할 수 있도록 속도를 줄인다. 추월을 하 면 승용차를 탄 너희들도 함께 사사끼의 화물차를 추월하여 상대 차량을 쫓는다. 상대 차량이 선두에 있는 요시무라의 화물차에 접근하여 속도를 낮추면 너희들은 가볍게 상대 차량을 들이받는 다. 상대 차가 정지하고 추돌 상태를 살피러 나오면 너희들도 차 에서 내려서 언성을 높이고 상대 차가 갑자기 속도를 낮춰서 사 고가 난 것이라고 생떼를 쓴다, 그래서 상대 차의 또 다른 인원 이 차에서 내리면 그 때에 공격을 시작한다, 알겠나?" 요시코를 태운 검은 색의 찝차는 삿포로 시내를 벗어나 도쿄와 오사까로 연결되는 1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찝차에서 비쳐지는 불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도로는 한적 했다. 삿포로에서 도쿄까지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가 거리도 단 축되고 길도 좋아 사람들은 국도보다는 고속도로를 선호하고 있 었다. 이따금 화물차의 통행이 있을 뿐 도로는 어둠에 묻혀 있었다. 요시코는 몸집이 비대한 형사와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운전을 하는 형사와 그 옆자리에 또 다른 형사가 타고 있었다. 찝차는 삿포로를 출발한지 1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요시코의 옆 자리에 앉아있는 형사는 작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찝차가 한가롭게 불을 밝히고 있는 주유소를 지나치자 주유소에 서 한 대의 차량이 도로로 나오고 있었다. 주유소에서 나온 차량은 찝차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달려오 고 있었다. 운전을 하던 형사는 뒤차에서 비쳐지는 불빛에 눈이 부셔 거리 를 떨어뜨리려고 속도를 내었다. 뒤따르던 차량도 얼마간을 같은 속도로 따라 오는 듯 하더니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기세 좋게 달리던 찝차의 앞에 승용차 한 대와 대형 화물차가 달리고 있었다. 찝차는 한 동안 승용차의 뒤를 따라갔다. 앞서가 는 화물차는 더디게 달리고 있었다. 승용차는 그런 화물차를 추 월하지 않고 뒤만 따라가고 있었다. 인내의 한계를 느낀 형사는 승용차 운전사에게 푸념을 하며 승 용차와 화물차를 빠르게 추월해 나갔다. 그리고 빽밀러를 보니 승용차도 곧이어 화물차를 추월해 나오고 있었다. 형사는 승용차의 운전사가 초보 운전이거나 겁이 많은 운전사라 고 생각했다. 찝차가 달리자 겁 많은 승용차도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형사는 자신의 운전 실력을 보여주려는 마음에 속도를 올리며 커브 길을 돌았다. 커브 길을 막 돌아서던 형사의 눈에 대형 화물차가 눈에 보였 다. 형사는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 속도를 낮추며 빽밀러를 보았 다. 승용차의 불빛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형사의 입에서 "어" 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승용차의 미끄러지는 소리와 "쾅" 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운전이 서투른 승용차 운전사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찝 차를 받아 버렸다. 형사는 찝차를 세우고 욕을 해대며 문을 열고 나왔다. "야,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앞도 안보여?" 형사는 소리를 지르며 찝차의 뒤를 살펴보았다. 방향 지시 등이 깨져있었다. 승용차 운전사는 놀랐는지 곧바로 차에서 나오지 않았다. "뭐해, 빨리 안 나오고..." 형사는 화가 치밀어 승용차의 범퍼를 발로 내 질렀다. 승용차의 문이 열리고 놀란 표정의 사내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옆 좌석 의 문도 함께 열리며 다른 동승자도 내렸다. "이것 봐요 아저씨, 왜 남의 차는 발로 차고 난리예요." "뭐라고, 아니 이 자식이.." "아저씨가 갑자기 속도를 줄여서 사고가 났잖아요, 아저씨가 잘 못해서 사고가 났는데 왜 욕을 하고 그래요." 승용차에서 내린 사내는 조금은 어수룩해 보이는 표정으로 목소 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사이 사고 차량의 뒤에는 승용차와 화물 차가 쫓아와 차량들을 정차시키고 차에서 내려와 구경들을 하고 있었다. "뭐, 아니 이 자식이 정신이 있나 없나, 지가 받아놓고 잘했다 는 거야 뭐야." 형사의 언성이 높아지자 찝차의 문이 열리며 다른 형사가 내리 고 있었다. "왜 그래, 삿또 형사." "아...저 자식이 차를 받아놓고 지가 잘했다고 난리네." "아...이제 보니 형사군요, 아...형사면 사고가 누구 때문에 났 는지 잘 알면서 그래요. 정말 더러워서..." "이봐 젊은 친구,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고 있나." 뒤 따라 내린 형사가 사내에게 다가가며 점잖게 타이르고 있었 다. 그사이 구경을 하던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이 찝차의 뒷문 쪽 으로 자리를 옮겨 있었다. 사고 차의 동승자가 운전을 하던 형사에게 진정하라며 다가오고 있었다. 길길이 날뛰는 사고 차의 운전사에게는 나이 먹은 형사 가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사고 경위에 대하여 이해를 시키려 고 하였다. 사고 차의 운전사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얘기하자며 손을 잠바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순간에 사고 차 동승자의 손도 허리 뒷춤 으로 돌아가 있었다. 찝차의 뒷좌석에 타고 있던 비대한 형사는 문 쪽으로 다가오는 두 사내가 심상치 않아 겨드랑이에 메 달린 권총을 꺼내려고 손 을 옮겼다. 그 순간 비대한 형사는 사고 차 동승자의 허리춤에서 빠져 나오는 번쩍이는 칼을 보았다. 놀란 눈으로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에 뒤 문이 벌컥 열리며 사내 의 손이 자신의 목 언저리에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사내의 손에 는 예리한 칼이 번뜩이고 있었다. 담배를 찾던 사내의 손에 칼이 들려나와 자신의 복부를 찌르고 나서야 형사는 칼을 볼 수가 있었다. 사내의 동작은 민첩하기 짝 이 없었다. 방금 까지도 어수룩해 보이던 사내가 아니었다. 싸늘 한 미소가 입가에 흐르고 있는 모습은 잔인한 살인자의 섬뜻한 모습이었다. 사내들은 순식간에 3명의 형사를 쓰러뜨리고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는 요시코의 머리채를 끌어당기며 차에서 끌어내었다. 그사이 한 대의 승용차가 반대편으로 달려오다 상황을 보고 속 도를 낮추며 정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칼을 든 사내가 승용차 를 향해 찌르는 시늉을 하자 승용차는 쏜살같이 가던 길로 달려 갔다. 사내들은 요시코를 화물차 뒤에 있는 승용차에 태우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자유인은 삿포로 시내를 벗어나자 자동차의 속도를 올렸다. 자 동차는 운전자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었다. 자유인은 스포츠카로 선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달려가면 요시코가 타고있는 찝차를 금방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둠 속을 한 동안 달리자 우측에 주유소가 나왔다. 주유소를 지나자 도로는 속도를 낮춰야 하였다. 길도 좁아지고 커브 길도 많았다. 얼마를 달리자 전방에 많은 차들이 정차해 있고 사람들이 차에 서 내려 서성이고 있었다. 사고가 난 것 같았다. 자유인은 옆 차 선으로 조심스럽게 진행을 하려고 하였으나 밀려있는 차들로 얼 마 못 가 정지해야 했다. 자유인은 차에서 내려 앞을 주시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마음 이 조급해 지기 시작했다. 자유인 앞으로 두 명의 여자가 걸어오 고 있었다. 여자들은 사고 현장을 구경하고 오는 듯 하였다. "아휴, 끔찍해." "정말이야, 사고가 난 뒤에 말다툼을 했을 거야, 그러다 서로가 칼로 찔렀겠지." "아냐, 어떤 남자가 그러는데 앞차에 무전기가 있는 것이 경찰 차 같다고 하던데, 그리고 쓰러진 남자 중 한 사람의 가슴에 권 총이 있다고 했어..." 자유인은 여자들의 얘기를 무심결에 듣다가 피우던 담배를 내 던지고 앞으로 달려갔다. 사고 현장에는 요시코를 태우고 도쿄로 향하던 찝차가 있었다. 찝차의 뒤를 들이받은 승용차는 본닛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 었다. 도로의 바닥에는 두 명의 사내가 칼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찝차로 다가가니 뒷좌석에도 한 명의 사내가 칼을 목 주 위에 맞고 쓰러져 있었다. 칼을 맞은 사내들을 살펴본 자유인은 사내들이 칼을 맞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반대편 차선으로 달려갔다. 사고 지점의 반대 차선도 많은 차들이 밀려 있었다. 자유인은 늘어선 차량들의 맨 뒤로 달려갔다. 뒤에는 다행히도 승용차가 정차 해 있었다. 자유인은 운전석 문을 벌컥 열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중년의 사내는 고개를 돌리며 무슨 소린가를 지르려고 하였으나, 문을 연 사내가 번개처럼 손가락을 자신의 귀밑 부분을 찔러오자 극심 한 고통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자유인은 정신을 잃은 사내를 옆 좌석으로 옮기고 운전석에 앉 아 자동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사고 지점에 경찰 차의 경광 등과 구급차의 불빛이 보였다. 자유인은 위험한 도로를 거칠게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지 는 모르지만 경찰의 호송 사실을 알고있는 자들이 요시 코를 납치하기 위하여 경찰 차를 급습한 것 같았다. 세 명의 형 사가 저항 없이 당한 것으로 미루어 요시코를 납치한 자들은 전 문가 냄새가 났다. 자유인은 요시코를 필요로 하는 집단을 떠 올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뜻 떠오르질 않았다. 경찰 차를 급습할 정도라면, 그 리고 호송 차의 출발 시간과 장소를 이미 알 수 있는 조직이라 면....자유인은 불현듯 다까시오 조직을 떠 올렸다. 다까시오 조직을 떠올리자, 자유인의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었 다. 요시코가 다까시오 조직의 손에 잡혔다면 위험한 정도가 아 니라 목숨도 보장 할 수가 없었다. 다까시오 조직이 요시코를 무엇 때문에 납치했는지 의문이었다. 혼도 의원의 살인을 청부한 조직의 불안감이 자신과 함께 사라진 요시코가 검거되므로 혹시 요시코가 혼도 의원의 살인 청부 사실 을 알고 있을까 걱정하여 경찰의 손에서 요시코를 납치했다면 요 시코의 입을 막기 위하여 목숨을 끊어 놓을 수도 있었다. 자유인은 조급함에 자동차의 속도를 더욱 올렸다. 곡예를 하듯 이 운전을 하던 자유인은 눈앞에 보이는 갈림길에서 곤경에 처하 고 말았다. 앞으로 뻗은 길은 도쿄로 이어진 국도였고 우측으로 난 길은 고 속도로로 연결되는 도로였다. 납치범들이 국도로 갔는지 고속도로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고속도로를 택하고 싶었지만 납치범이 타 고 가는 차량도 모르는 상황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질주하는 고속 도로에서 납치범의 차량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유인은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갖고서 국도로 달려갔다. 그러나 마음은 고속도로에 있었다. 자신이라도 고속도로로 달려갔을 것 이다. 자유인이 도쿄에 도착 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오는 도중에 납치 범의 차량은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자유인은 차에서 내리며 옆 좌석에 기절한 채 쓰러진 사내의 막힌 혈을 풀어주었다. 자유인은 야스게의 집으로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 하였다. 야스게는 일본 야쿠자 조직의 계보와 각 조직의 활동 본거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야스게와 자유인은 도쿄의 다까시오 조직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달려갔다. 다까시오 조직의 활동 지역은 도쿄 시내에서 최고의 상권이 이 루어진 유흥가 밀집 지역이었다. 본부를 오사카에 두고있는 다까 시오 조직이 도쿄의 최고 요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다까시오 조직의 힘이 얼마나 센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실이었다. 야스게와 자유인이 찾아간 곳은 새벽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흥청 거리며 몰려다니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유흥업소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네온을 뽐내고 있었다. 업소들은 한 눈에 보아도 고급스 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야스게는 규모가 제법 큰 업소를 몇 군데 들랑거렸다. "이시다 선생, 아무래도 이곳 공기가 심상치 않은데요." "심상치 않은 게 무슨 소리요?" "평소에 이곳은 전국의 조직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곳이라 언제 나 서너 명의 중간 보스 급 주먹들이 지키고 있는데 오늘은 아무 도 없는 것이....." 야스게의 설명을 들은 자유인은 요시코가 도쿄의 다까시오 조직 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시다 선생, 도쿄의 다까시오 조직의 아지트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을까요?" "글세요....아...좋은 생각이 있어요." 야스게의 얼굴이 밝아지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기 리오라는 간판이 보이시죠? 저기요...저곳의 마담의 애인 이 다까시오 조직의 중간 보스에 속하죠. 그 여자가 지난번에 제 게 와서 문신을 하고 갔죠, 여자의 얘기로는 영업 시간이 끝나면 언제나 사내가 자동차로 태우러 온다고 자랑을 했었죠, 실제로 제 눈으로도 몇 번 본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조금 있으면 영업 시간이 끝나는 시간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그 작자가 나타날지도 모르죠, 중간 보스 급에 속하는 자를 족치면 다까시 오 조직의 도쿄 아지트나 요시코양의 거처를 알 수도 있을 겁니 다." 자유인은 야스게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실제로 이 거리에 깔 려있는 다까시오 조직의 밑바닥 조직원을 족쳐봐야 그들은 자신 이 맡고있는 이 거리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조직을 관리하는 큰 주먹들은 어느 정도 단계를 걸치며 직급이 올라선 조직원에게 만 조직의 중요한 사업과 은신처 등을 알려주고 있었다. 리오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꺼지며 손님들이 하나 둘 빠져 나왔 다.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리오의 가게 앞으로 건장한 사내 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한 눈에 보아도 야쿠자 냄새가 풍기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머리를 짧게 밀었고 짙은 검정 계통의 정장들을 하고 있었다. 야쿠자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얼마 후 가게 앞으로 흰색의 재규어 승용차가 소리 없이 멈추어 섰다. 삼삼오오 기다리던 건장한 사내들은 일사불란하게 도열하여 머 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잠시 후 가게에서 늘씬한 여자가 나오자 사내들 중에 하나가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여자가 승용차에 오르고 차가 출발하자 사내들은 떠나는 승용차를 향하여 다시금 절을 하였다. 자유인은 야스게의 승용차로 앞서가는 재규어 승용차를 먼발치 에서 뒤쫓아갔다. 재규어 승용차는 도쿄의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부자 동 네로 들어섰다. 자유인은 부자 동네의 입구에서 차를 세우고 재 규어 승용차가 사라진 곳으로 뛰어갔다. 더 이상 승용차로 뒤를 쫓다가는 발각 될 위험이 있었다. 자동차의 붉은 후미 등이 골목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자유인은 골목을 향하여 빠르게 달려갔다. 골목은 얼마 못 가서 막혀있었다. 재규어 승용차는 사라진 골목 의 입구에서 막혀있는 골목 사이에 위치한 몇 채의 주택으로 사 라진 것이다. 몇 채의 집은 모두가 불이 꺼져 있었다. 잠시 후 큰 길에서 골 목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집들 중에 두 번째 집의 이 층 창문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자유인은 조심스럽게 두 번째 집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집안을 살펴보았다. 널따란 정원의 뒤편에 사내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자유 인은 주차장을 살펴보았다. 어두운 주차장은 사물을 식별 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주차장에서 새어 나오는 공기 중에 더운 공기 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방금 주차장에 들어온 자동차에서 뿜 어져 나오는 열기였다. 자유인은 주택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높은 담 위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담 중간마다 경보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집안으로 잠입하려면 날이 밝기 전에 들어서야 했다. 얼마 후 문틈으로 살펴보니 일 층의 불은 꺼져 있었다. 자유인은 담 옆에 세워져 있는 가로등으로 향했다. 자유인은 골목길을 살펴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찾았다. 자유인은 작은 돌멩이를 가로등을 향하여 힘껏 던졌다. 날아간 돌멩이는 가로 등 전구에 부딪치며 작은 소 리가 났다. 속도감 있게 날아간 돌멩이는 전구를 부서뜨리지 않 고 작은 구멍만을 내었다. 가로등이 꺼지자 골목은 어둠에 싸였 다. 자유인은 어둠 속에서 가로등에 메 달려 위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가로등의 높이는 담보다 높았다. 담 위에 설치 된 경보 장치를 통과하려면 가로등 위에서 몸을 날려 경보 장치 위로 날아가 정원에 떨어져야 했다. 자유인은 가로등의 위 부분을 오른 발로 내딛고 순간 적으로 오 른 발을 박차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허공을 나는 자유인의 몸은 경보 장치를 뛰어넘어 정원으로 떨어졌다. 착지 음을 줄이 려고 자유인은 발이 땅에 닿는 순간에 몸을 굴렸다. 정원에 들어선 자유인은 일 층의 동정을 살피며 주위를 살펴보 았다. 정원의 구석에 목련 나무가 솟아있었다. 나뭇가지는 이 층 의 발코니까지 뻗어 있었다. 자유인은 소리 없이 나무를 타고 이 층 발코니로 손쉽게 오를 수가 있었다. 발코니에 내려선 자유인은 커튼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불빛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층 방의 불이 꺼지기를 기 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신중하게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요시코 의 행방을 찾는데 문제가 있었다. 자유인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불빛이 빛쳐 나오는 실내를 커튼 사이로 살펴보았다. 공교롭게도 얼굴이 험악해 보이는 사내가 정 면으로 보이고 있었다. 욕실의 문이 열리며 전라의 여자가 사내 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여자는 늘씬한 키에 가슴도 볼륨이 있었고 잘록한 허리와 도발 적으로 솟아오른 엉덩이 밑으로 긴 다리가 매력 있어 보였다. 소파에 앉아있는 사내가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 었다. 어딘지 수줍어하는 표정이었다. 여자는 침대 옆에 있는 오디오로 걸어가 오디오를 작동하였다. 실내에는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여자는 사내를 보고 다시 한 번 미소를 보낸 뒤 천천히 음악에 맞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자의 춤은 사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여자는 사내에게 등을 보이고 유혹적으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허리가 연체동물처럼 보였다. 자유인은 방안의 남녀가 한 덩어리로 뒹굴자, 발코니의 문을 열 어 보았다. 뜻밖에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자유인은 신속하게 문 을 열고 안으로 잠입하여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는 방문이 세 곳이 있었다. 발코니와 연결 된 첫 번째 방 에는 사내와 여자가 있었다. 자유인은 첫 번째 방문의 손잡이를 천천히 조금씩 돌려보았다. 손잡이는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 다. 자유인은 문이 잠기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발코니 쪽으로 돌아와 방안의 남녀를 주시하였다. 사내는 어느새 알몸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자유인은 사내가 등을 돌린 채 여인의 육체를 탐닉하는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신속하게 자리를 옮겨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 다. 사내와 여인은 문이 열리는 것도 모른 채 육체의 향연에 빠져있 었다. 사내의 등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던 여인은 감았던 눈을 잠시 떴 다.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사내의 뒤로 낮선 사내가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여인은 "헉" 하는 비명을 지르며 놀라고 있었다. 여인의 놀란 눈을 본 사내가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에 자유인의 주먹이 사 내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사내는 무거운 신음을 내지르며 여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바 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여인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도 놀라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자유인은 떨고있는 여인의 정수리 부위를 가볍게 찍어눌렀다. 여인은 이내 기절하고 말았다. 바닥에 굴러 떨어진 사내는 엄청난 고통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 다. 사내는 힘들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요시코를 아는가?" "누...구...야..으...흑." 자유인의 곧추선 손가락이 사내의 명치를 찔렀다. "묻은 말에나 대답을 하도록.." 자유인은 사내의 명치에 데고있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사내 는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요시코를 아는가?" "모..모르..오" "그럼..지난밤에는 어디에 있었지?" "치...친구..들과 노름을 하고...이...있었오." 자유인은 몸을 일으켜 방구석에 있는 장식장으로 갔다. 장식장 안에는 과일 깎는 칼이 있었다. 자유인은 칼을 꺼내어들고 사내 에게로 다가와 사내에게 칼을 들이 데었다. "사내 구실을 하기가 싫은 모양이지?" 자유인이 들이댄 칼이 사타구니에 와 닿자 사내는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저....사실은 위로부터 대기 명령이 있어서..." "대기 명령이라면...?" "대기 명령이 떨어지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입니다, 명령이 떨 어지는 경우는 다른 조직의 공격이 있을 경우와 중요한 사업이 시작되는 경우에 속합니다." "그럼 이번 경우는 무엇 때문에 명령이 떨어졌지..?"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정말 입니다, 조직내의 중요한 사업은 윗 선에서 실행됩니다, 저희 같은 중간 간부급은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명령에 따라 밑에 아이들을 통솔 할 뿐입니다." 사내의 말은 사실 같았다. 다까시오 조직처럼 규모가 큰 조직은 단순한 지시 사항도 단계를 걸치는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유인은 사내에게 다까시오 조직의 도쿄 본거지를 알아내고는 사내를 기절시키고 여자와 사내를 결박시켜 놓았다. 사내가 깨어 나도 사내는 자유인의 출현을 알리지 못 할 것이었다. 사내는 조 직의 비밀을 누설한 실수를 굳이 조직에 알릴 만큼 미련해 보이 지가 않았다. 사내가 알려준 다까시오 조직의 본거지는 의외로 도쿄 시내를 벗어난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유인이 다까시오 조직의 본거지에 도착한 시간은 출근시간이 지난 9시경이었다. 다까시오 조직의 도쿄 본거지로 사용되는 장소는 거대한 주류 창고였다. 가건물 몇 채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술상자가 마당 가득히 쌓여있었다. 마당에는 많은 작업 인부가 분주히 드나드는 트럭에 술 상자를 옮겨 싣고 있었다. 주위를 살펴본 자유인은 잠입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자유인은 자연스럽게 입구에 설치된 경비실을 통과하였다. 예상 대로 경비실 근무자는 드나드는 차량들을 체크할 뿐 자유인은 행동에는 신경을 안 쓰는 눈치였다. 넓은 마당에는 많은 작업 인부가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 속 에 파묻혀 있는 자유인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하 였다. 자유인은 주위를 살피며 가건물에도 들어가 보았지만 특별히 수 상한 기미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한 동의 가건물을 살펴보고 나오던 자유인은 가건물 뒤쪽에서 걸어나오는 건장한 사내를 발견하였다. 사내는 마당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사내의 외모에 서는 야쿠자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사내가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지자, 자유인은 가건물 뒤로 돌아 가 보았다. 승용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도로가 빼곡이 쌓여있 는 술 상자 사이로 뻗어있었다. 도로를 따라 술 상자 뒤편으로 돌아가자 넓은 잔디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로는 잔디밭을 가로 질러 중앙에 위치한 건물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건물은 2층 건물로 적벽돌을 위주로 무게있게 지어져 있었다. 건물 출입구에는 정장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 서성거리고 있었 다. 건물 옆 주차장에는 고급 승용차가 여러 대 주차해 있었다. 자유인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 도 마땅히 건물에 접근 할 방법이 없었다. 건물은 교묘하게 앞쪽에 자리한 가건물과 산처럼 쌓여있는 술 상자에 가려져 주류창고 마당에서는 건물이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외부 침입자를 염두에 두었는지 건물은 잔디밭 한가운데 자리하 고 있어 어떠한 방향의 침입자라도 쉽사리 발견 할 수 있는 위치 에 있었다. 자유인은 조급한 마음에 그대로 돌진을 할 까도 생각해 보았지 만 건물 내부에 몇 명의 조직원이 있는지도 모르고 상대에게 노 출된 상황에서의 공격은 자칫하면 요시코의 목숨과도 직결 될 위 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유인은 어쩔 수 없이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두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손목을 조 여와 앉을 수가 없었다. 수갑은 두 팔을 치켜올린 상태에서 채워 져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는 가리개로 앞을 분간키는 어려웠지만 요시코는 자신이 갇혀있는 곳이 지하실이라는 사실 하나는 알 수가 있었 다. 삿포로 외곽 도로에서 낮선 사내들에게 납치되어 눈을 가리운 채 승용차로 한참을 끌려와 사내들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 왔었 다. 요시코를 납치한 사내들은 승용차에서는 물론이고 요시코를 지 하실의 낮선 공간에 묶어놓을 때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를 않았 다. 사내들의 침묵이 요시코를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어 놓았다.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풀어봐." "네" 눈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가 벗겨지자 강렬한 불빛에 요시코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 는 십여 명의 사내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요시코를 쏘아보던 뚱뚱한 사내가 입을 열었 다. "이 계집이 요시코가 틀림없나..?" "네, 여기 사진이 있습니다." 한 사내가 뚱뚱한 사내에게 사진을 내 밀었다. 사진은 요시코가 한창 방송출연으로 인기가 있을 때 만들어진 상업사진 이었다. "닮기는 닮은 것 같은데...어째 사진보다 못 한 것 같애.." "네, 그 사진은 한창때 사진이고...지금은 이년이 변장을 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뚱뚱한 사내는 사진과 요시코를 번갈아 가며 확인하고 있었다. "어..이, 자네 이름이 요시코가 맞나?" 뚱뚱한 사내가 요시코의 턱을 치켜올리며 물어왔다. 요시코는 대답을 하지 않고 턱에 와있는 사내의 손을 떨구려고 고개를 저 었다. 느닷없이 사내의 손바닥이 요시코의 얼굴에 작렬했다. "아니..이년이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해..." 사내는 연이어 요시코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보통 년이 아닌 것 같구만...오늘 중으로 이년에게서 그 놈의 정보를 알아내도록...그 자유인이라는 놈에 대해서 이년은 알고 있을 거야." "네, 걱정 마십시오, 확실한 아이들을 준비시켜 놓았습니다...고 문이라면 이골이 난 아이들입니다." 사내가 돌아서 나가자 주위에 있던 사내들도 뒤쫓아 나갔다. 요시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꽤나 넓은 사무실은 아무런 장식 이나 집기들도 없었다. 한쪽 구석에 긴 소파가 놓여있었고 그 옆 으로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흰색의 벽면 한 편에는 피처럼 보이는 붉은 색의 자국이 묻어있 었다. 숨막힐 듯 한 정적이 공포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사내들 중 한 사내가 말했던 마지막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고문이라면 이골 이 난 아이들입니다." 요시코는 고문(拷問)이라는 말에 두려운 상상이 떠올랐다. 갖가 지 추측과 상상으로 요시코는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두려움을 잊고자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려보았다. 부드 럽게 웃고있는 자유인의 모습이 보일 듯 하였다. 요시코는 자유인에게 거짓말을 하고서 삿포로에 온 것을 후회하 였다. 자신에게 닥쳐올 고통 때문은 아니었다. 요시코의 후회는 자신의 실수로 행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염 려가 되어 자신의 실수를 탓하고 있었다. 한 편으로는 영화에서나 본 적이 있는 고문을 자신이 견딜 수 있을까 두려웠다. 요시코는 머리를 흔들며 나약해 지려는 마음을 모질게 다그쳤 다. 어떠한 고통이라도 참아 내리라고..... 어쩌면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 할 것 같은 불안한 마 음이 들기도 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명의 사내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를 몇 명의 사내가 커다란 보퉁이와 가방을 짊어지고 따라 들어 왔다. 뒤 따라 들어온 사내들은 가방과 보퉁이를 내려놓고 두 명의 사내에게 인사를 하고는 되돌아 나갔다. 두 명의 사내들은 가방을 열고 갖가지 고문 기구들을 요시코 앞 에 꺼내 놓았다. 기구들 중에는 섬짓한 기구들도 여러 개 있었다. "이봐, 예쁜 아가씨, 이름이 요시코가 맞나?" 비쩍 마른 사내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느끼하게 물어오고 있 었다. 요시코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흐흐흐...그냥은 대답을 안하시겠다....음...그래야지 그래야 우 리도 심심하지 않겠지....하지만 대답을 안하면 몸이 상하게 된다 고...그러니 어차피 입을 열거 좋게 좋게 하자구...응, 이름이 요 시코가 맞아?" 요시코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내의 비웃는 듯 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갑자기 사내 의 주먹이 가슴을 후려쳤다. 사내의 주먹은 가슴과 얼굴을 사정 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이년이 좋게 말하니깐 대답을 안 해....야...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요시코는 가슴의 통증으로 숨을 쉬기가 힘이 들었다. 사내는 계 속해서 요시코를 후려치고 있었다. 사내는 쉽사리 흥분을 하는 스타일 같았다. 사내의 구타를 막아선 것은 옆에 있던 작은 키의 사내였다. "그만해 이 친구야...이렇게 예쁘고 나약해 보이는 여자를 그렇 게 무자비하게 때리면 어떡해." 마른 사내는 작은 사내의 저지에 마지막으로 발길질을 옆구리에 하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그래 그래...구태여 이름은 얘기 안해도 돼....어차피 유명한 스타였으니 우리가 다 알고있는 사실이니깐....그냥 그 놈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지금 바로 내보내 주지...이렇게 아름다운 몸이 망가지면 안되잖아..." 작은 사내는 요시코의 곁으로 바싹 다가와 조용한 목소리로 소 곤거렸다. 사내는 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요시코의 가슴과 엉덩 이를 더듬고 있었다. 사내의 손이 엉덩이에 와 닿자 요시코는 허리를 틀어되며 사내 의 손길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런, 벌써 흥분이 되는가 보지...이렇게 손만 갔다 되었는데 몸을 비비꼬고 있으니 말이야." 사내의 손은 요시코의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사타구니 주위를 더 듬고 있었다. "자..자, 우리 빨리 일을 끝내고 즐기고 싶으면 즐겨보자고.... 그놈과 어디에 있었지..응." 사내는 얼굴을 요시코의 얼굴에 맞대고 귀가에 입을 들이밀고는 나직이 소곤거렸다. "야, 그년은 그렇게 다뤄서는 안돼...비켜봐." 마른 사내가 답답하다는 말투로 작은 사내를 밀쳐내며 요시코 앞으로 다가왔다. 작은 사내는 선선히 옆으로 비켜났다. 사내는 요시코의 블라우스를 밑으로 강하게 끌어 내렸다. 블라 우스의 단추가 떨어지고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블라우스가 찢어지고 있었다. 사내는 바닥에서 예리한 회칼을 집어들고는 팔에 걸린 블라우스 조각들을 찢어 내었다. 두 가슴 사이에 연결된 브레지어 끈에 칼 날이 닿자 소리 없이 브레지어가 떨어져 나갔다. 작은 사내는 요시코의 스커트를 벗겨내고 마지막 남은 새하얀 팬티를 날카로운 칼날로 찢어 내었다. 요시코는 두 사내 앞에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은 채 서 있 었다. 사내들은 요시코의 벗은 몸을 감상하느라 말들이 없었다. 작은 사내에게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탤런트는 탤런트야...죽여주는 몸매를 갔고 있잖아.." "그러게 말야, 저렇게 훌륭한 몸을 망치면 아깝지...사실 나도 저런 몸매를 망치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지...하지만 저 아가씨가 순순히 협조를 해야지..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잖아...시체 덩어리로 이곳을 나 가게 될 수도 있으니..." 사내들의 대화는 불길한 상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였다. 사내들 은 의도적으로 요시코의 불안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잠시 후 작은 사내가 문을 열고 나가더니 이내 바퀴가 달린 이 동 침대를 끌고 들어왔다. 두 사내는 요시코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과 발목을 묵고있는 가 죽끈을 풀고는 요시코를 침대에 눕혔다. 요시코는 수갑이 풀어지자 거세게 반항을 했지만 두 사내의 힘 을 이길 수가 없었다. 마른 사내의 주먹이 옆구리를 때리자 요시 코는 힘없이 늘어져 침대에 눕혀지고 말았다. 사내들은 다시금 자유인의 거처를 물어왔다. 요시코는 사내들이 묻는 저의를 알 수 있었다. 대답을 하지 않을 경우에 사내들은 고문을 빌미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리라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 었다. 요시코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흐르고 있었다. 사내들에게 농락 당하고 요행히 풀려난다 하여도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또 다시 볼 수가 있단 말인가..... 요시코의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지는 자유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였다. 자유인은 요시코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지만 요시코 자신의 모습이 멀리 도망치는 그림이 그려졌다. 요시코의 대답이 없자 사내들은 자신들의 기대가 이루어진 것이 흐뭇한지 미소를 지으며 서로 눈짓을 나누었다. 마른 사내가 문을 열고 나갔다. 사내가 나가자 작은 사내는 요 시코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었다. "묻는 말에 대답을 안하면 몸이 망친다고 경고 했을 텐데...지 금이라도 너의 잘난 애인의 거처를 말하면 온전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지....어때 말 할 텐가?" 요시코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말을 안 하겠다...그럼 할 수 없지...원한대로 해 줄 수밖에... 이것은 니가 원해서 시작되는 것이야...그렇지...혹시 우리가 이 렇게 해주길 바라고 있던 것은 아니냐....그 놈이 이 짓을 제대로 못하는 모양이지..." 요시코는 엉덩이를 옆으로 흔들며 사내의 손길을 피하려고 하였 으나 벌어진 다리로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요시코는 서늘하던 사타구니에 뜨거운 무엇이 와 닿는 것을 느 끼고 감았던 눈을 떴다. 요시코는 체념 한 채 온 몸을 측 늘어뜨리고 눈물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다 하여도 떳떳이 그 의 품에 안길 수가 없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사내는 그러한 요시코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작은 사내가 들어오고 두 사내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 난 뒤 라 무자비하게 요시코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욕심을 채운 두 사 내에게 요시코의 알몸은 더 이상 흥미의 가치가 없었다. 두 사내의 매질에 요시코는 몇 번을 기절하고 말았다. 요시코가 기절을 하면 사내들은 요시코의 얼굴에 차가운 물을 쏟아 부어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는 또다시 고문을 하였다. "야, 정말 지독한 년이네." "그러게...보기보다 다른데....이번에는 전기를 써 볼까..." 사내들은 갖가지 고문기구를 사용하며 요시코에게서 자유인의 거처를 알아내려고 집요하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요시코의 몸은 사내들이 알고있는 고문기술의 실험용 같았다. 요시코는 몸서리치게 닥쳐오는 고통의 순간마다 입술을 깨물고 버텨내었다. 수 없이 찾아오는 실토의 유혹을 요시코는 사랑이라 는 이름으로 참아내고 있었다. 고문 방법이 바뀌는 순간마다 찾아오는 짧은 시간은 또 다른 고 문의 불안감으로 미쳐버릴 정도였다. 사내들의 고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요시코의 몸은 만신창이로 망가져 있었다. 결과를 알아보러 내려온 사내들에게 욕을 먹은 두 사내는 더욱 잔인하게 고통을 주었다. 사내들은 실로 많은 방법의 고문 기술을 알고 있었다. 오전 중 에는 요시코의 알몸 위에 징그러운 뱀을 수십 마리 풀어놓기도 했었다. 요시코는 혀를 내밀며 몸 위로 기어다니는 뱀을 보고 하 마터면 도쿄에 있는 야스게의 집을 실토 할 뻔하였다. 너무도 징 그럽고 무서운 상황이었기에 요시코는 오줌을 질질 흘리기까지 하였다. 늦은 오후 시간이 되자 사내들은 더욱 잔인하게 요시코를 고문 하였다. 두 사내의 뒤로는 기다리다 지쳤는지 책임자로 보이는 뚱뚱한 사내와 몇 명의 사내들이 두 사내의 고문을 지켜보고 있 었다. 성질이 급한 뚱뚱한 사내는 요시코가 실토를 하지 않자 자신이 직접 고문기구를 들이대며 자유인의 거처를 다그쳐 물었다. 손톱을 뽑아내기도 하였고 예리한 칼로 얼굴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요시코의 몸은 피로 물들은 고깃덩어리처럼 보였다. 고문을 하던 두 사내나 뒤에서 지켜보던 사내들도 지쳐있었다. 지켜보던 사내들이 화를 내며 돌아가자 두 사내는 피곤한 기색으 로 자리에 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독한 계집은 처음이네." "그나저나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하지?" "그러게 더 이상 손을 댔다가는 죽을텐데..." 두 사내는 걱정이었다. 혹시나 자신들을 무능하다고 조직에서 판단하는 날이면 호되게 당 할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내는 재수 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독종 중에 독종을 맡아서 고 생은 고생대로 하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듣게 되었으니....... 두 사내가 담배를 피우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만 하라는 명령입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두 사내는 얼굴이 노랗게 변하며 물었다. "형님들이 보시고 우리 실력으로는 안된다고 하시며....그리고 더 이상 손을 보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두 사내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얼굴빛이 밝아 졌다. "누가 그래? 큰 형님이..?" "네, 수고 하셨다면서 오늘은 들어가서 일찍 쉬시랍니다, 그리 고 내일 아침에 오사까 본부에서 고문 기술자가 오기로 되어있다 고 했습니다." "오사까에서...?" "네, 나이가 팔 십에 가까운 노인인데 관동군 시절에 유명한 기 술자로 날렸던 노인네라고 합니다....이름이...뭐더라...아... 스. 스..뭐라고 하던데." "혹시 스즈끼 아니냐?" "네, 맞아요, 스즈끼라고 하던데요." "스즈끼라면 내가 잘 알지...그 분이라면 이년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작은 사내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시체처럼 늘어져있는 요시코 를 내려다보았다. 사내들이 돌아가며 불을 꺼버린 실내는 짙은 어둠 속에 빠져있 었다. 요시코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 사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가 있었다. 오늘 하루 요시코에게 벌어졌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 하는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었다. 자신조차도 어떻게 견디었는지 모를 충격이었다. 요시코는 고통의 순간마다 자유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육신의 고 통을 참아내었다. 고통이 극에 달하면 차라리 목숨이 끊어 졌으 면 하였지만 질긴 생명의 끈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았다. 요시코는 조용히 사내들이 나누던 대화를 돼새겨 보았다. 이 밤이 새고 나면 더욱 잔인한 집행자가 자신을 고통의 나락 속으 로 몰아붙일 것이다. 인내에도 한계가 있었다. 오늘 있었던 고통 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늘보다 더 한 고통이 찾아온다면 무의식 중에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신변을 말하지 않을까 염려되 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있는 자신이 없었다. 요시코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떠 올 려 보았다. 그 길은 집행 자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방법이었 다. 죽음, 죽음을 생각하자 서러움이 밀려왔다. 눈물조차도 메말라 흐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꿈꾸었던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고 생각하니 생명에 대한 애착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요시코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모질게 몰아 부쳤다. 더 이상의 선 택은 없었다. 요시코는 힘들게 입안의 혀를 앞으로 내 밀었다. 이빨이 혀에 닿자 입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요시코는 자유인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 보았다. "인...인..인홍씨..사랑해요....행복하세요." 요시코는 눈을 감고 턱에 힘을 주어 자신의 혀를 힘껏 깨물었 다. 충격 같은 아픔이 밀려왔지만 요시코는 더욱 힘껏 혀를 물었 다. 입안 가득 뜨거운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요시코는 자신의 의지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지켰다는 기쁨에 희 미한 미소를 짖고 있었다. 피는 솟구치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고문 중에 많은 피를 흘 렸는데도 이렇게 많은 피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였다. 요시코는 아련하게 밀려드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사랑하는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요시코는 님에게로 다가가 려고 하였으나 님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안타까움에 소리쳐 보았지만 목소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더니 검은 장막 같은 어둠 이 자신을 덮쳐오고 있었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물의 창문에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있었다. 건 물에서 많은 사내들이 현관으로 달려 나왔다. 잠시 후 몇 몇의 사내들이 승용차를 타고 자유인이 숨어있는 앞을 통과해 도쿄 시 내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적지 않은 사내들이 마당에 늘어선 사 내들의 인사를 받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간부급들이 모두 떠나자 마당에 늘어선 사내들 중에 일부는 건 물로 다시 들어가고 일부는 승용차를 타고 건물을 떠나고 있었 다. 사내들이 떠나자 건물 출입구의 불이 꺼지고 낮 동안에 현관 앞 을 지키던 4 명의 사내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자유인은 숨어있던 술 상자 뒤에서 나와 잠바를 벗었다. 거추장 스러운 옷은 벗어버리고 신발의 끈도 단단히 조여 메었다. 마당을 비추는 조명등을 피하여 낮게 포복하며 앞으로 천천히 전진을 하였다. 다행히 자유인이 입고있는 옷 색깔이 어두운 색 으로 쉽게 발각 될 염려는 없었다. 현관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에 도착 한 자유인은 신속하게 건물 담에 몸을 밀착하였다. 자유인은 건물 외벽에 돌출 된 우수관(雨水管)에 메 달려 이 층 으로 기어올라갔다. 아래층은 불이 켜진 창문이 많았지만 이 층은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간부들이 사용하는 사무실로 보였다. 자유인은 이 층의 창 문 앞에 돌출된 작은 조형 물에 거꾸로 메달려 아래층을 살펴보았다. 식당처럼 보이는 넓은 실내에는 칠 팔 명의 사내들이 술잔을 앞 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불이 켜진 또 다른 실내에는 오 육 명의 사내들이 도박판을 벌려놓고 있었다. 아래층의 구조와 인원을 파악한 자유인은 이 층의 벽면에 조금 열린 창문을 발견하고는 위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조금 열린 창문은 화장실 환기 창 같았다. 어른의 머리 정도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넓이였다. 조형 물에서 창 문 까지는 대 충 십 미터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최대한 몸을 날려 열린 창틀 을 정확히 잡아야 했다. 자유인은 심호흡을 길게 하고는 몸을 솟구쳤다. 허공에서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돌아선 자유인의 손은 아슬아슬 하게 한 손으로 창틀을 잡을 수가 있었다. 허공에 메 달려 나머지 한 손을 창틀로 옮기려는 순간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자유인은 한 손에 의지한 채 허공에 메 달려 있었다. 자객열전 ♠♠ 제 4 장 마지막 카드 ♠♠ 자유인은 한참을 창틀에 메 달려 있었다. 요란한 물소리가 들린 후 불이 꺼졌다. 자유인은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끌어 올렸다. 작은 창 틈으로 머 리를 들이밀자 매캐한 담배 연기가 어두운 실내에 가득 했다. 예 상대로 작은 창은 화장실 환기구였다. 자유인은 어둠에 눈이 익자 화장실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화장 실 문을 열고 나서자 작은 전등으로 희미하게 불을 밝힌 복도가 있었다. 복도를 따라 조금 걸어가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자유인은 이 층 복도를 따라 양옆으로 늘어선 문들을 하나씩 확 인하며 요시코를 찾기 시작했다. 늘어선 문들은 잠겨있지 않았다. 복도의 끝에 위치한 문에서 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유인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에 접근 하여 문안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농담을 주고받는 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두 명 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실내에는 두 명의 사내 밖에는 없 는 것 같았다. 자유인은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누구야?" 신경질적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인은 다시 한 번 노 크를 하였다. "똑 똑 똑." "누구냐니깐?" 사내의 목소리가 커지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는 순간에 사내는 눈앞에 버티고 서있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벌렸다. 사내의 입에서 소리가 나오기 전에 사내는 무거운 신음을 토해 내며 앞으로 쓰러졌다. 자유인의 손가락이 사내의 명치를 빠르게 찔러 되었다. 사내가 쓰러지자 실내에 있던 사내가 퉁겨지듯 솟구치며 허공에 서 회전을 하면서 자유인을 향 해 발길질을 하였다. 사내의 동작 은 동물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자유인은 미처 피할 수가 없어 두 팔로 사내의 발차기를 막았 다. 두 팔이 저릴 정도의 충격이 느껴지며 자유인은 반대편 벽으 로 날아가 떨어졌다. 발차기를 한 사내는 바닥에 착지하며 연속 동작으로 자유인을 향 해 옆차기를 하였다. 사내의 공격은 빠르고 정확했다. 전문적 으로 무술을 연마한 사내가 틀림없었다. 자유인은 상대의 공격을 피해서 일어날 수 있는 소음을 염두에 두고 상대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몸으로 받아들였다. 사내의 발이 가슴에 둔탁하게 부딪치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유인은 통증을 참아내며 사내의 발이 걷어지기 전에 몸을 한 바퀴 옆으로 회전하며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의 발차기 공격을 받고도 유령처럼 다가서는 자유인을 보고 사내는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사내의 놀라움은, 몸을 돌려 다가 선 자유인의 수도(手刀)가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었기에 더욱 놀 라웠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신속함이었다. 사내는 목에 강한 아픔을 느끼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내 는 무너져 내리면서 자유인의 공격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자유인은 쓰러진 두 사내를 실내에 옮겨 놓았다. 실내에는 한 쪽 구석에 침대가 놓여있어 사내들을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사내들이 있던 방은 건물의 모든 방과 건물 주변의 잔디밭을 감 시 할 수 있는 감시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자유인은 화면이 작동하는 모니터를 주시했다. 여러 대의 모니 터에는 각 방의 모습과 건물 주변이 보이고 있었다. 작동을 멈춘 검은 색의 모니터 밑에는 방의 번호와 작동 버튼이 있었다. 자유인은 지하실 1, 2, 3 이라고 적혀있는 세 대의 모니 터를 하나씩 작동 해 보았다. 지하실1로 표시된 모니터는 어두운 실내를 촬영하는지 모니터에 는 시커먼 화면만이 보이고 있었다. 자유인은 두 번째로 지하실2로 표시 된 모니터를 작동하였다. 두 번째의 모니터 화면도 시커먼 어둠만을 나타내고 있었다. 자 유인은 세 번째 모니터를 작동하려다 손을 멈추고 두 번째 모니 터를 주시하였다. 두 번째 모니터에서는 첫 번째 모니터와는 다른 어둠이 있었다. 첫 번째와 다르게 두 번째 모니터에서는 희미한 물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자유인은 희미한 물체를 주의 깊게 노려보았다. 희미한 물체는 사람의 형상처럼 보였다. 사람처럼 보이는 물체는 바닥에 아무렇 게나 쓰러져 있는 것 같았다. 화면을 주시하던 자유인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불안감이 순간 적으로 전신에 느껴졌다. 화면에 보이는 희미한 물체가 요시코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인은 복도로 빠져 나와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 다. 계단은 아래층에서 비쳐 올라오는 불빛으로 피할 곳이 마땅 치가 않았다. 계단을 조금 내려와 머리를 밑으로 하여 아래 층 출입구를 살펴 보았다. 출입구 앞에는 두 명의 사내가 등을 보인 채 마당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유인은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 없었다. 자 유인은 되돌아서 모니터가 있는 방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침대 밑에 밀어 넣었던 사내들의 주머니에서는 다행히도 서너 개의 동전이 있었다. 자유인은 동전을 집어넣고 계단으로 돌아갔 다. 양 손가락에 동전을 하나씩, 두 개의 동전을 끼워 잡은 자유인 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 앞의 두 사내는 등을 돌린 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자유인은 여차하면 손에 있는 동전을 던질 준비를 하며 계단을 소리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사내들은 소리 없이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자유인을 발견하지 못 했다. 자유인은 이 층 모니터에서 보았던 두 번째 문으로 향했다. 문 은 단단한 철제로 만들어져 있었고 손잡이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자유인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물쇠를 부숴 버릴 마땅한 물건을 찾아보았으나 쓸만한 연장이 없었다. 두 번째 문을 제외한 다른 문들은 잠겨있지 않았다. 첫 번째 문 을 열고 들어서자 그곳은 체력단련을 위한 각가지 운동기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자유인은 바벨의 쇠막대 봉을 꺼내어들고 두 번째 문으로 달려 갔다. 자물쇠에 쇠막대를 끼우고 아래로 힘을 가하자 자물쇠는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을 연 자유인은 비릿한 피 비린내 에 얼굴을 찡그렸다. 지하실 통로를 떠돌던 빛들이 쏜살같이 어두운 실내로 달려들었 다. 어둡던 실내가 희미하게 사위를 분간할 정도가 되자, 자유인의 눈은 바닥에 쓰러진 알몸의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얼굴 주위에 는 많은 양의 피가 흥건히 고여있었다. 자유인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여자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지만 왠지 불길한 느낌에 움직 일 수가 없었다. 다리가 가늘게 떨려오며 격한 감정의 폭풍이 가슴에서 몰아치기 시작했다. 자유인은 마음을 다져먹고 출입구 옆에 부착 된 형광등의 스위 치를 올렸다. 형광등은 실내의 처참함을 밝히기 싫었는지 몇 번 을 깜박이다가 마지못해 불을 밝히었다. 어둠이 모두 도망친 실내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었다. 바 닥에는 엄청나게 많은 피가 고여 있었고 고여있는 피들은 이제 막 굳어지려 하고 있었다. 쓰러진 여자의 주변에는 각가지 고문 기구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자유인은 자신의 추측을 부정하며 쓰러진 여자의 곁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자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자유인은 실내를 반 바퀴 돌아야 했 다. 걸음을 옮길 적마다 여자의 옆으로 돌려진 얼굴이 조금씩 시 야에 들어왔다. 여자의 얼굴을 절반 정도 확인한 자유인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자는 요시코, 요시코였다. 자유인은 황급히 무릎걸음으로 요시코에게 다가갔다. 요시코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자유인은 손가락을 요시코의 목에 갔다 데었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자유인은 요시코의 가슴에 귀를 밀착시켜 보았다. 심장의 고동이 전혀 없었다. 자유인은 요시코의 시체를 가슴에 끌어안고 오열을 터뜨렸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격함이 숨을 쉬기조차 힘들게 하였다. 자유인은 요시코의 시체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심하게 몸을 떨 었다. 분노와 절망과 원통함이 거세게 몰아쳐 왔다. 자유인은 요시코의 얼굴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요시코의 입에는 반쯤 끊어진 혀가 매달려 있었다. 극심한 고통에 힘들어했을 요 시코의 얼굴은 평온한 얼굴로 미소를 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자유인은 천천히 요시코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요시코, 무서워도 잠시만 기다려...곧 돌아올게....너를 이 지경 으로 만들어놓은 인간들을 데려올게...." 자유인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괴기스럽게 실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유인의 눈에서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유인은 일 층을 향하여 거침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현관 을 지키고 서있던 두 사내는 의아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하실에는 고문으로 초죽음이 된 여자 외에는 올라올 사람이 없 었다. 사내들은 발소리가 들려오는 계단을 살피러 자리를 옮겼 다. 두 사내가 계단이 꺾여지는 모퉁이를 내려다보는 순간 사내들은 동시에 비명을 질러 데었다. 어두운 지하에서 한 사내가 온 몸에 피 칠을 한 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사내의 모습은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두 사내는 사내의 빛나는 눈과 부딪치자 숨이 멎는 듯 한 전율 을 느꼈다. 자유인의 두 손이 사내들을 향하여 뻗어 나갔다. 두 개의 동전 이 허공을 가르며 두 사내의 양미간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두 사내는 날아드는 동전을 미처 확인하지도 못하고 계단 밑으 로 굴러 떨어졌다. 두 사내의 양미간에는 동전이 깊숙이 박혀 있 었다. 사내들의 놀란 눈이 자유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유인 은 두 사내의 옆구리를 발로 거세게 걷어찼다. 뼈가 부서지는 둔 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인은 사내들의 시체를 넘어 일 층으로 올라왔다. 일 층 현관 옆으로 첫 번째 문을 열자 실내에는 칠 팔 명의 사 내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내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의 모습에 놀라고들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내들은 멍하니 자유인을 쳐다보고만 있었 다. 자유인은 곧장 사내들 곁으로 다가갔다. 앞줄에 앉아 술잔을 손에 들고 멍하니 자유인을 쳐다보던 사내의 목을 자유인은 발끝 을 곧추세워 힘껏 찔러 찼다. 느닷없이 목에 공격을 받은 사내는 입으로 피를 토해내며 뒤로 자빠졌다. 사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주위에 몰려있던 사내들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자유인에게 술병을 던지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사내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유인은 발 앞에 있는 길다란 나 무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의자는 마치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 자유인에로 다가서려던 사내의 무릎 언저리에 강 하게 부딪쳤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사내가 무릎을 끓고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런 사내의 턱을 자유인의 발이 걷어 차 올리고 있었 다. 사내가 뒤로 나자빠지자 한 사내가 날렵하게 테이블 위를 날아 올랐다. 사내는 날아오른 탄력으로 자유인을 향해 발길질을 하였 다. 자유인은 사내의 발길질을 피하기 위하여 자리에 앉았다. 사내 의 다리가 자유인의 머리 위로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자유인은 그 순간에 주먹을 위로 뻗어 올렸다. 자유인의 주먹은 사내의 사 타구니에 정확히 적중하였다. 사내는 허공에서 바닥으로 시체처 럼 떨어져 내렸다. 세 명의 사내가 순식간에 쓰러지자 나머지 사내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며 섣불리 앞으로 나서질 않았다. 남아있는 네 사내 들 중 두 명의 사내는 술을 많이 마신 듯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 하고 있었다. 자유인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 사내들은 겁을 집어먹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술에 취한 한 사내의 손이 허리춤 으로 가더니 날이 시퍼런 칼을 꺼내들고는 자유인에게 비틀거리 며 달려들었다. 자유인은 가볍게 사내의 공격을 피하며 날아드는 칼을 낚아채었 다. 목표물을 놓친 사내는 휘청거리며 바닥에 곤두박질하였다. 자유인은 쓰러진 사내의 목을 발로 짓눌렀다. 사내의 숨막히는 비명이 고통스럽게 터져 나왔다. 전의를 상실한 세 사내는 더 이상 반격 할 용기가 없었다. 자유 인은 술 취한 사내에게 빼앗은 칼을 손에 들고 사내들에게로 다 가갔다. 구석으로 내몰리던 사내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바닥 에 무릎을 끓고 저항을 포기하였다. 자유인은 저항을 포기한 사내들에게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 다. "지하실에 있는 여자를 저 지경으로 만든 자가 누구냐?" "저희들은 안 그랬습니다!" "그럼 누가 그랬는지는 알고있겠지? 사실대로 말을 안하면 살아 남지 못한다." 사내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두 사람이 그랬습니다." "두 사람...누구지?" "요시오와 겐지 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나?"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들 갔습니다." "그들의 연락처를 알고 있나?" "네." "그럼, 그들에게 전화를 하도록....여자가 자살을 했다고...지금 빨리 와달라고." 사내는 전화기 옆으로 다가와 수첩을 뒤적이더니 전화를 하였 다. "형님, 접니다, 급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하실의 여자가 자살 을 한 것 같습니다, 네, 빨리 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사내는 전화를 끊고 다른 사내에게도 똑같은 내용의 전화를 하 였다. 자유인은 세 명의 사내를 한곳에 포박시켜 놓고는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 다른 방에는 다섯 명의 사내들이 머리를 맞대고 도박에 빠져 있었다. 사내들은 도박에 열중하느라 문이 열리는 기척도 모르고 있었 다. 자유인은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양손에 잡고는 사내들을 노려보 고 있었다. 마주한 사내의 얼굴이 들리며 자유인의 눈과 사내의 눈이 부딪 쳤다. 사내의 놀란 눈이 커지고 있었다. 자유인의 손이 앞으로 원을 그리며 나아가자 작은 동전이 쏜살같이 날아가 사내의 커다 란 눈에 꽂혔다. 사내는 눈을 감싸안으며 비명을 질러 데었다. 또 다른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사내가 자리에 서 채 일어서기 전에 사내는 목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토해냈다. 등을 보인 채 앉아있던 사내 둘이 재빠르게 몸을 돌리고 있었 다. 순간 자유인의 다리가 허공을 가르며 한 사내의 안면을 강타 하였다. 안면에 발길질을 당한 사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 에 나가 떨어졌다. 사내에게 뻗었던 다리를 걷어 드리는 순간에 자유인을 향 해 날 아오는 물체가 있었다. 불빛에 반짝이는 물체는 자유인의 팔뚝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예리한 단검이었다. 팔뚝에 뜨끔한 통증을 느낀 자유인은 빠르게 칼이 날아온 방향 을 살펴보았다. 동전을 목에 맞은 사내 옆에 있었던 또 다른 사내의 손에 단검 이 들려있었다. 사내는 팔을 뒤로 젖히며 재차 단검을 날리려 하 고 있었다. 자유인은 몸을 솟구쳐 사내에게로 날아갔다. 사내의 손도 그 순 간에 밑으로 내려지며 예리한 단검을 날리고 있었다. 사내의 손 을 떠난 단검은 자유인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자유인은 팔을 구부려 날아드는 단검을 막았다. 단검은 자유인의 팔뚝에 적중하였다. 사내에게 제일 먼 저 다가온 것은 자유인의 손이었다. 자유인은 사내의 단검을 팔 뚝으로 막아내고는 곧이어 다른 손으로 팔뚝에 꽂힌 칼을 빼내어 그대로 사내의 목을 향하여 날아들었다. 사내의 목에 사내의 단검이 깊숙이 파고들며 자유인의 몸이 사 내의 몸을 덮쳐 들었다. 몸이 성한 한 사내가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치려고 하였 다. 자유인은 팔뚝 위에 꼿혀 있는 단검을 빼내어 등을 보이고 있는 사내를 향하여 단검을 날렸다. 단검은 공기를 가르며 날아 가 사내의 뒤 목에 박혀 들어갔다. 뒤 목에 단검을 맞은 사내는 열려진 문을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 앉고 있었다. 자유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밑에 깔려있던 사내의 목 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사내의 양복 안 겨드랑 이 주변에는 예리한 단검이 칼집에 서너 개가 꽂혀 있었다. 자유 인은 사내의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뒤 주머니에 넣었다. 눈에 동 전이 박힌 사내는 고통에 신음을 내지르며 자유인을 성한 하나의 눈으로 노려보다가 자유인의 발길질 세례를 받고는 정신을 잃었 다. 자유인은 일 층과 이 층의 방들을 조사해 보았지만 더 이상의 적들은 없었다. 자유인은 현관 입구의 계단에 걸터앉아 주류 창고로 연결 된 도 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주류 창고로 연결 된 도로에 자동차의 불빛 이 비쳐지며 자동차가 빠르게 건물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자유인은 현관의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현관을 주시했다. 자동 차는 거칠게 현관 앞에 정차하더니 작은 사내가 황급히 현관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사내는 현관문을 열고 뛰다시피 복도로 향하는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었다. 자유인은 달려오는 사내가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에 사내의 팔 을 잡아당기며 다리를 걸었다. 사내는 보기 좋게 복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사내가 미처 사태를 깨닫기 전에 자유인은 사내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사내의 놀란 눈이 커지며 사태를 간파하 느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유인을 올려다보았다. 자유인은 사내를 이끌고 첫 번째 문으로 들어갔다. 구석진 자리 에 온 몸이 묶여있던 사내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자유인과 작은 사내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자유인은 작은 사내를 묶여있 는 사내 앞으로 끌고 갔다. "이자가 맞는가?" 묶여있는 사내는 고개를 떨군 채 대답이 없었다. 자유인은 묶여 있는 사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대답을 안하면 이놈 대신에 네가 먼저 죽는다." 묶여있는 사내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유인을 쳐다보았 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이자가 맞는가?" 사내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태를 파악한 작은 사내는 이를 갈며 묶여있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자유인은 작은 사내의 귀 밑 급소를 눌러 사내를 기절 시켰다. 작은 사내가 바닥에 쓰러질 무렵, 멀리 주류 창고에서 자동차의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자동차가 정지하는 소음이 크게 들렸다. 깡마른 사내가 황급히 현관을 통과 해 복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자유인은 작은 사내에게 펼쳤던 공격을 마른 사내에게 그대로 사용하였다. 마른 사내는 느닷없이 팔이 붙잡히며 발이 채이자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사내는 넘어지는 탄력을 이용해 바닥에서 몸을 구르며 저만치 나아갔다. 사내는 넘어지는 순간에 공격자를 파악하고는 제 이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몸을 굴리는 민첩함을 보였다. 자유인은 눈앞에 넘어지던 사내가 저만치 굴러가자 잠깐 주춤 하였다. 사내는 저만치 굴러가 몸을 튀기며 발딱 일어서더니 품 안에서 칼을 꺼내들고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자유인은 사내의 민첩함과 넘어진 이후로 지금 까지 일련의 동 작에서 사내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느꼈다. 사내의 손에는 칼 까지 들려있어 섣불리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오른 팔에 두 번 의 칼 세례를 받은 자유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사내는 칼을 손에 들고 자유인을 노려보며 미소를 짖고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였다. "흐흐흐...왠 놈인지 모르지만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 나...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사내는 독사 같은 눈빛으로 자유인을 쏘아보며 한 발을 앞으로 내 딛었다. 앞발을 내딛은 사내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뒤 발을 풍 차처럼 회전 시켰다. 사내의 긴 다리가 바닥에 원을 그리며 달려 들자 자유인은 몸을 솟구치며 사내의 공격을 피했다. 자유인이 허공에서 바닥으로 내려서는 순간에 앉은 자세로 다리를 회전 시 켰던 사내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내려서는 자유인을 향 해 칼을 뻗어 왔다. 사내의 공격은 예상보다 신속하고 민첩했다. 자유인은 날아드는 사내의 팔목을 손과 팔목을 교묘히 구부려 갈고리처럼 낚아채어 앞으로 끌어 당겼다. 자유인은 공격은 당랑권의 금나수법으로 어 지간한 상대는 빠져나가기 힘든 공격이었다. 사내는 팔목이 잡힌 채 끌려오며 짧은 순간에 다리를 쳐 올리며 자유인의 얼굴을 공격하였다. 자유인은 사내의 팔목을 놓아주며 뒤로 주춤 물러서야 했다. 자유인과 사내는 거리를 두고 공격 자세를 취하며 떨어졌다. "오....제법인걸...당랑권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내 공격을 피하 는 것을 보니 한가락하는 곳이 있어서 예까지 왔구만...누구야 도대체?...내 놈의 정체는..?" "잠시 후면 알게 될게다." "건방진 자식..." 사내는 말을 맞히며 언뜻 오른 쪽 벽을 쳐다보았다. 자유인은 사내의 극히 짧은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사내의 눈길에서 자유 인은 사내가 공격해올 방향과 방법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자유인 은 짐짓 다른 곳에 시선을 두며 자세를 사내가 공격하기 쉽게 유 도하였다. 사내는 갑자기 몸을 솟구쳐 두 발로 오른 쪽 벽을 내딛으며 자 유인의 옆얼굴을 향하여 발을 뻗었다. 예상 된 공격이었다. 자유 인은 사내의 발길질을 피하기 위하여 몸을 낮추며 미처 벽에서 떨어지지 않은 사내의 또 다른 다리를 단검으로 깊숙이 찔렀다. 사내는 바닥에 나가떨어지면서도 신속하게 몸을 일으켜 방어 자 세를 취했다. 그러나 사내는 공격당한 다리의 통증으로 몸을 제 대로 가누지 못 했다. 자유인의 예리한 발 차기 공격을 몇 차례 막아내던 사내는 뒤 걸음 치다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자 유인은 독수리처럼 빠르게 달려들어 사내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 다. 묶여있던 사내는 깡마른 사내를 쳐다보고는 체념 한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인은 두 번을 오가며 두 사내를 요시코가 잠들어 있는 지하실 방으로 끌고 갔다. 지하실에 내려선 마른 사내는 방안의 처참한 광경에 눈을 감았 다. 혀를 깨물고 죽은 시체는 냉정한 사내에게도 끔찍한 모습이 었다. 자유인은 두 사내의 팔을 뒤로 단단히 묶고 요시코의 시체를 일 으켜 세워 자신의 옷으로 요시코의 알몸을 가렸다. "요시코,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작자들이 네 앞에 있다. 어서 일어나 저자들이 네게 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복수를 하 란 말이다." 자유인은 요시코의 시체를 가슴에 끌어안고 절규하고 있었다. 팔이 뒤로 묶인 채 바닥에 무릎을 끓고 있던 두 사내는 자유인의 처절한 절규에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천사 같은 네가 저 작자들 같은 짓은 못 하겠지....내가 대신 하겠다. 네가 당한 만큼...." 자유인은 두 사내의 옷을 날카로운 칼로 찢어 벗기고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두 사내는 알몸이 되어 공포심에 몸을 떨고 있었다. "두려운가? 너희같이 잔인한 인간들도 두려움이 있는가? 흐흐 흐...우스운 일이구먼....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드는 백정 같은 인간들도 공포심이 있다니...." 자유인의 얼굴이 분에 못 이겨 붉어지면서 느닷없이 두 사내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다. 사내들은 벌렁 뒤로 나가 떨어졌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즐기기만 했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 겠다." 자유인은 바닥에 놓여진 채찍을 들고 사내들에게 휘둘렀다. 채 찍이 살에 부딪히는 소리와 사내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지하실 을 울리고 있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사내들의 몸에는 굵은 채 찍 자국이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떤가?...아픈가?...네 놈들이 이처럼 고통스러운 것을 보니 나약한 요시코는 더 고통스러워했겠군...네 놈들은 요시코의 고 통을 즐기고 있었겠지...이 개 같은 놈들." 자유인은 점차 이성을 잃고 사내들에게 요시코가 당했을 법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사내들의 몸은 처참하게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고통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자유인의 말에 사내들은 기대에 찬 얼굴로 자유인을 쳐다보았 다. "나는 너희들이 죽을 때까지 서서히 고통을 줄 생각이다. 어차 피 너희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단 한 번의 고통으로 죽고 싶 은 자에게는 혀를 깨물고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사내들의 얼굴에 당혹한 표정이 역력했다. 작은 사내는 죽음을 생각하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살수 만 있다면 사내에게 메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사내의 분위기는 어름처럼 차갑고 냉랭했다. 무엇보다 사내의 여자를 죽음으로 몰 아넣은 처지에서 사내에게 목숨을 구걸 할 염치가 없었다. 죽음 을 목전에 두고서 염치 따위를 염두에 둔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알량한 야쿠자의 자존심이 사내의 입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른 사내는 사내와의 결투에서 입은 다리의 상처에서 많은 피 가 흘러나와 고통이 더욱 심했다. 사내가 말 한데로 자신에게 다 가온 죽음은 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내가 말 한데로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한 순간의 고통으로 죽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각오를 한 마른 사내는 가만히 혀를 내밀어 이빨에 물어 보았 다. 순간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며 그 동 안 자신이 생각 없이 저질렀던 많은 악행들이 후회스럽고 고통받 았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른 사내는 고통스러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무릎을 끓고 쓰러 져있는 요시코의 시체를 향해 절을 하였다. 사내는 진실로 요시 코에게 사죄하고 있었다. 자유인은 사내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고 시선을 천장으로 옮겼다. 사내가 요시코에게 절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른 사내는 요시코에게 세 번의 절을 올리고 무거운 신음을 토 해내며 앞으로 쓰러졌다. 사내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 오고 있었다. 혀를 물고 쓰러진 마른 사내를 쳐다본 작은 사내는 두려움에 몸 을 떨기 시작했다. 사내의 죽음으로 혼자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보이자 사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작은 사내는 떨리는 입을 벌리고 혀를 길게 내 밀었다. 두 사내의 죽음을 지켜본 자유인은 갑자기 밀려드는 허탈감에 기운이 없었다. 사내들의 죽음이 조금은 애처롭게 느껴졌다. 위 로부터 내려온 명령에 사내들은 싫어도 고문을 해야만 한다는 사 실을 자유인도 알 수 있었다. 요시코의 죽음과 사내들의 죽음에 서 자유인의 분노는 명령을 내린 조직의 우두머리에게 쏠렸다. 자유인은 바닥에 흥건한 피를 손에 묻혀 벽면에 큰 글씨로 "다 까시오 내가 간다 기다려라" 라고 써 놓았다. 자유인은 요시코의 시체를 들쳐업고 지하실을 올라와 현관 앞으 로 나갔다. 현관 앞에는 사내들이 타고 온 자동차가 시동이 걸린 채 있었다. 자유인은 요시코를 뒤 좌석에 실어놓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문으로 들어가자 묶여있던 사내는 묶여있는 끈을 풀어 내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사내는 문을 열고 들어서 는 자유인과 마주치자 사색이 되어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유인은 사내를 앞세워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의 한 사무 실은 주류 창고의 주류 판매 대금을 관리하는 곳으로 철제 캐비 넛을 부수자 많은 현금이 보관되어 있었다. 자유인은 캐비넛의 현금을 집히는 대로 자루에 집어넣었다. 돈 자루를 들고 내려온 자유인은 자동차를 몰고 건물을 떠났다. 주류 창고 입구의 경비는 건물 쪽에서 나오는 자동차를 발견하고 는 경비실에서 나와 자동차가 지나치자 절도 있게 경례를 올리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거리는 을씨년스럽게 조용했다. 자유인은 자동차를 나고야 방향으로 몰았다. 도쿄에서 나고야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 면 산모퉁이에 화장터가 있었다. 자유인은 요시코를 화장(火葬) 시키고 싶었다. 도쿄에서 자동차로 1시간 가까이 떨어진 국도에 고급 승용차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자동차는 산모퉁이를 돌아서며 서서히 속도를 낮추었다. 자유인은 화장터 입 간판을 확인하고는 자동차의 방향을 화장터 로 향했다. 산의 중턱까지 포장 된 도로는 심하게 굴곡 져 있었 다. 산의 중턱에 하얀 색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의 지 붕 위에 높이 세워진 굴뚝이 눈에 들어오자, 자유인은 착잡한 생 각에 운전대에 얼굴을 묻고 한 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시마또와 고노모는 초저녁부터 술판을 벌렸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돌아오는 당직 근무를 맨 정신으로 지내기에는 두 사람 모 두 경력이 짧았다. 그리 크지는 안치만 그래도 이 층 건물의 화 장터를 밤새워 두 사람이 지키기에는 무섭기도 하였고 잠도 제대 로 오지를 않았다. 시마또는 유달리 무서움을 많이 탔다. 입사 후 처음으로 당직 근무를 서던 시마또는 밤새 공포에 떨며 두려워했다. 같이 당직 을 서던 상대는 늙은 선배로 옛 부터 화장터의 화부(火夫)로 잔 뼈가 굵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초저녁에 자신의 무용담을 신출내 기 시마또에게 늘어놓았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는 사람을 화장시킬 때 사람 크기보다 조금 큰 둥그런 타원형의 화로에 사 람을 눕혀놓고 그 밑에 서너 곳의 구멍에 몇 명의 화부가 나무나 조개탄을 불피워 사람을 화장 시켰는데 사람이 타는 악취와 사람 이 타들어 가면서 쪼그라드는 형상에 처음 화부질을 하는 사람은 구토를 한 달은 해야만 했다는 얘기와 낮에 화장한 사람이 밤에 나타나 뜨겁다며 쫓아다니는 경우도 있었다는 얘기를 하였다. 처음 당직 근무에서 선배 노인이 말한 경험담은 1년이 지난 지금 도 당직 근무 때면 생각이 떠올라 시마또를 두렵게 하였다. 고노모도 사실 두렵기는 마찬가지 였지만 고노모는 당직 근무의 두려움을 다른 방법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고노모의 방법은 당직 근무가 있는 날이면 십 여 편의 포르노 테이프를 가져와 밤새 비 디오를 보았다. 고노모와 당직 근무가 이루어지는 날이면 시마또 의 두려움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다. 그것은 고노모가 가져오 는 포르노 테이프가 다양하면서도 질적으로도 우수한 내용이 많 았다. 고노모가 알고있는 포르노 테이프의 수는 수 백 개를 넘어 서는 그 방면의 전문가였다. 요사이 고노모가 빠져있는 포르노 테이프는 "나비의 향연"이라는 테이프였다. 오늘도 고노모는 화장터의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육중한 철문 을 닫고 나자 서둘러 저녁을 먹고는 준비해온 술병을 꺼내었다. 고노모는 술을 거나하게 마신 뒤에야 포르노 테이프를 보는 습관 이 있었다. 고노모는 오늘따라 술을 급하게 마셨다. "고노모, 왜 그렇게 술을 빨리 마시나?" "응, 빨리 마셔버리고 테이프를 봐야지....요즘 집에 장모님이 오셔서 테이프를 볼 기회가 없었거든...그리고 어제 저녁에 도쿄 에 나가 새로운 나비의 향연을 구했거든...주인 얘기로는 지금까 지 나온 나비의 향연 중에서 제일 뛰어난 내용이라 하더라고." "그래! 그럼 빨리 마셔야 하겠구만." 시마또는 고노모의 말에 술잔을 서둘러 비웠다. 나비의 향연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시마또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내는 술판을 치우고 숙직실의 비디오에 테이프를 꽂았다. 테이프가 돌아가며 TV의 화면에서는 나비의 모양이 나타나며 시 작을 알렸다. 나비의 그림이 희미하게 사라지자 화면에는 수많은 남녀가 벌거 벗은 모습으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벌거벗은 남녀들은 모 두가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이 없는지 신체의 중요한 부위를 당당 히 드러내고 있었다. 화면은 서서히 남녀들이 주시하는 곳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제 단이 보이고 그 밑에 커다란 침대가 보이고 침대 주변에는 서너 명의 사제들이 당당한 자세로 서 있었다. 신도는 물론이고 사제 들도 모두가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는 나비 가면을 착용하고 있 었다. 제단 옆의 문에는 이들이 모시는 조물주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 었다. 밝은 조명이 문을 비추자, 조물주의 형상은 살아 움직이듯 괴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흰색의 망사 가운을 걸친 여자들이 두 줄로 걸어 나왔다. 여자들의 뒤를 청색 망사 가운을 걸친 남자들이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청색 가운을 걸친 사내들이 제단 밑으로 내려오자 신도들은 열 광적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잠시 후 신도들의 무리 속에서 한 여자가 손을 들고 앞으로 나 섰다. 여자는 제단 중앙의 조물주 형상에 절을 하고는 침대에 누 웠다. 여자의 벗은 몸은 탄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적당히 검은 피부 색은 건강미가 있어 보였고 군살 없이 잘록한 허리와 퉁겨질 것 같은 엉덩이는 사내의 눈길을 붙잡아 두기에 충분한 몸매를 소유 하고 있었다. 여자가 침대에 눕자 사제들이 다가와 조물주의 피라는 적포도주 를 여자의 몸에 쏟아 붓고 있었다. 고노모와 시마또는 TV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시마 또는 화면에 비쳐지는 여자들의 나신을 보며 속으로 감탄하고 있 었다. 대다수의 여자들은 뛰어난 육체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비 가면으로 인하여 정확한 나이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탄력 있는 육체로 미루어 젊은 여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더러는 아 래 배가 조금 튀어나온 여자들도 있었지만 심한 경우는 아니었 다. 고노모의 자랑처럼 이번 나비의 향연은 지난번에 보았던 테이프 와는 조금 다른 화면이 보이고 있었다. 여자의 몸에 적포도주를 쏟아 붓는 것도 그렇고, 여자의 곁에 청색 가운을 걸치고 서있는 사내들의 수도 많았다. 청색 가운을 걸치고 있던 사내들이 동시에 가운을 벗어버리자, 사내들의 알몸이 드러났다. 가운을 벗은 사내들은 모두 다른 피 부색을 갖고 있었다. 검은 피부의 흑인이 있었고 하얀 피부에 황 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사내도 보였다. 여자는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사내의 방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고노모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테 이프 판매상이 말했던 것처럼 이번 나비의 향연은 전에 나왔던 나비의 향연에 비하여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고노모는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짖고 있었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나비의 향연을 지금까지 몇 편을 보았지만 모두가 사람의 말소리가 없었다는 점 이 못내 아쉬웠다. 사제가 유리 주전자에 들어있는 포도주를 들고 와 여자에게 쏟아 부었다. 여자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묵직한 아픔에 침대의 시트를 손아귀 에 움켜잡았다. 흑인 사내의 행위가 끝나자 여자는 지칠 데로 지쳐 침대에 쓰러 져 움직일 줄 몰랐다. 쓰러진 여자의 몸을 사제들이 정성껏 씻어 내었다. 그리고 처음 처럼 여자의 몸 위에 많은 양의 포도주를 쏟아 부었다. 두 사내는 말을 하면서도 화면 속의 장면들을 놓치지 않았다. 세 명의 사내가 달려들어 온 몸을 핥아 데자 여자는 다시금 열 정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여자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머리맡에 앉아있던 두 사내가 여 자의 양어깨를 짓눌렀다. 고노모는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움직일 줄 몰랐다. 그러나 시마또는 역겨운 감정이 들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화면 속의 사내 를 죽이고 싶다는 분노가 밀려들었다. 시마또는 화면을 외면 한 채 고개를 돌리고 잠을 청했다. 시마또는 꿈속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났다. 비디오 테이프를 모두 보았는지 고노모는 옆자리에 누워 심하게 코를 골아 데고 있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자정이 넘어 있 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던 시마또는 멀리 정문의 철문을 두드리 는 소리를 듣고는 오싹한 한기를 느껴야 했다. 자정이 넘은 새벽에 화장터의 닫혀진 철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키 어려운 일이었다. 화장터의 같은 직원이라면 당연히 전화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갖가지 상상이 떠오르며 공포심이 밀려왔다. 옆자리에 고노모를 흔들어 깨우며 시마또는 언젠가 TV에서 보 았던 장면처럼 고노모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염려가 되었지만 고노모는 짜증을 부리며 눈을 떴다. "왜 그래 시마또?" "고노모 이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 고노모는 잠을 깬 것이 화가 나는지 역정을 내고 있었다. 역정 을 내던 고노모의 눈이 순간 커지고 있었다. 고노모는 멀리서 철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잖아.." "들었지? 혹시 귀신이 아닐까?" "이 친구는...귀신은 무슨 귀신...나가 보자고." 고노모는 시마또의 말에 핀잔을 주었지만 사실 고노모도 적지 않은 공포심이 들었다. 새벽에 화장터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고노모는 시마또를 재촉하여 숙직실을 나와 소리가 들려오는 출 입구의 철문으로 향했다. 시마또는 화장터의 모든 전등을 밝게 밝혀 놓았다. "누구요?" 고노모는 철문의 틈새로 바깥의 동정을 살피며 물었다. 한 사내 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들쳐업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이 밑에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전화를 빌렸 으면 합니다." 사내의 말에 시마또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온 몸에 피 칠을 한 사내가 여자를 등에 들쳐업고 한 손에는 자루를 든 채 들어서고 있었다. 시마또는 사내의 행색 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화장 장이 있는 본관 건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시마또는 사내를 막아서지 못하고 고노모를 쳐다보았다. "이것 보세요, 전화는 여기 경비실에 있습니다." 고노모의 외침에도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노모가 달 려가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봐요, 전화는 입구에 있다는데 어디를 함부로 들어가세요." 사내를 가로막던 고노모는 사내의 눈과 마주치자 숨이 멎는 것 같은 중압감을 느끼고 옆으로 슬그머니 비켜섰다. 고노모와 시마 또는 사내의 뒤를 쫓아 본관 건물 안에까지 들어왔다. 건물 안에 들어선 사내는 고노모와 시마또를 싸늘한 눈초리로 노려보며 말을 하였다. "긴말은 하지 않겠오, 이 여자를 화장시켜 주시오." "네, 뭐라고요?" 고노모와 시마또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며 사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여자를 화장시켜 달라고 했오. 지금 당장..." "화장을 하시려면 아침에 오셔야 합니다. 절차도 밟아야 하고 요." "알고 있소.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지금 해주셨으면 하 오." 고노모와 시마또는 어이가 없었다. 막무가내로 등에 들쳐업은 여자를 화장시켜 달래는 사내가 답답했지만 사내의 말투와 몸에 서 풍기는 살벌함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안됩니다. 그리고 화장을 하려면 병원에서 발급하는 사 망 진단서가 있어야 합니다. 아...그리고 지금처럼 교통사고로 사 망을 했을 경우에는 경찰의 확인서도 필요합니다." 고노모는 용기를 내어 화장이 불가한 사유를 당당히 설명하였 다. "교통사고는 아니오." "아까 이 아래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잖아요?" 시마또는 주눅든 목소리로 사내에게 반문하였다. "미안하게 되었오. 그렇지 않으면 문을 열어 줄 것 같지 않아 서..." "아무튼 지금 이 시간에 화장은 안됩니다. 만약 화장을 하게되 면 우리 밥줄이 날아가게 됩니다. 아니...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 다." 고노모의 강경한 입장 표현에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자루를 바 닥에 쏟아 부었다. 자루 속에서는 엄청난 돈 다발이 쏟아져 나왔 다. 고노모와 시마또는 난생 처음 보는 엄청난 액수의 돈 다발에 놀라고 있었다. "화장을 해주시면 이 돈은 두 사람의 돈입니다. 이 돈이면 두 사람 모두가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는 거액입니다. 그리고 당신들 이 염려하는 그런 불행한 사태는 없을 것입니다. 이 여자나 나는 이 세상에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내의 말투는 사뭇 부드럽게 부탁 조로 변해 있었다. 고노모와 시마또는 서로를 쳐다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거절하기에는 사내가 내놓은 돈이 너무도 액수가 엄청났다. 지금 의 월급을 평생 모은다 하여도 만질 수 없는 금액이었다. "잠깐 의논을 하고 오겠습니다. 시마또 나 좀 봐." 고노모는 시마또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시마또 어떻게 생각해?" "글...글세...난 정신을 못 차리겠어...뭐가 뭔지." "이것 봐, 시마또 저 돈이면 평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다고." "그래 맞아. 하지만 이 사실을 누군가가 알면 우린 어떻게 되냐 고?" "별 걱정을 다하네. 시체는 한 구야 불을 피워도 굴뚝에 연기도 안 올라와..." "정말 괜찮을까?" "걱정하지마...10분이면 우리는 부자가 되는 거야." 고노모와 시마또가 건물로 들어서자 사내는 여자를 끌어안고 슬 픈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장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고맙군요." 사내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떨리고 있었다. 고노모와 시마또는 연소실의 가스 불을 점화 시켰다. 관(棺 )의 크기보다 조금 큰 작은 문이 열리자, 터널처럼 긴 공간의 바닥에 는 수 십 개의 불구멍이 있었고 불구멍에서는 파란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사내는 시마또와 고노모의 도움을 마다하고 손수 여자의 시체를 연소 실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사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 져 흐르고 있었다. 울음소리를 참아내려는 듯 사내는 입술을 깨 물고 있었다. 깨물린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작은 문이 닫히자 고노모는 가스의 주입 량을 최대로 틀어 놓 았다. 작은 문에 조그맣게 뚫어진 유리창으로 시뻘건 불꽃이 솟 아오르고 있었다. 사내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절을 하고 있었다. 자유인은 복받쳐 오르는 서러움에 눈물을 창을 수가 없었다. 요 시코를 보내는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사랑을 눈앞에 두고 떠나야 했던 요시코의 아픔을 생각하자 서러움이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요시코를 만난 자신이 한스럽게 원망스러웠다. 자신만을 믿고 부와 명예를 버리고 따라나선 요시코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요시코, 잘 가거라. 부디 저승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거라....너 를 보내는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지만 내게는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자유인은 다까시오의 이름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기술원에 상주하며 정보를 수집하던 혜라와 김 형사는 또 다른 사건에 부딪쳤다. 혜라와 김 형사가 기술원에 상주한 지 삼일 째 되는 날부터 유 전자공학과 식품공학에 근무하는 두 명의 박사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 첫 날 두 박사의 결근에 대해서 혜라나 김 형사는 별 혐의를 두 지 않았다. 그러나 두 박사가 나란히 이틀 째 결근을 하자, 이 상한 낌새를 느끼고 두 박사의 신변을 조사하여 보았더니, 두 박 사는 같은 날 저녁에 집을 나가 연락이 없었다. 혜라와 김 형사는 각자 한 명씩 맡아 실종 된 박사의 주변을 조 사해 보았지만 이렇다 할 혐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실종된 지 사흘 째 되는 날, 박사로부터 잘 있다는 전화를 받았 다는 가족의 말에 따르면 박사들은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 당분 간 자신을 찾지 말라는 연락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두 사람은 사라진 박사들의 행적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편 박경감의 인솔로 문제의 전구를 사용한 신축건물을 조사 하는 팀에서도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박 경감은 문제의 전구를 만드는 회사에서 전국의 대리점에 물 건을 출하하는 점을 염두에 두고 대리점을 면밀히 조사했지만 대 리점은 물건을 받아 소규모 영세 사업장에 물건을 풀어놓는 관계 로 조사에 애를 먹고 있었다. 전국에 산재한 대리점과 영세 사업 장은 그 수가 수천에 달하고 있었다. 실제로 문제의 전구는 어느 동네나 한 둘은 있을 법한 전파사에도 비치되어 있었다. 박경감은 기술원에 상주하던 혜라와 김형사를 기술원에서 철수시키고 특수부의 모든 요원을 박 경감의 팀에 투입 시켰다. 요원들은 전국의 시와 구 읍 면 동사무소를 상대로 최근 2년 동 안에 새로 신축한 건물과 개보수를 실시한 건물에 대하여 광범위 한 수사에 들어갔다. 혜라는 경기도 일대를 전담하고 있었다. 경기도 이천의 진리교 본당에는 제사장을 비롯하여 모든 사제들 이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제사장은 심기가 불편 한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거야?" 제사장의 호통에 사제들은 얼굴을 숙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 다. "왜 말들이 없어. 종식이 너 다시 한 번 자세히 얘기해 봐." "예, 형님, 그게 그러니까 지난번에 우리가 처리한 기자 놈 아 시죠? 그 놈이 우리가 만든 테이프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하지 만 그 단서는 죽은 그 놈만이 알고있던 사실이었는데, 그 기자 놈의 시체가 발견되므로 대검 특수 부에서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기자 놈이 우리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특수 부에서 알게 되 었습니다." "그래서...빨리 좀 얘기해...답답해 죽겠어." 제사장은 사내에게 언성을 높이며 다그치고 있었다. "네, 죄송합니다. 그래서 특수 부의 여자 요원이 우리 테이프를 면밀히 조사 하던 중 기자 놈이 알아냈던 단서를 그 계집이 알아 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제작한 테이프 중에 여섯 번째의 테이프 에 잠깐 그것도 아주 잠깐 천장에 붙어있는 전등이 찍혀 있었습 니다. 그 전등은 국산 제품으로 수명이 다되면 전등이 꺼지기 전 에 깜박거리는 신제품으로 특허를 내고 조만 간에 일본으로도 수 출을 할 계획이랍니다. 그 계집은 깜박이는 전등의 비밀을 알아 내어 우리의 테이프가 국내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특수 부에 밝혔고, 특수 부는 전 인원을 동원해서 문제의 전등이 부착 된 건물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야, 우리 나라에 수 없이 많은 건물들을 어떻게 모두 조사하고 다니나, 별것도 아닌걸 가지고 호들갑이야." "형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또 왜?" "특수부가 조사하는 건물은 최근 2년 사이에 신축 된 건물을 상 대로 수사를 좁혀오고 있습니다. 그 문제의 전등이 개발 된 것이 1년을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사내의 설명에 제사장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특수 부 의 손길이 이 상황까지 왔다면 결코 마음을 놓을 처지가 아니었 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나?" "우선 우리의 집회 장소를 철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갑자기 들 이닥칠지도 모르는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건 물에 부착 된 전등도 모두 교체해야 하겠구요. 그리고 당분간 집 회는 연기해야 하겠습니다." 제사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한 숨을 내 쉬었다. 당장 집 회를 열지 못하면 매달 일본으로 보내지는 나비의 향연을 제작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본에 지금의 상황을 알려야 했 다. 제사장은 기분 나쁜 야마다의 목소리를 생각하자, 화가 치밀 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태를 비밀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제사장은 야마다가 얘기했던 마지막 카드를 떠 올려 보았다. 될 수 있으면 제사장의 생각은 마지막 카드까지는 사용하고 싶은 마 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태를 야마다가 알게 된다면 틀림 없이 마지막 카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릴 것이 분명 했다. 제사장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사제들도 제사장의 눈치만을 살 피고 있었다 . 제사장은 각오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집회는 당분간 열지 않는다. 각 구역의 전도사들에게는 적당한 구실로 신도들에게 집회의 연기를 알리게 하고, 지금 당장 지하 에 있는 집회 장소를 철거하여 평범한 사무실이나 창고로 개조하 고 본당에 기거하는 신도들은 몇 명이나 되는가?" "네, 기술 원에서 지난주에 옮겨온 2 명의 박사와 흑거미와 그 의 얘들이 10 명이고 형님의 수발을 드는 여자아이들이 8 명, 모두 21명입니다." "조만 간에 특별한 의식이 있을지도 모른다. 의식이 끝나면 2명 의 박사와 여자아이들은 없애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아마도 앞으 로 치러질 의식은 우리에게 마지막 의식이 될지도 모른다. 의식 을 끝내면 우리는 일본으로 들어간다." 제사장의 말에 사제들은 이제 때가 되었음을 알고 모두가 숙연 한 표정으로 제사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특수 부에서 우리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 여자란 말이 지?" "네, 이름은 장혜라이고 지금도 우리의 뒤를 쫓고 있는 것 같 습니다." 제사장은 이를 악다물며 장혜라의 이름을 되새기고 있었다. "독거미에게 연락해 그 건방진 계집을 죽이라고 해." 사제들이 물러가자 제사장은 일본으로 전화를 걸었다. 오사까에 자리한 다까시오 조직의 건물 앞에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과 검은 색의 건물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는 평소보다 두 배의 건장한 청년들이 경호를 서고 있었다. 몇 칠 전부터 다까시오 조직의 본부에는 팽팽한 긴장감 이 맴돌고 있었다. 야마다는 몇 칠 전 도쿄의 지부에서 급히 알려온 소식에 깜짝 놀라 황급히 도쿄로 달려가 문제의 현장을 직접보고 돌아왔다. 도쿄의 지부에 도착 한 야마다는 요시코라는 여자를 고문했던 두 명의 조직원이 처참하게 살해된 현장과 그들이 죽은 현장의 벽면에 피를 찍어 써놓은 자유인의 경고문을 접하고 불안감을 떨 쳐버릴 수가 없었다. 당시 건물에 있던 조직원 중에는 무술에 능 한 자들도 있었고 죽은 두 명의 조직원 중에 한 명은 뛰어난 무 술 솜씨로 싸움에는 타고난 실력자 였는데도 무참히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현장에 있던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자유인은 혼자였다고 했다. 혼자라는 사실에 야마다는 전율하고 있었다. 자유인이 표 적으로 삼은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 는 사실이 새삼 피부로 느껴져 왔다. 야마다는 죽고싶은 심정으로 사건의 내용을 오야봉에게 보고 할 수밖에 없었다. 보고를 들은 오야봉의 표정이 잠깐 변하는 것을 오랜 세월 오야봉을 가까이 서 모셔온 야마다는 알아차릴 수 있 었다. 야쿠자들의 수많은 전쟁에서 살아온 오야봉은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이지 않는 대범함과 용기를 갔고 있었다. 그러한 오 야봉이 자유인에게 당한 도쿄의 사고를 접하고는 당황하는 기색 을 잠깐 보였다는 것은 오야봉도 자유인을 두려워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만큼 자유인은 암살자로의 명성이 자자했다. 자유인 은 죽음의 사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야마다는 곧 바로 오야봉의 신변 경호요원을 보강하고 만일의 사태를 위하여 자신의 주변에도 경호원을 배치 시켰다. 경호 요원을 배치하였어도 야마다의 불안감은 없어지질 않았다. 자유인이 벽에 써놓은 경고는 분명 오야봉을 향한 것이었지만 자 신도 안심할 처지는 못되었다. 모든 지시 사항은 자신이 내렸고, 혼도 의원의 살인을 자유인에게 청부한 사람도 본인 자신이었다. 한 낮의 따뜻한 봄 햇살이 창가로 밀려와 나른한 졸음이 밀려 왔지만 야마다는 머리를 흔들며 졸음을 쫓고 있었다.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기에는 자유인의 공포가 허락하지를 않았다. 전화벨 소리에 정신이 맑아진 야마다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입니다." "그래, 돌려." 비서가 전화를 돌리자, 야마다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을 하였 다. "네, 전화 바꿔 습니다." "안녕 하십니까, 야마다상."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제사장님 아니세요." "그 동안별일 없으셨는지요?" "아..네, 염려 덕분에...그런데 어쩐 일로 제사장님이 전화를 다 하셨습니까?" "저....그게....문제가 좀 생겨서..." "문제요? 무슨 문제입니까?" 제사장은 속 시원히 말을 하지 못 했다. "대체 무슨 문제인데 말을 못 하십니까?" 제사장의 설명을 모두 들은 야마다는 잠시 말을 끊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야마다는 은근히 끓어오르는 울화를 삭히려고 급히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러나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제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렇치 않아도 자유인의 문제로 본인은 물론이고 오야봉 조차도 심기가 안 좋은데 이러한 상황에서 진리교의 문제를 오야 봉에게 보고해야하는 자신의 입장이 화가 났다. 야마다는 제사장 에게 화를 쏟아 부었다. 야마다의 화풀이에는 자유인의 존재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화로 변해서 애꿎은 제사장이 벼락을 맞고 있었다. "도대체 진리교의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사태가 그 지경이 되도 록 가만히 있었습니까?"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게 죄송하다는 말로 해결될 문제입니까, 오야봉이 얼마나 진 리교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세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카드는 철저하게 준비할 예 정입니다." "뭐라고요, 아니 어디서 함부로 마지막 카드를 운운하고 있습니 까? 그런 결정은 오야봉이 하신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죄송합니다. 제 생각에 마지막 카드를 써야 할 때가 아닌가 해 서..." "닥치세요, 결정은 우리가 합니다. 오야봉에게 보고 드리고 전 화를 할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야마다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 다. 전화를 끊은 야마다는 실내를 서성이며 오야봉에게 보고 할 내 용을 머리 속에 정리해 보았다. 오야봉의 심기가 안 좋은 상태 여서 자칫하면 진리교 해체의 불똥이 자신에게 떨어질 수도 있었 다. 야마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오야봉에게 진리교의 상황을 설명 하였다. 오야봉은 의외로 담담히 야마다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가 있겠지....한국 경찰에도 인재가 있 었구만." 오야봉의 체념 어린 말투에 야마다는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바닥에 무릎을 끓고 머리를 조아렸다. "일어나라 야마다. 실수는 누구나 있는 것이야....얼마 전에도 우리는 실수를 범했어...자유인...그 자의 여자를 건드리지 말았 어야 했어. 그자라면 충분히 자기의 여자 정도는 보호할 수 있는 자였어. 장군님이나 우리 모두가 너무 그 자를 과소 평가했어... 공연히 적을 하나 만든 꼴이 되었지..." 오야봉의 입에서 자유인이 거론되자 야마다는 자유인의 그림자 가 오야봉의 주위에 맴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야마다, 장군님께 진리교의 상황을 말씀드리고 결정을 내리겠 다. 돌아가 있거라." "네, 알겠습니다." 야마다가 돌아가자 오야봉은 곧 바로 장군에게 전화를 하였다. "아니, 이게 누군가...오야봉 아니신가...어쩐 일로 오야봉이 전 화를 다 하시고..." 오야봉의 전화를 받은 부총리는 기분이 좋은지 오야봉에게 존대 를 써가며 농담을 하고 있었다. 부총리는 오야봉과 단독으로 만 나는 자리나 사적인 대화에서는 종종 농담을 하는 각별한 사이였 다. "장군님, 죄송합니다, 한국의 진리교에 문제가 생겨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뭐라고, 진리교에 문제가 생겼다고?" 부총리의 목소리가 묵직한 톤으로 바뀌었다. 조금 전의 밝고 명 랑한 목소리는 삽시간에 사라지고 긴장감이 감도는 목소리가 오 야봉을 짓누르고 있었다. 오야봉의 설명을 모두 들은 부총리는 일방적으로 약속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야봉은 전화를 끊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 나와야 했다. 부총 리가 약속한 시간에 도쿄까지 가려면 급히 서둘러도 촉박한 시간 이었다. 오사까에서 도쿄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거리였지만 오야봉의 느낌에는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고 온 기분이었다. 부총리를 은 밀히 만나는 자리에는 경호원을 대동하고 움직일 처지가 아니었 다. 오사까를 떠나 도쿄에 도착하는 시간 내내 오야봉의 머리에 는 진리교의 해체 사실보다는 자유인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이 떠 나질 않았다. 거리에도 심지어 비행기 안에서도 자유인이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에 초조하기 조차했다. 자신의 목숨 을 노리는 자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인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은 오야봉의 행동을 굼뜨게 만들었다. 도쿄 시내의 하라쥬꾸 공원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모여든 젊은이들은 하나의 관광 상품이 되어 그들의 옷차림과 행 동거지를 구경하려는 관광객들로 공원은 어수선했다. 부총리와 만나기로 약속된 장소의 맞은 편에는 머리를 붉은 색 으로 염색한 소녀가 기타를 쳐대며 악을 쓰고 있었다. 노래를 부 르는 소녀의 뒤에는 같은 또래의 남녀가 노래에 맞혀 춤을 추고 있었다. 오야봉은 미친 듯이 노래하고 미친 듯이 춤을 추고있는 아이들 을 보느라고 부총리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 했다. "재미있나?" 부총리의 목소리에 오야봉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냥...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좀 걷지." 오야봉은 앞서 걸어가는 부총리를 쫓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 다. "오야봉." "네, 장군님." "진리교가 언젠가는 해체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조금 빠른 것이 섭섭한데....자네 생각은 어떤가?" "네, 저도 장군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지...아쉬운 마음은 들지만 어쩔 수 없지....여기서 만족하 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장군님." "죄송하기는 그게 어디 오야봉 잘못인가...이제 마지막 카드를 사용할 때가 온 것 같구먼....인원이 많치 않은 게 아쉽지만 그래 도 한국이 자랑하는 인재들이니 효과야 있겠지?" "물론입니다. 수는 적어도 한국 최고의 인재들이 수두룩합니 다." "좋아. 마지막 카드는 준비되어 있겠지?" "네, 장군님, 장군님이 결정을 내리시면 내일이라도 제가 직접 날아가 시작을 하겠습니다." "그래...그럼 시작하라고. 철저하게...." "알겠습니다. 장군님." 공원의 수많은 사람들은 중년의 사내와 늙은 노인이 함께 걸어 가는 것에 관심을 두고있지 않았다. 부총리와 오야봉은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으면 단 둘만이 공원을 찾아와 중요 사항들을 결 정지었다. 부총리는 자연스럽게 인파에 묻혀 공원을 떠나고 있었다. 오야 봉은 부총리가 떠나자 오사까로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도쿄 지부 를 방문했다. 오야봉은 자유인이 휩쓸고 지나간 도쿄 지부를 직접 보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도쿄 지부는 사전에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오야봉을 대하느라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오야봉의 표정은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 져 있었고 말없이 피해를 당한 지하실과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특히 지하실에서 오야봉은 장승처럼 우두커니 전면의 벽을 오래 도록 응시하며 움직일 줄 몰랐다. 오야봉은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는 부하들의 권유를 거절하고는 오사까로 돌아왔다. 오사까에 도착한 오야봉은 공항으로 영접 나온 야마다를 돌려보 내고 손수 승용차를 몰고 시내로 들어갔다. 까닭없이 허탈한 기분과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위치가 새삼 고 독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조직을 이끌러 오느라 오야 봉은 가정을 갔지 못 했다. 아니 가정의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오야봉은 승용차를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루미 가 살고있는 아파트로 향했다. 하루미는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아가씨로 가정 형편이 어려 워 학비 조달을 위하여 요정에 첫 출근 하는 날 오야봉의 눈에 띈 아가씨였다. 오야봉은 하루미의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 전액 과 아파트를 구입해 주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오야봉을 하루미는 반가운 마음에 오 야봉의 품에 달려들었다. 거의 두 달 만에야 찾아온 오야봉이 보 고 싶었지만 오야봉의 연락처나 사무실의 위치도 하루미는 모르 고 있었다. 아무리 물어보아도 오야봉은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 지 않았다. 한 동안 오야봉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려 있던 하루미는 환한 미 소를 지으며 오야봉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제가 보고 싶지도 않으셨어요?" "일이 바빠서 못 왔다." "피...언제나 일....아참, 저녁 식사는....안 하셨죠? 제가 금방 식사 준비를 할께요, 그 동안 회장님은 목욕부터 하세요." 하루미는 서둘러 욕실의 물을 받아놓고 오야봉이 입을 가운을 준비 하는 둥 부산을 떨었다. 짧은 반바지 위에 헐렁한 면티를 걸쳐 입은 하루미는 피부색이 하얗고 얼굴이 앳된 청순한 이미지를 갔고 있어 한 송이 백합꽃을 보고있는 기분이 들었다. 짧은 바지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늘씬하게 뻗어있어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다. 오야봉이 목욕을 끝 마치고 나오자 하루미는 식사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고있는 하루미를 보자 오 야봉은 갑자기 왕성한 식욕과 함께 뜨거운 성욕이 밀려들어와 서 둘러 식사를 끝내고 하루미를 끌어안으려 하였다. 하루미는 오야봉의 손길을 미소로 뿌리치며 식탁을 치우고 욕실 로 들어갔다. 오야봉은 담배를 찾아 불을 붙이고 물소리가 들려오는 욕실을 쳐다보았다. 물소리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것 으로 미루어 하루미는 샤워기를 틀고 그 아래에 자신의 알몸을 내 맡기고 있는 것 같았다. 물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있는 오야봉의 눈에 하루미의 싱싱한 알몸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불같이 밀려드는 성욕에 오야봉의 몸은 뜨거워지고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오야봉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을 향해 걸어 가며 가운을 벗어 버렸다. 욕실 문을 열자 안개처럼 희미한 수증기 사이로 하루미의 알몸 이 보였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흠뻑 맞고 있는 그녀 의 새하얀 피부는 욕실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오야봉은 잠시 그녀의 벗은 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검 은 생머리가 물에 젖어 어깨에 달라붙은 그녀의 벗은 몸은 카멜 레온처럼 변신하여 청순한 이미지를 감추고 사내를 유혹하는 요 부로 강렬한 흡인력을 내뿜고 있었다. 오야봉의 인기척을 느낀 그녀는 깜짝 놀라며 가슴과 사타구니를 가리고 오야봉을 바라보았다. 오야봉을 여러 번 상대했던 그녀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서두르는 기색이 보이는 오야봉을 의아한 눈 으로 바라보았다. 오야봉은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로 천천히 걸어 들어 가 그녀의 등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은 오야봉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머리에서 향긋한 사과내음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사내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자 그녀는 숨이 막히는 희열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등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서있는 사내의 단단 한 몸이 자신의 몸에 강하게 밀착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흥분 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하루미는 사내의 손이 온 몸을 더듬고 다니자 흥분으로 몸을 움직였다. 오야봉은 하루미를 돌려 세웠다. 그녀의 가늘고 긴 목덜미로 물 줄기가 쏟아져 내려 가슴 사이로 흘러내려 가고 있었다. 오야봉은 하루미의 전면을 잠시 쳐다보며 감상하고 있었다. 언 제 보아도 하루미의 육체는 오야봉을 황홀하게 만들만큼 매력적 인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는 그녀의 몸매를 신 비스럽게 만들고, 군살 없이 발달된 가슴과 엉덩이와 하체는 나 무랄 데가 없는 완벽한 몸매였다. 오야봉은 하루미를 품에 안고 걸음을 옮겼다. 사내가 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욕조의 난간 에 걸터앉게 되었다. 사내가 바닥에 버티고 있던 두 다리를 들어올리자 그녀의 상체 는 뒤로 넘어가는 자세가 되어 그녀는 두 팔을 뒤로 뻗어 욕조의 테두리를 짚고 중심을 잡았다. 하루미의 고통스러운 신음에도 오야봉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 다. 오늘따라 그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듣기가 좋았다. 그녀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내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고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한 순간 그녀의 고통에 찬 얼굴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유 인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루미는 난폭하게 자신을 밀어붙이는 사내의 강한 힘에 고통의 신음을 질러 데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내 경험이라고는 지금 자신을 유린하는 사내 외에는 없었던 하루미는 사내의 난폭함에 고통과 놀라움으로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사내는 언제나 처음 으로 자신을 품었던 날처럼 부드럽게 천천히 그녀를 품어왔기에 처음 관계와 그 다음의 몇 번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커다란 고통을 느껴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사내와의 관계에서 짜릿한 흥분 마저 느끼게 되어 사내의 품을 그리워한 밤도 있었다. 그러한 사내가 오늘은 난폭하게 그녀를 학대하고 있었다. 하루미는 처음의 관계 때보다 엄청난 고통으로 사내를 받아 드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경험으로 미친 듯이 몰아붙이는 사내를 받아드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팔을 들어올려 사내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싶었지만 몸이 뒤로 젖혀진 상태여서 여의치가 않았다. 사내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애원에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사내는 오늘 그녀를 임신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처녀의 몸으 로 아이를 갖는 수모와 출산의 고통을 안겨주고 싶었다. 하루미의 잘난 얼굴과 잘빠진 몸매가 거만스럽게 느껴졌다. 그 녀의 잘난 몸은 하나의 무기로 변하여 사내를 공격하는 살수 같 다는 생각이 들자, 오야봉은 그녀의 완벽한 몸매와 완벽하게 살 인을 저지르는 자유인이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야봉 은 그녀의 완벽한 몸을 망치고 싶었다. 늘씬한 그녀의 상체를 개 구리 배처럼 불룩하게 만들고 싶었다. 불룩해진 배를 쓸어안고 힘겨워하는 그녀를 오야봉은 상상으로 그려보며 희미한 미소를 잠깐 지어보았다. 야마다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하였다. 오늘따라 왠지 일찍 출 근을 하고 싶었다. 현관을 들어서며 야마다는 습관적으로 오야봉 사무실만을 운행 하는 엘리베이터를 쳐다보았다. 엘리베이터는 10층에 멈춰서 있 었다. 오야봉이 출근한 사실을 알아차린 야마다는 서둘러 사무 실로 올라갔다. 사무실에 들어선 야마다는 오야봉의 사무실로 아침 인사 전화를 하였다. 전화를 받은 오야봉은 야마다를 사무실로 불렀다. 오야봉의 사 무실로 들어선 야마다는 사무실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야마다, 마지막 카드를 준비해야겠다." "끝내 카드를 사용하게 되는군요." "야쿠자에게는 사무라이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 바닥 에 있으며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우리가 이러한 방법까 지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그러나 장군 님이나 내가 이런 방법까지 동원하는 이유를 알겠는가?" "제가 어찌 오야봉이나 장군님 같은 분들의 깊은 생각을 알 수 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오야봉이 지시하는 분부에 따를 뿐입 니다." "야마다....우리에게는 사무라이 정신이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 의 선배들은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아시아, 멀리는 태평양 건너 사이판까지 우리의 지배하에 호령하던 막강한 군사력과 통치력을 갖고 있었다. 세계사를 통틀어 이처럼 넒은 지역을 지배한 민족 은 없었다. 이처럼 위대한 우리 일본 국민이 이제는 세계의 경제 를 지배하는 국민이 되었지만, 경제의 부를 쌓는 방법이 한낮 계 집처럼 전자제품이나 만들고 자동차나 만들어 수출하는 나약한 돈 벌레가 되어버린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우리 일본 국민의 의식에는 사무라이 정신이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우리의 지배를 받아왔던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우리와 동등한 기 술로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하고 있다. 아니 우리를 앞지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의 정신문화를 황폐하게 만드는 일 에 전쟁과도 같은 각오로 일해야 한다. 이번 일은 한국과의 마지 막 전쟁이다. 전장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해 주기 바란다." "명심하겠습니다. 오야봉." 오야봉의 얼굴은 격정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필리핀과 태국은 내가 직접 다녀오겠다." "오야봉께서 직접 가시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다. 오늘 오후 비행기를 예약해라. 이번 일은 절대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한국 경찰이 더 이상 접근하기 전에 일을 끝 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나라들은 다른 아이들을 보내고 야 마다 자네는 이곳을 지키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정보가 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아이들 에게 교육을 철저히 시켜서 내보내고..." 야마다는 오야봉의 사무실을 물러나자 곧바로 한국으로 전화를 하였다. "제사장? 나 야마다요." "아, 야마다상, 어찌 되었습니까?" "마지막 카드를 준비하세요. 그리고 이번 일은 신중을 기해서 소리소문 없이 끝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한 지시 사항은 나비 사냥꾼들이 한국에 도착하면 내가 직접 한국에 들어가 알려주겠 습니다." "알겠습니다." 야마다는 전화를 끊고 홍콩과 필리핀 그리고 동남아 여러 국가 에 산재해 있는 조직의 거점에 연락을 하였다. 오야봉은 오후 비행기를 이용하여 필리핀으로 날아갔다. 다까시 오 조직은 표나지 않게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새벽녘 자유인은 작은 상자에 담겨있는 요시코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화장터를 나왔다. 도쿄 시내로 들어온 자유인은 지하철역 입구의 환승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 좌석에 놓여진 요시코의 유골이 담겨있는 작은 상자를 볼 때 마다 자유인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이 요시코의 죽음이 현실로 느껴지질 않았다. 자유인은 상자를 들어 가슴에 안아 보았다. 코끝이 찡 해지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상자에 얼굴을 묻고 자유인은 소리 죽여 울 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려고 개미떼처럼 지하 로 몰려가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주변의 상가들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자유인은 남성복을 판매하는 상가에 들러 캐주얼 한 복을 구입 하였다. 상점의 주인은 문을 열자 개시로 들어선 손님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 했다.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입고있는 옷에 피를 잔뜩 묻힌 사내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넋이 빠진 듯 하기도 하였지 만 사내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피가 묻은 옷이 아니라 하여도 싸늘한 공포가 흐르고 있었다. 사내는 주인의 염려와는 다르게 값비싼 옷을 고르고 가격도 한 푼 깎지 않고는 탈의실에서 구입한 옷을 갈아입고 피묻은 옷은 쇼핑 빽에 담아 가게를 떠났다. 자유인은 큼지막한 가방을 사고는 몇 군데의 옷가게를 돌아다 니며 옷을 사서 가방을 옷으로 채웠다. 그리고 여행사에 들러 유 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위조된 여권으로 예약을 하였다. 오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한 자유인은 공항 검사대에서 생 길 수도 있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화장터에서 요시코의 유골 을 넘겨받을 때 유골 확인증도 발급 받아 왔다. 물론 그 확인증 도 요시코의 유골을 확인하는 증명서는 아니었다. 전날 화장한 사람의 이름으로 발급된 확인증 이었다. 유골 확인증이 필요한 사람은 많지가 않았다. 유골을 갖고 해외로 나가는 사람이나 확 인증이 필요한 관계로 화장터에서 확인증을 발급 받기에는 어려 움이 없었다. 자유인은 공항에서 간단한 검사를 끝 마치고 비행기에 오를 수 가 있었다. 생전에 요시코에게 약속했던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를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바다 위에 착륙할 수 있는 소형 수상 비행기는 코발트빛으로 물들은 바다 위를 낮게 날고 있었다. 작은 창으로 내려다 본 바 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물 속의 산호초가 선명히 보이고 있었 다. 자유인은 요시코의 유골이 들어있는 작은 상자를 무릎 위에 올 려놓고 무심히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틴계로 보이는 조 종사는 흥겨운 삼바 리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있었다. 멀리 남태평양의 작은 섬인 마론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론 섬은 100여명의 원주민이 살고있는 작은 섬으로 교통편이 불편 하여 찾는 이가 거의 없는 고도의 섬이었다. 자유인은 말년의 여 생을 마론 섬에서 보내기 위하여 그 동안 많은 지원을 마론 섬의 원주민에게 쏟아 부었다. 그 결과 마론 섬의 원주민에게 자유인 의 존재는 원주민을 이끌고있는 족장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비행기가 마론 섬 가까이 접근하자 원주민들은 작은 배를 몰고 바다로 나오고 있었다. 비행기가 바다 위에 착륙하자 원주민의 작은 배가 비행기에 접근하여 자유인이 비행기에서 작은 배로 옮 겨 타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두 명이 노를 젖는 배를 타고 마론 섬으로 향하는 자유인의 가 슴은 무너지는 아쉬움과 회한이 아픔으로 밀려왔다. 섬의 연안에는 족장을 비롯하여 원주민 모두가 몰려나와 자유인 을 환영하고 있었다. 자유인이 타고있는 배의 뒤에는 많은 생필 품을 비행기에서 옮겨 실은 배가 쫓아오고 있었다. 섬에 도착한 자유인은 간단히 족장과 원주민들에게 인사를 하 고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평소와 다른 자유인의 표정에 족장과 원주민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들은 자유인이 가져온 생필품에 관심이 쏠려 자 유인에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야자나무와 잎파리를 사용한 주택은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 집은 자유인이 직접 두 달에 걸쳐 만들어놓은 집으로 창문을 열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 었다. 자유인은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이름 모 를 한 쌍의 새가 수평선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앞서거니 뒤 서거니 장난질을 하며 날아가는 새를 자유인은 그리움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요시코와의 그리 오래지 않은 만남과 아쉬운 헤어짐이 이토록 가슴 깊이 침전되어 있다는 사실에 자유인은 놀라고 있었지만 그 러한 그리움을 애써 감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 장관을 이루 고 있었다. 자유인은 요시코와 함께 이곳에 온다면 제일 먼저 노 을지는 수평선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유인은 요시코의 유골이 들어있는 상자를 챙겨들고 바닷가로 나섰다.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노을이 물든 바다로 나갔다. 작은 배는 잔잔한 파도에도 춤을 추고 있었다. 자유인은 조심스 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에는 요시코의 뼈가 곱게 부서 져 모여 있었다. 새하얀 가루가 붉은 노을 속으로 날아가고 있었 다. 요시코의 하얀 영혼이 허공을 날아다니다 노을진 바다의 유 혹에 떨어지고 있었다. "요시코, 이곳이 내가 말한 그곳이야.....난 이 노을지는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어...아름답지....요시코도 만족하리라 믿어.....이 하늘과 이 바다에서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겠지...곧 돌아올 게...." 자유인은 요시코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 다. 요시코를 바다에 잠재운 자유인은 다음 날 곧 바로 마론 섬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도쿄 공항의 국제선 입국 수속대에 근무하는 사미라는 방금 전 에 입국 수속을 끝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간 사내의 모습에 정신 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내는 화려한 의상으로 온 몸을 치장하였는데 사내의 잘생긴 얼굴과 화려한 의상이 조화를 이루어 멀리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 다. 입국 수속대에 도착한 사내는 매력적인 웃음을 보내고 유 창한 불어로 인사를 하였다. 사미라는 사내의 웃음에 넋을 잃고 사내의 잘생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었다. 사내의 웃음 은 여자의 혼을 뺏어가기에 충분하였다. 차례를 기다리는 뒤 사 람의 볼멘 소리에 정신을 차린 사미라는 그제야 사내의 여권을 확인하고는 별다른 검색 없이 사내를 통과 시켰다. 사내가 입국 서류에 적어놓은 직업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공항을 빠져 나오면서도 자유인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 에 받았다. 패션 디자이너로 위장하여 입국한 자유인의 의상과 외모는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선 자유인은 예약된 호텔로 향했다. 호텔 에 도착하여 예약된 방으로 들어선 자유인은 작은 여행용 가방에 서 간편한 옷을 꺼내어 옷부터 갈아입고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 였다. 킬러로서의 마지막 작전인 이번 상대는 다까시오 조직의 오야봉 이었다. 보수도 없는 살인이었지만 오야봉을 해치우는 일이 억울 하게 세상을 떠난 요시코의 혼을 위로하는 일이라고 자유인은 생 각하고 있었다. 이번 상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의 오야봉이었고 그의 주변에는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경호 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자유인은 잘 알고 있었다. 오야봉의 명성이 자자한 만큼 그의 습관이나 허점을 찾아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자유인은 호텔을 빠져 나와 도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오야봉의 신상에 대하여 알만한 인물들을 은밀히 만나고 다녔다. 자유인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오야봉은 동남아로 몇 일간의 출장을 떠난 상태였다. 그리고 오야봉이 주로 출근하는 건물과 오야봉의 사무실 위치는 물론 경호 상태까지도 알 수가 있었다. 정보를 수집한 자유인은 오야봉의 사무실에 잠입 할 수 있는 방 법을 구상하고 오사까로 향했다. 오사까에 도착한 자유인은 위아래가 붙어있는 작업복을 구입하 고는 중고 물품을 판매하는 시장에서 플라스틱 공구 상자와 공구 상자에 들어갈 각종 연장들을 준비하였다. 시장을 빠져 나온 자유인은 식품점에 들러 열량이 높은 쵸코렛, 육포, 스낵 종류를 준비하여 공구 상자의 바닥에 감춰 두었다. 다까시오 조직의 오사까 본부 현관을 향해 하얀색의 작업복에 공구 상자를 들고 들어서는 청년을 경비들이 제지하였다. 검은 뿔 테 안경을 쓰고 입가에 미소를 짓고있는 청년의 가슴에 는 청년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붙어있는 신분증이 붙어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네, 엘리베이터 정기 점검 기간입니다." 청년의 말에 경비를 서고있던 사내들은 청년의 가슴에 붙어있는 신분증과 사진을 확인하고는 길을 터 주었다. 청년은 현관 바로 앞에 운행되는 일반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 갔다. 일반 엘리베이터는 4대가 운행되고 있었다. 청년은 그 중 에 한 대의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전원을 내리고 무언가를 만지더 니 이내 전원을 올리고는 직접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위층까지 오르내리고 있었다. 청년은 똑같은 행동으로 4대의 엘리베이터를 모두 점검하고 있었다. 처음 청년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갈 때 감시의 눈길을 주고있던 경비들도 시간이 흐르자 청년의 행동에 관심을 주지 않고 있었 다. 4대의 엘리베이터 중에 마지막 엘리베이터의 점검을 끝낸 청년 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관에서 마주하는 한편에 고급스러운 목 재로 출입구를 장식한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특 정한 사람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화려한 엘리베이터는 운행이 중단된 듯 층수를 알리는 글자판에 불이 꺼져 있었다. 오야봉만이 사용하는 전용 엘리베이터는 오야 봉이 동남아로 출장을 떠난 상태여서 동작을 멈추고 있는 것 같 았다. 청년은 경비들의 시선이 현관에 집중된 틈을 타서 이 층으로 올 라갔다. 이 층에도 일 층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4대의 엘리베이터 가 있었고 그 옆으로 화려한 1대의 엘리베이터 출입구가 있었다. 청년은 주위를 살펴보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틈을 이용해 정 지된 엘리베이터의 잠겨진 문을 힘껏 열었다. 양손에 힘을 주어 문을 열자 어두운 공간에 굵은 쇠줄이 메 달 려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일 층에 멈춰서있는 엘리베이터의 지붕이 보이고 있었다. 청년은 신속하게 엘리베이터의 양쪽 문을 두 다리로 버티고 공 구 상자를 손에 든 채 허공에 메 달린 쇠줄로 몸을 날렸다. 청년이 쇠줄로 옮겨가자 엘리베이터의 문은 빠르게 닫히고 있었 다. 쇠줄에 매달린 청년은 조심스럽게 쇠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 가고 있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청년은 엘리베이터의 지붕 에 내려앉았다. 지붕에 내려선 청년은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공구 상자에 서 작은 손전등을 꺼내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한 평 남짓한 엘 리베이터의 지붕에는 굵은 쇠줄이 감겨있는 도르래가 중앙에 자 리하고 있어서 지붕에 편히 앉아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청년은 자리가 좁은 지붕의 한 쪽에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서 머리에 눌러쓴 모자를 벗었다. 모자를 벗고 조금 변장한 얼굴을 닦아내자 어둠 속에서 자유인의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자유인은 엘리베이터의 지붕에서 몇 일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 는 상황에 대비하여 최소한의 식량도 공구 상자 밑에 준비한 상 태였지만 출장을 떠난 오야봉이 예정대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 었다. 정보에 따르면 오야봉은 내일이나 모레 정도에 돌아온다고 하였다. 현관을 지키던 경비들은 조직내의 이인자로 알려진 야마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자세를 바로 하고 현관 앞에 기립해 있었 다. 야마다가 현관 앞에 대기중인 승용차에 올라타자 경비들은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경비들의 경직된 자세가 조금은 느 슨해진 모습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이, 아까 그 엘리베이터 수리공 말야, 보이질 않아...나가 는 것 봤어?" "응...못 봤는데...어디 있겠지." "안 보이잖아." "그럼 우리가 못 본 사이에 점검을 마치고 돌아갔나 보지." 경비원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현관을 출입한 사람들의 모습을 떠 올려 보았다. 야마다는 필리핀에 가있는 오야봉에게 연락을 받고 황급히 선박 회사를 물색하러 다녔다. 오야봉이 지시한 내용은 대형 선박을 임대해서 필리핀 태국 말레시아 등 동남아 일부를 돌아서 일본으 로 돌아오는 상선으로 위장해 문제의 나비 사냥꾼들을 태우고 약 속된 날짜에 현해탄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내용과 상선 이 도착하는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속도가 빠른 어선을 준비시키 라는 지시였다. 어선에 승선할 인원은 대략 100여명으로 되어 있었다. 야마다는 조직의 정보원을 통하여 밀수에 이따금 손을 대는 상 선의 선장과 선주를 만나 평소 운임의 배를 주고서야 상선을 임 대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속도가 빠른 어선을 구하는 일은 쉽 지가 않았다. 밀입국 자를 100여 명이나 태우고 한국에 몰래 스 며드는 일에 선뜻 나서는 선장이 없었다. 야마다는 은밀히 수소문 끝에 마침 빠른 어선을 갔고있는 선장 을 만나 계약을 하고 곧바로 오야봉에게 연락을 취하는 동시에 동남아 각국으로 떠난 조직원들에게 마지막 카드의 시작을 알리 는 명령을 내렸다. 필리핀에 머물고 있던 오야봉은 야마다의 연락을 받고 이미 연 락이 취해진 나비 사냥꾼들을 한 곳에 소집하는 일을 독려하고 있었다. 필리핀의 항구 도시인 케손시티의 작은 모텔에는 어둠이 내리자 사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략 십 오명 정도로 보이는 사내들은 대다수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내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전과자가 반 이상을 차지하 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1년 전에 한 일본인이 접근하여 나비의 향연이라는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며 나중에 나비의 향연 촬영 에 출연을 제의 해 왔었다. 일본인은 촬영이 언제 있을지 모르니 일단 가계약의 조건으로 상당 금액의 계약금을 주면서 촬영이 시작되면 거액의 출연료를 지불한다는 제안이었다. 일단 계약이 성사되면 거주지를 옮길 경 우에 필히 연락을 하여 언제 있을지 모르는 촬영에 대비하고 있 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일본인의 제의에 사내들은 흔쾌히 계약을 체결하였다. 사회에서 외면 당하며 살아오던 사내들은 경제적인 궁핍으로 적지 않은 계 약금을 뿌리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돈도 돈이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있는 처지에 나비의 향연에서 보았던 환상적인 섹스 에 참여 할 수 있 다 는 사실이 사내들의 마음을 끌고 있었다. 모텔에 모인 사내들은 처음 계약을 체결했던 사내와 몇 몇 사내 들에 의하여 신상을 조사 받고 모텔에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야봉은 직접 나서서 사내들의 신상을 일일이 체크하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는 17명으로 체결된 계약자 중에 한 명은 사망을 하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연락이 끊어져 있었다. 연락이 끊어진 한 명도 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는 부하의 설명과 모여든 15명의 사내들을 확인하고 태국에서 확인한 20명 의 사내들과 다른 지역에서 보고한 인원이 모두 100명에 달하자 마지막 카드가 성공리에 끝날 것이라는 상상에 기분이 좋아졌다. 모여든 사내들은 서로의 병세를 알아차리고 동병상련의 아픔으 로 처음 만났음에도 금세 친해져 웃고 떠들며 자신들이 앞으로 출연할 나비의 향연에 대하여 기대에 찬 목소리들을 높이고 있었 다. 오야봉은 야마다에게 나비 사냥꾼들이 진리교 마지막 집회에 참 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100명 모두와 어선의 선장을 바다에 수장 시키라는 명령과 이들이 현해탄에서 어선으로 옮겨 탄 뒤에 일본 으로 돌아가는 상선의 승무원과 선장 등은 배가 항구에 들어오기 전에 모두 처치할 계획으로 상선에 오르는 나비 사냥꾼 외에 수 십 명의 킬러들을 함께 상선에 승선시킬 예정이었다.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에는 일본 국적의 콘테이너 운반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상선에는 위치를 알리는 붉은 색의 경고 등만이 점멸하고 있을 뿐 커다란 상선은 어둠에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항구에는 사람의 통행이 없었고 저 멀리 콘테이너 상 하차 지역만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항구의 어둠 속에서 사내들의 모습이 보인 시간은 새벽 두 시가 가까워서였다. 사내들은 일체의 말소리도 없이 조용히 앞서가는 인솔자를 따라 항구에 준비된 작은 목선에 올라탔다. 목선은 동 력을 끈 채 노를 저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목선이 사내들을 태우고 항구를 떠나간지 30분이 지나서, 바다 에는 커다란 섬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상선은 모든 불을 끈 채 마치 공룡처럼 서서히 먼바다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야마다는 새벽녘에 필리핀에서 상선이 출발했다는 보고를 접하 고 정리 중이던 백여 명의 위조 여권을 가방에 넣었다. 앞으로 사흘 후에나 현해탄에 도착하는 상선에 승선한 나비 사냥꾼 모두 의 위조여권은 혹시나 한국에서 생길 수도 있는 불상사에 대비하 여 사전에 입수한 사진으로 급하게 만들어 조금은 정밀 감이 떨 어지는 구석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야마다는 사흘 후 직접 어선에 동승해 한국으로 들어갈 계획이 었다. 야마다 자신이야 오야봉의 명령이라면 죽음도 불사한다는 각오였지만 그래도 이번에 진행되는 마지막 카드는 어딘지 모르 게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큰 죄를 짓는 기분이 마음 한 구석에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심지어 목숨을 끊어놓는 일에도 전혀 죄 의식을 못 느끼며 살아온 야마다에게도 이번만큼은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에 의하면 오야봉은 몇 일간의 동남아 출장을 간 것으로 되 어있었다. 그러나 오야봉은 일 주일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일주일 내내 움직이질 않았다. 자유인은 최소의 분량으로 준비한 비상 식량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체력의 손실을 막기 위하여 낮 동안에는 명상에 잠겨 있었고 밤에는 엘리베터의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각 층마다 놓여있는 엘리베이터 출입문으로 빛이 스며들어 왔지만 엘리베이터의 운행 공간은 온종일 어둠 속에 묻 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일주일 이상을 견뎌내는 것은 대단한 인내가 필요 한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수 없이 밀려드는 유혹이 자유인을 괴 롭혔지만 그는 끝내 움직이질 않았다. 유혹에 못 이겨 잠시 건물 을 빠져나간다면 그사이 오야봉이 나타날 수도 있었고 어둠의 고 통을 못 견딘다면 영원히 어둠 속에 잠들어있을 요시코에게 실망 을 안겨줄 것 같아 자유인은 끝내 움직이질 않았다. 엘리베이터의 지붕에 잠복한지 팔 일째가 되는 점심 무렵 자유 인은 엘리베이터의 전원이 켜지며 기계가 작동하는 소음에 긴장 을 하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사람이 들어오는 무게에 엘리베이터 가 미약하게 흔들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천장에 메 달린 커다란 모터가 작동하며 굵은 쇠줄이 도르래에 감 기는 만큼 엘리베이터는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엘리베이 터는 중간에 멈춰서지 않고 곧바로 8층 오야봉의 사무실에 정지 하였다. 자유인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빠지는 호흡을 달래고 있었다. 상대는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소문에 의하면 상대는 검도의 달인으로 검을 다루는 솜씨가 일본 내에서도 손가 락에 꼽힐 정도라는 얘기였다. 검을 다루는 상대라면 그것도 어 설픈 검술이 아니라 달인을 상대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 었다. 검을 다루는 자가 달인의 경지에 이르면 검을 다루는 자는 검과 일체가 되어 상대의 공격을 보고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단계에 이르러 섣불리 공격 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유인이 그 동안 부딪쳤던 수많은 사람 중에 가까이 서 마주친 상태에서 총을 든 상대보다 검을 든 상대가 오히려 무서운 존재 라는 사실을 실전을 통하여 깨닫고 있었다. 자유인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복을 벗었다. 작업복 안에는 몸에 달라붙는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 작업복을 벗은 자 유인은 굳어있던 몸을 천천히 풀었다. 상황에 따라서 상대와의 일전을 생각하여 온 몸의 경직된 근육을 풀어나갔다. 엘리베이터의 지붕에는 엘리베이터가 이상이 생겼을 경우에 밑 에서 위로 올라올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었다. 자유인은 문이 열 리는 소리를 줄이기 위하여 천천히 조금씩 문을 열었다. 문을 모 두 열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뿐히 내려앉은 자유인은 엘리베이 터 문을 조금 열고 그 틈새로 바깥을 살펴보았다. 문틈으로 보이는 모습은 곧바로 사무실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오야봉의 사무실은 별도의 문이 필요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 면 바로 사무실 안에 들어오게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았다. 자유인은 잠시 상황을 판단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작은 틈으로는 실내의 전경을 한 눈에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만 일 오야봉의 위치가 엘리베이터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면 강 제로 문을 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자유인은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두 팔에 힘을 주어 단숨에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며 넓은 실내가 한 눈에 들 어왔다. 다행히도 오야봉은 구석진 부분에 설치된 컴퓨터 앞에 등을 돌리고 컴퓨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느라 문이 열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강제로 열린 문은 강한 힘으로 제자리를 찾으려 하고있었다. 자 유인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없애기 위하여 팔에 힘을 주며 천천 히 문을 닫았다. 사무실 바닥은 값비싼 양탄자가 깔려있어 걸음을 옮겨도 발소리 가 나지를 않았다. 방음이 잘된 사무실은 컴퓨터가 작동하는 소음만이 들리고 있었 다. 오야봉은 컴퓨터의 소음 탓인지 아니면 작업에 몰입되어 경 계를 게을리 하고 있어서인지 자유인의 접근을 전혀 모르는 것처 럼 등을 돌린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유인은 한 발 한 발 소리 없이 오야봉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한 층 전체를 사무실로 사용하는 오야봉의 사무실은 끝에서 끝까 지 걸어가는 거리도 상당한 거리였다. 어느 정도 오야봉에게 접근 한 자유인은 순간적인 공격을 위하 여 호흡을 정리하며 몸을 솟구칠 준비를 하였다. 자유인이 막 하 체에 힘을 넣으며 몸을 날리려는 순간에 컴퓨터에 열중하던 오야 봉의 몸이 빠르게 돌아서며 앉은 자세로 손을 앞으로 뻗어 내었 다. 오야봉이 뻗어낸 손에는 디스켓이 들려있었고 오야봉의 손을 떠난 디스켓은 공기를 가르며 정확하게 자유인의 얼굴을 향하여 날아오고 있었다. 그 모든 일련의 동작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이 루어진 일이었다. 공격을 위하여 잠시 방어 자세를 늦추었던 자유인은 느닷없이 날아드는 물체에 공격의 템포를 낮추며 날아드는 물체를 피하려 고 몸을 틀었지만 역부족으로 디스켓에 얼굴을 스치고 말았다. 자유인의 얼굴을 스치고 날아간 디스켓은 건너편의 벽에 부딪치 며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자유인의 빰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오야봉의 공격은 틈을 주 지 않고 연이어 퍼부어졌다. 오야봉의 손에는 몇 장의 디스켓이 들려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오야봉은 자유인을 향하여 디스켓을 날리며 자신의 책상 옆에 걸려있는 칼 쪽으로 걸음을 옮겨 나갔 다. 자유인은 연속으로 날아드는 디스켓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야봉의 손에서 마지막 남은 디스켓이 손을 떠난 뒤에 오야봉은 벽에 걸려있는 칼을 손에 쥘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날아오는 디스켓을 피한 자유인은 어느새 칼을 들고 자세를 잡은 채 버티고 서있는 오야봉과 마주하게 되었다. 오야봉이 들고있는 칼은 한 눈에 보아도 예리한 명검으로 보였 다. 칼의 길이는 대략 1미터가 넘어 보이는 전통적인 일본 사무 라이들의 칼이었다. 칼을 비스듬히 옆으로 올려 잡은 오야봉의 자세는 빈틈이 없었다. "겁도 없이 내 사무실에 침입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네 놈은 누 구냐?" 자유인은 오야봉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 공격을 피하는 솜씨가 뛰어나던데 혹시......네 놈은 자유인 이 아닌가?" 자유인은 오야봉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하의 자유인이구나. 네 놈의 명성은 익히 들었다. 혹시 나 했는데 역시 네 놈의 명성은 과장이 아니었구나. 이제서야 상 대다운 상대를 만나니 기운이 솟는다. 자유인....어디 네 놈의 실 력을 보자꾸나.." 오야봉은 칼끝을 앞으로 내밀며 성큼 자유인에게 다가왔다. 걸음 을 옮기면서도 오야봉의 자세는 공격과 방어의 자세를 완벽하게 조화시키고 있었다. 오야봉의 칼이 바람소리를 내며 자유인의 얼굴을 향해 수평으로 휘둘러졌다. 자유인은 오야봉의 어깨를 보고 칼의 방향을 가늠하 고는 허리를 낮추며 칼을 피하는 동시에 앉은 자세에서 오른 다 리를 바람개비처럼 회전시켜 오야봉의 다리를 걷어차려고 하였 다. 오야봉은 자유인의 발길질을 피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었 다. 그 사이에 자유인은 몸을 퉁겨 일어나 오야봉과 마주하고 서 있었다. 오야봉의 첫 번째 공격과 발길질을 피하는 자세에서 오야봉의 실력이 소문보다 한 수위라는 사실을 자유인은 느낄 수 있었다. 자유인은 시간이 오래가면 자신이 불리한 입장에 놓일 것 같아 모험을 감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유인은 뒷걸음질로 오야봉에게서 조금 멀어져 나갔다. 오야봉 도 첫 번의 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섣불리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오야봉에게서 떨어진 자유인은 정신을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오야봉과 같은 검술의 달인이 펼치는 검술을 눈으로 확인하고 다 음 동작에 들어가는 것은 공격자보다 한 템포가 느린 방어였다. 모든 신경을 극도로 예민하게 끌어올려 공기의 흐름과 공격자의 움직임을 피부로 느끼며 한 순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만이 최 상의 방어와 공격이었지만 자칫하면 판단의 착오로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오야봉은 자유인의 돌연한 태도에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자유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일격 필살의 각오로 칼끝에 정 신을 집중하였다. 단 한차례의 공격으로 상대를 무너뜨릴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이 당할 수도 있는 도박 같은 싸움이었다. 사무실에는 눈을 감고 조용히 서있는 사내와 그 사내를 노려보 며 칼을 서서히 쳐드는 사내의 동작에서 무거운 침묵과 살벌함이 흐르고 있었다. "이얍" 오야봉은 큰 소리를 내지르며 자유인에게 달려들었다. 소리를 크게 지른 것은 자신이 움직이는 소음을 기합소리에 묻어 상대의 판단을 흐리게 하려는 계산이었다. 자유인은 오야봉의 기합소리와 함께 공기의 흐름이 깨지는 것을 느끼며 기합소리에 파묻혀 들려오는 움직임의 작은 소리와 칼날 이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로 날아드는 칼의 방향을 예견하고는 몸을 틀었다. 오야봉이 내리친 칼날은 자유인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서 내려가 고 있었다. 칼날이 거의 어깨에 접근한 순간 자유인의 몸이 한바 퀴 회전을 하며 칼날을 피하는 동시에 오야봉의 옆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오야봉은 칼날이 자유인의 어깨에 근접하자 공격의 성공을 점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자유인의 몸이 거짓말처럼 칼날 을 피하며 자신에게 접근하는 동작을 보면서 황급히 내려치던 칼 을 거두어 드리려고 하였으나 혼신의 힘으로 내려친 칼을 멈추기 에는 칼끝에 너무 많은 힘이 실려있었다. 오야봉은 그 짧은 순간에 성공의 희열과 실패의 참담함을 동시 에 느끼고 있었다. 옆으로 접근한 자유인의 오른손이 흡사 칼날처럼 빠르게 자신의 목을 향하여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어렴풋이 확인한 오야봉은 이 내 목에 강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자유인의 공격을 받은 오야봉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유인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며 앞으로 쓰러지 고 있었다. 자유인의 일격은 필살의 힘이 담겨있었고 상대적으로 앞으로 달려들던 오야봉의 힘과 부딪쳐서 단숨에 오야봉의 목뼈 를 끊어 놓았다. 오야봉이 뒤로 물러나며 쓰러진 곳은 컴퓨터가 작동하고 있는 책상 바로 아래였다. 자유인은 쓰러진 오야봉의 죽음을 확인하고 일어서다 무심결에 컴퓨터의 모니터에 나타나있는 문자를 쳐다보 았다. 모니터의 상단 부분에는 "한국 정신문화 말살계획" 이라는 글씨 가 바로 아래 보이는 글씨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나 있었다. 자유인은 호기심에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모니터를 주시하던 자유인의 표정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나비 사냥꾼들의 병 명과 그들이 한국으로 밀입국하는 계획이 소상하게 기록된 부분 이었다. 자유인은 다까시오 조직과 영광회의 거물 정치인들이 공동으로 추진하던 나비의 향연 프로젝트와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는 과정 을 대충 파악하고는 한국에 있는 진리교의 본거지와 위치를 알아 보려고 찾아보았으나 오야봉이 꽂아 놓은 디스켓에서는 진리교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없었다. 자유인은 오야봉이 꽂아 놓은 디스켓을 컴퓨터에서 꺼내어 주머 니에 넣고는 다른 디스켓을 찾아보았다. 수많은 디스켓에서 진리 교의 자료를 보관한 디스켓을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야봉의 책상 위에 놓여진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자 유인은 눈앞에 놓여진 디스켓을 여러 장 챙겨들고 엘리베이터로 돌아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의 지붕으로 올라가 벗어놓은 작업복을 챙겨 입고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다. 현관에 경비를 맡고있던 사내의 눈이 오야봉 전용 엘리베이터의 숫자 판을 우연히 쳐다보고는 옆에 있는 사내의 옆구리를 찔렀 다. 오야봉이 외출을 할 때는 언제나 위에서 연락이 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연락도 없었고 현관에 오야봉의 승용차는 물론이고 경호 원들도 내려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야봉의 엘리베이터가 아래 로 내려오자 사내들은 황급히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가 문이 열 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사내들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그 순간 어디선가 "뭐야" 하는 소리에 사내들은 고개를 들고 엘리베이터 에서 나온 청년을 확인하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야" 사내들은 험악한 분위기로 자유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이 회사 사장님의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고 해서 고치고 내려오 는 길입니다." "사장님?...8층에 계신 분?" "네." "그래, 그런데 언제 올라갔지? 올라가는 것을 못 본 것 같은 데..." "30분전에 지하실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요." "지하실....어..이, 지하실에 연락해 확인해봐." 사내 하나가 지하실로 연락을 하려고 인터폰으로 걸어가고 있었 다. "저....밖에 좀 나갔다오면 안될까요?" "기다려 조사가 끝나면 나갈 수 있으니." "그런데 아직 사장님의 컴퓨터를 완전히 고친 게 아닌데요, 깜 빡 잊고 자동차에 부품을 하나 빠뜨리고 올라갔어요. 그래서 사 장님이 화를 내시며 빨리 갔다오라고 했는데...지금 아주 중요한 작업을 하셔야 한다며......늦었다고 야단을 맞으면 선생님 책임 입니다." 오야봉이 화를 내고 있다는 말에 사내들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 었다. 자유인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던 사내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나하고 같이 자동차에 갔다오지, 자동차는 어디 있나?" 자유인은 뛰다시피 사내와 함께 현관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저만치 보이는 골목으로 사라지고 있을 때에 지하실로 확인을 해 보았던 사내가 인터폰을 내려놓았다. "밑에 있는 아이들 얘기가 컴퓨터 수리공을 본 적이 없다는 얘 깁니다." 경비를 맡고있는 책임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책임자의 뒤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형님, 생각 안 나세요. 한 일주일 전에 엘리베이터 수리공으로 왔던...." "맞아, 바로 그 놈이야. 빨리 쫓아." 사내들이 황급하게 자유인이 사라진 골목을 향하여 뛰어가기 시 F,B,P,T,M,N,A,PR,GO,PF,ME,MM,SAY,Z,X) 작했다. 자유인은 골목으로 들어서� � 걸음의 속도를 늦추며 뒤따르던 사 내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자동차를 어디쯤에 세워뒀어?" 사내가 자유인의 얼굴을 쳐다보며 재촉을 하는 순간에 자유인의 팔꿈치가 사내의 가슴을 후려쳤다. 사내는 맥없이 앞으로 쓰러졌 다. 사내가 쓰러지자 자유인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골목으로 달려온 사내들은 저만치 길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발견 하고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리공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사내들은 주변에 흩어져 수리공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가 없었다. 건물로 돌아온 사내들은 서둘러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받은 간 부급들이 현관으로 내려와 다시금 방금 전에 있었던 사태를 보고 받고 황급히 오야봉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야마다가 오야봉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은 나비 사냥꾼들이 타 고있는 배가 목적지인 부산항에 근접한 시간이었다. 야마다는 어 선을 타고 직접 현해탄으로 나비 사냥꾼들을 싣고 오는 상선을 마중 나갔다. 그리고 어선을 인솔해 한국으로 밀입국 할 계획이 었다. 당초에 계획은 밀입국 장소를 한적한 항구로 선택했으나 선장은 의외로 부산항을 고집하였다. 선장이 부산항을 밀입국 장소로 택 한 이유는 한적한 항구보다 는 번잡한 부산항이 감시의 눈을 피하 기가 용이하다는 이유였다. 대다수의 밀수선과 밀입국 배들이 비 교적 한가한 항구에 속하는 여수나 울산 같은 항구를 이용하다가 경비정에 적발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여 선장은 상대적으로 경비 6/8 가 느슨한 부산항을 선택해 경비의 허점을 노리는 대담한 뱃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어선이 부산항 근처에 도착하자 야마다는 그 동안 전원을 끄고 있던 핸드폰의 전원을 넣고 해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제사장에게 전화를 하였다. 전화를 받은 제사장은 말을 더듬으며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왔다. 제사장이 알려온 오야봉의 사망 소식에 야마다는 핸드폰을 바닥 에 떨어뜨리며 놀라고 말았다. 야마다는 일본으로 전화를 걸어 오야봉의 사망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야 믿을 수가 있었다. 오야봉의 사망 시간은 야마다가 어선을 타러 달려가고 있을 시 간이었다. 어선에 올라타고 현해탄으로 다시금 부산으로 향하는 동안에 야마다는 핸드폰의 작동을 멈추어 놓았던 관계로 오야봉 의 사망 사실을 부산항에 인접해서야 한국의 제사장에게 들을 수 있었다. 오야봉의 사망 사실을 접한 야마다는 곧바로 배를 돌려 일본으 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어선에 타고있는 100여 명의 나비 사냥꾼 들도 문제였지만 마지막 카드의 작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선은 부산항에서 조금 떨어진 태종대의 으슥한 곳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해안에는 제사장과 그의 부하들이 버스를 어둠 속에 숨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야마다는 서둘러 인원을 하선시키고 제사장에게 다음 행동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배에 올랐다. 100여 명의 나비 사냥꾼들은 버스에 분승하여 해안을 떠나고 있었고 이 모습을 야마다는 어선의 뱃전에서 지켜보았다. 야마다 는 선장을 재촉하여 일본으로 급히 돌아오고 있었다. 날이 훤하게 밝아서야 일본에 도착한 야마다는 오사까로 급히 달려갔다. 오야봉의 사체는 사무실의 한 쪽에 안치되어 있었다. 넒은 사무 실에는 간부급 조직원들과 영광회의 회원들인 정치인들이 모여 있었다. 덩치가 큰 부총리도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었 다. 부총리와 영광회 회원들은 당분간 오야봉의 사망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다. 마지막 카드의 중대성으로 야마다는 한국으로 들어가 작전을 지휘해야 했다. 그리고 오야봉의 사망 현장으로 미루어 오야봉은 컴퓨터를 정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현장에 도 착한 간부들의 설명에 컴퓨터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짐작 할 수가 있었다. 야마다는 컴퓨터 책상에서 그 동안 오야봉이 자료를 보관했던 디스켓이 여러 장 없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부총 리에게 설명하였다. 설명을 들은 부총리는 버럭 화를 내었다. "아니, 오야봉은 어떻게 그런 중대한 사실을 기록에 남겼단 말 이야." "죄송합니다 장군님. 평소 오야봉의 습관이셨습니다." "그럼, 마지막 카드는 물론이고 진리교의 실체도 모두 기록하고 있었단 말이요?" "네, 아마도 그러셨을 겁니다." "허...이것 참....큰일이구먼...만일 오야봉을 살해한 자가 디스 켓의 내용을 세상에 알린다면....." 부총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그래서 오야봉을 살해한 자를 쫓아 오야봉의 복수를 하고 디스 켓을 찾으려고 합니다." "오야봉을 살해한 자를 알고 있어요?" "추측이지만 한 놈이 예상됩니다. 오야봉과 결투에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암살자는 주로 총이 나 무기를 사용해서 단숨에 상대를 제거합니다. 이렇게 오야봉과 결투를 해서 살해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자유인밖에는 없 습니다. 오야봉을 살해한 자는 자유인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판단이 정확하다고 장담 할 수가 있어요?" "네, 오야봉은 자유인의 표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유인 은 자신의 여자가 죽자 공개적으로 오야봉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경고를 하였습니다." "자유인의 여자라면....그 삿포로에서 연행되던 요시코라는 여자 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자유인이 만약에 나선다면 한국으로 들어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행히도 없어진 디스켓에 는 진리교의 위치나 진리교 신도들의 내용은 없습니다, 자유인이 한국에 들어가도 진리교의 위치를 알기에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 사이 마지막 카드는 무사히 끝 마치게 됩니다. 허락을 해 주신다 면 제가 한국으로 들어갈 때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고 싶습니 다. 그래서 오야봉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자유인이 한국으로 안 들어 갈 수도 있잖은가?" "물론 입니다. 하지만 디스켓을 확인하였다면 자유인은 틀림없 이 한국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자유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얼 마 전에 알아냈습니다." "좋아요. 모두 한국으로 쫓아가 오야봉의 복수를 하세요. 단 마 지막 카드는 절대 실패하면 안돼요." "알겠습니다 장군님." 자유인은 도쿄로 돌아와 호텔 방에서 디스켓을 검사하고 있었 다. 디스켓을 검사하기 위하여 자유인은 노트북 컴퓨터를 구입하 였다. 디스켓에 담겨있는 내용을 모두 확인한 자유인은 나름대로 생각 을 정리하였다. 한국에 있는 진리교라는 단체가 나비의 향연이라는 포르노 테이 프를 만들어 다까시오 조직에 넘겨온 사실과 진리교의 신도들이 모두 한국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사실, 그리고 테이프에 출연하는 포르노 배우들이 모두가 진리교 신도라는 사실에 자유인은 어이 가 없었다. 또 다른 디스켓에는 나비 사냥꾼이라고 이름 지어진 인물들이 한국으로 밀입국해서 들어가는 날짜와 장소가 기록되어 있었다. 기록된 날짜로 미루어 그들은 벌써 한국에 잠입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디스켓에는 나비 사냥꾼으로 불리는 인물들의 신상과 병 명 그리고 병세가 발견된 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자유인은 마지막 디스켓을 오랜 시간 살펴보았다. 10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은 동남아 각국의 국적을 갖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가 에이즈 보균자로 정부의 관리하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100여 명의 인물 중에는 여자도 10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유인은 다까시오 조직이 무엇 때문에 동남아 각국에서 에이즈 환자를 모집하여 한국으로 밀입국시키려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까시오 조직은 한국에 에이즈를 퍼뜨리려는 의도였다. 그것도 진리교의 신도들을 목표로 한다면 한국의 엘리 트 집단에 에이즈 환자가 속출하게되고 그것은 다까시오 조직이 원하던 한국 정신문화 말살의 가장 대표적인 피해였다. 자유인은 다까시오 조직의 음모를 당국이나 한국에 알린다면 과 연 그들은 터무니없는 이 사실을 믿으려고 할 것인가 자문해 보 았다. 조사를 해보면 믿을 수도 있겠지만 진리교의 위치도 모르 는 상황이고 단지 한 사람의 제보와 디스켓을 근거로 신속하게 수사를 착수할지도 의문이었다. 절차를 밟으며 수사를 진행하기 에는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었다. 자유인은 눈을 감고 자신의 처지를 되새겨 보았다. 사람을 살해 하는 청부 살인자, 일찌기 조국인 한국을 떠나 조국에 대한 향수 나 미련은 없었다. 사람이 죽고 또는 똑똑한 인재들이 에이즈라 는 몹쓸 병에 감염된다 하여도 자신과는 실질적인 관계가 없는 사안이었다. 정의감이나 조국애를 부르짖기에는 자유인의 심신은 피로와 허탈감에 빠져있었다. 자유인은 수화기를 들고 후론트에 전화를 걸어 내일 출발하는 유럽행 비행기의 예약을 부탁하였다. 단 일초라도 접하기 싫은 이 세계를 벗어나 요시코가 잠들어 있는 말론 섬으로 가고 싶었 다. 자유인은 오랜만에 늦은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끝 맞힌 자유인은 소지품을 정리하고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일본 땅을 막상 떠나 려니 지나간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부산에서 밀 항선을 타고 일본에 처음 밀입국하던 모습과 잠시나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버린 요시코와의 행복했던 시간들이 작은 미련 으로 자유인의 눈을 창 밖에서 쉽사리 떼어놓지 못하게 하였다. 호텔을 나서며 자유인은 탁자 위에 놓여있는 디스켓을 발견하고 는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었다. 결심을 내린 듯 자유인 은 디스켓을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한 자유인은 유럽으로 떠나는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 며 스넥 코너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옆자리에 엄마와 딸로 보이는 모녀가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자유인의 눈과 마주친 작 은 계집아이는 귀여운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의 웃음 이 천진난만한 것이 다시 한번 눈길을 주게 만들고 있었다. 아이가 앉아있는 의자의 옆에는 아이 것으로 보이는 작은 곰 인 형이 놓여있었다. 아이가 물 컵을 잡으려고 엉덩이를 들어올리는 바람에 곰 인형이 바닥에 떨어졌다. 자유인은 허리를 낮추어 아 이의 곰 인형을 주워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는 화사한 웃음 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아이의 인사에 자유인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자유인은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말을 들었던 것이다. 아이의 작고 귀여운 입에서 한국말이 들려올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자유인은 뜻밖이라고 생 각하였다. "아이구! 꼬마 아가씨 한국에서 왔구나?" 자유인의 한국말에 아이는 물론이고 아이의 엄마도 반가운 기색 을 보이고 있었다. "와...아저씨도 한국사람이세요?" "그럼, 아저씨도 한국사람이야....왜 반갑니?" "네, 너무너무 반가워요. 아저씨 저요 삼촌한테 용돈 받은 것이 있는데 아저씨 맛있는 거 사드릴까요?" "왜?" "그냥요...아저씨가 엄마나 나처럼 한국사람 이니까요."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 었다. 낮설은 사내와 딸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한국말이 오고가 자 아이의 엄마는 이웃 사람을 대하는 분위기로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버릇이 없어서.....정희야 그만 가야지, 비 행기 시간 다됐다." 아이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작은 입을 재잘거렸다. "아저씨 나중에 서울에서 만나면 꼭 맛있는 것 사 드릴게요." 아이는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갔다. 자유인은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이의 모습은 정말 티없이 맑고 귀 여웠다. 아이가 사라지자 자유인의 가슴에 뜨거운 무엇이 피어오르기 시 작했다. 아이가 재잘거린 한국말이 귀에 울리고 있었다. 처음 만 난 아이의 엄마도 전혀 낮설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 이가 말한 한국사람이라는 단어가 새삼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국, 한국사람, 서울, 조국, 한국 정신문화 말살계획, 에이즈, 말론섬.....여러 가지 단어와 상념들이 자유인의 머리에 맴돌고 있었다. 공항의 안내 방송에서 유럽행 비행기의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자유인은 짐을 들고 탑승구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탑승구가 가까워지자 자유인의 눈에 아이의 해맑은 웃음과 얼굴 이 보이고 있었다. 곧이어 아이의 슬픈 눈이 애처롭게 자신을 쳐 다보는 환상에 자유인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조국....자유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조국은 없다. 나는 나다. 나는 자유인이다. 그 누구도 나를 붙잡지는 못한다. 아이의 슬픈 눈이 다시금 자유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의 눈은 도움을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내게 조국은 없다. 그러나 아이의 부모가 나비 사냥꾼의 피해자 일수도 있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유인은 갑자기 뒤돌아서 공항 로비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서 둘러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온 자유인은 청소를 끝 마힌 호텔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미 디스켓을 버린 휴지통은 말끔히 비 워져 있었다. 난감해하는 자유인에게 호텔 직원이 다가와 방을 청소하며 휴 지통에서 디스켓이 나오기에 혹시나 해서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줬다. 자유인은 반가움에 호텔직원에게 두둑한 팁을 주었다. 유럽행 비행기에 탑승을 포기한 자유인은 호텔에서 하루를 더 숙박하며 디스켓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진리교를 찾아낼 수 있는 정보가 혹시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식사도 거르면서 디스켓을 낱낱이 조사하였다. 다음 날 자유인은 도쿄의 하늘을 날고 있었다. 행선지는 한국이 었다. 진리교의 본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천의 공장의 생산라인은 멈 추어있었다. 생산직 종업원들은 갑작스러운 휴가에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알림 벽보판을 보았다. 회사에서는 새로운 생산라인의 전자동화 기계설비의 공사로 10일간 휴가를 실시한다는 내용과 특별 휴가비도 지급한다는 내용의 벽보를 예고 없이 공장의 곳곳 에 붙여 놓았다. 휴가 기간도 임금에 포함된다는 회사측의 추가 설명에 공장의 직원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집으로 돌아들 갔다. 회사의 임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진리교의 사제들은 진리교의 신도가 아닌 몇몇 사무직 사원들에게 시장 조사 차원의 지방 출 장을 개개인이 모르게 10일씩 내려보냈다. 이천 공장의 모든 직원들이 집과 지방으로 사라진 텅 빈 공장으 로 몇 대의 버스가 들어서고 있었다. 진리교의 본당으로 비밀스럽게 사용되던 이천 공장의 연구 동과 공장에는 임시로 급조된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고 각 숙소에는 각 국의 나비 사냥꾼들이 단체로 기거하고 있었다. 연구동의 이 층에 자리한 제사장의 사무실에는 제사장을 비롯하 여 모든 사제들이 모여있었다. "어제 저 인간들이 들어왔으니 하루 빨리 마지막 집회를 열어야 하겠다. 너희들은 지금 경찰의 감시를 받고있는 신도들을 제외한 모든 신도들을 이번 주에 집결하여 마지막 집회를 여는데 차질이 없도록 신경을 써야 하겠다." 제사장은 사뭇 진지한 어투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주말까지 저 인간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공연히 한 놈이라도 밖으로 나돌다 누구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이면 큰 일이니깐 철저히 감시하도록." "알겠습니다 형님." "추가로 너희들도 알고있겠지만 일본 다까시오 조직의 오야봉이 살해됐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야마다를 비롯하여 다까시오 조직 의 많은 인원이 살해범을 쫓아 한국으로 들어온다. 지금 이곳에 들어와 있는 그쪽 애들은 물론이고 차후에 들어오는 아이들과도 마찰이 없도록 우리 애들에게 교육을 단단히 시켜놓고 알겠지." "네, 형님." "아...그리고 그 뭐냐....그 여자 애 있잖아?" "누굴....?" "아...그 경찰 말이야, 어떻게 되었어?" "네, 몇 칠 안으로 독거미가 처리할 계획입니다." "빨리 처리해 괘씸한 계집 같으니라고...." 특수 부의 모든 요원은 박 경감의 비상 호출을 받고 모두 사무 실로 황급히 돌아왔다. 장혜라는 이천 지역의 신축 건물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심이 가는 몇 곳의 건물을 조사하는 도중에 호출을 받았다. 서울로 급 히 돌아오는 길에도 혜라는 못내 오늘 조사하려던 건물에 미련이 남았다. 오늘 혜라가 방문하려던 건물은 일본과 합작으로 운영되는 공장 으로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로 남의 눈을 피하기에는 적격 이었다. 일본과 합자한 공장이라는 사실을 접한 혜라는 직감으로 무언가가 집히는 구석이 있었다. 공장은 건축된지 오래 되었지만 공장의 뒤편에 연구 동을 지난봄에 새로 신축하였다는 사실과 공 장 대표자의 이름이 대전에서 한가락하던 조직 폭력배의 두목 이 름과 같다는 사실, 물론 이름은 동명이인 일수도 있지만 왠지 냄 새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모든 요원이 집합하자 박 경감은 상황실로 자리를 옮겨 요원들 을 급히 소집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박 경감의 설명은 요원들을 긴장시키게 만들었다. "오늘 여러분을 급히 모이게 한 것은 지금 수사하고 있는 사건 에서 모두 손을 떼고 새로운 사건에 착수하라는 지시입니다." 박 경감의 말에 장내가 술렁이고 있었다. 다른 사건을 맡는다는 박 경감의 말에 혜라는 더욱 문제의 건물을 조사하지 않고 올라 온 사실에 미련과 아쉬움이 남았다. 다른 수사관들도 나름대로 여태껏 전국을 뒤지며 쫓아다닌 노력이 아쉬운지 불만을 토로하 는 사람도 있었다. 불만스러워하던 사람은 물론이고 혜라 자신도 박 경감의 다음 설명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말들이 없었다. "여러분 모두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일본 최고의 야쿠자 조직 인 다까시오 조직의 오야봉인 다까시오가 몇 일 전에 살해되었습 니다." 장내는 일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일본의 다까시오 조직이라 면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수사관이 모두 알고있는 조직이었 다. "다까시오 조직의 오야봉이 살해된 사실을 조직에서는 비밀로 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일본 정보국에서는 오야봉 의 사망 사실을 알고 우리 정보 부로 비밀리에 알려왔습니다. 일 본 정보국이 야쿠자 오야봉의 사망 사실을 굳이 알려온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까시오 조직의 오야봉을 살해한 인물 때문입니다. 문제의 인물은 안개 속에 숨어있는 자유인이라 는 킬러입니다." 박 경감의 입에서 튀어나온 자유인이라는 단어에 장내의 모든 요원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그 속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 유인의 모습을 그려보며 킬러의 세계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자 유인의 솜씨에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자유인이야" 하며 찬사 비 슷한 감탄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자유인이라는 킬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도 이번에야 밝혀진 사실입니다. 그럼 추가로 정보국에서 나오신 정 과장님이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자유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장내는 또다시 술렁거리고 있었 다. 혜라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자유인에 대한 정보와 기록에 익 숙해 있었지만 그 자유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 었다. FBI는 물론이고 인터폴에서도 자유인은 일본의 전통 닌자 교육을 받은 자로 추측하고 있었다. 정보국에서 나온 정 과장이라는 사내는 얼굴에 웃음이 많고 푸 짐하게 뚱뚱하여 정보를 다루는 기관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정 과장의 설명에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방금 경감님이 말씀하신 자유인이라는 킬러가 한국에 들어왔다 는 정보입니다. 아울러 일본 다까시오 조직의 조직원들이 일거에 많은 인원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 는 김포 공항과 제주 공항은 물론이고 심지어 부산에는 일본을 오가는 부관훼리 배로 다까시오 조직원들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다까시오 조직은 오야봉의 복수를 한다는 생각으로 자유인을 쫓 아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지만 정작 자유인이 무엇 때문에 한국으 로 잠입 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정 과장의 설명은 문답형식으로 이어졌다. 문제의 초점은 자유 인의 한국 잠입 사실이었다. 자유인이 다까시오 조직의 오야봉을 살해한 뒤에 한국으로 도피를 하였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 치 않고 자유인이 또 다른 청부를 맡아 한국으로 향했다면 자유 인의 표적은 예사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특수 부의 모든 요원은 자유인의 추적에 매달려야 했다. 혜라도 진리교의 추적에 손을 놓고 자유인을 찾아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 었다. 수사의 방향은 출입국 관리소에서 넘어온 입국자 명단에서 다까 시오 조직의 오야봉이 살해된 이후로 지금까지 입국한 모든 외국 인에 대하여 행적을 쫓는 한편 또 다른 팀은 다까시오 조직의 조 직원들을 은밀히 감시하며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망한 오야봉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한국으로 급히 들어온 야마다는 진리교 제사장의 도움으로 입국자 명단을 얻을 수가 있 었다. 제사장은 신도 중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정 보를 얻어내고 있었다. 진리교의 신도들은 정부의 여러 요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야마다는 함께 입국한 조직원들을 통하여 입국자 개개인을 조사 하고 있었다. 한국의 수사진은 다까시오 조직의 조직원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입국자 모두를 조사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 다. 자유인은 미국 국적으로 정교하게 위조된 여권으로 한국의 김포 공항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십 년 넘어 찾아온 한국은 너무도 변해 있었다. 한국에 살면서 도 서울 구경을 못했던 자유인의 눈에 한국의 서울은 상상외로 발전되어 있었다. 서울의 발전된 모습에서 일본의 강경 세력들이 한국을 견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유인은 입국 당시의 여권이 아닌 또 다른 여권으로 호텔에 투 숙하였다. 호텔 방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모습은 유럽의 어느 도 시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발전된 모습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의 모습에서 한국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창 밖을 유심히 내려다보던 자유인은 불쌍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의 모습과 희미하게 남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시울 을 붉혔다. 한참을 창가에 서있던 자유인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여행용 가 방에서 서류철을 꺼내 보았다. 서류철에는 오야봉이 남긴 디스켓 에서 발췌한 내용들이 작은 글씨로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그곳 에는 장혜라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한국에 있을 진리교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인물이 대검 특수 부의 장혜라 라는 여자 수사 관이라는 사실에 자유인은 내심 관심을 같고 기록을 하였다. 오 야봉은 진리교가 마지막 카드에 의하여 집회를 하기까지 내몰린 이유가 장혜라 라는 여자에게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 장혜라의 이 름과 신상을 기록하고는 장혜라의 제거를 야마다를 통하여 제사 장에게 지시하였다. 진리교의 위치를 알아내려면 시간이 촉박하였다. 자유인은 먼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방법으로 우선 장혜라에게 접근하는 방 법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유인이 특수 부로 전화를 걸어 장혜라를 찾은 시간은 장혜라 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려고 마음먹고 퇴근 준비를 서두르는 순간이었다. "네, 장혜라 입니다." 이름을 밝혔음에도 상대는 재차 혜라의 이름을 확인하였다. "장혜라씨가 틀림없습니까?" "네, 제가 장혜라인데 어디세요?" "혹시 나비 사냥꾼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네, 뭐라고요?" "나비 사냥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혜라는 정중한 목소리로 나비 사냥꾼을 아느냐고 물어오는 정체 모를 사내의 물음에 등줄기가 오싹하는 예감으로 또 다른 단어를 떠올렸다. 사내의 입에서 나온 나비 사냥꾼을 듣는 순간 혜라의 기억 속에 나비의 향연이 떠올랐다. "처음 듣는 이야긴데, 실례지만 어디세요?"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그럼 나비의 향연과 진리 교는 알고 계 십니까?" "네, 뭐라고요?" 사내의 입에서 나비의 향연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혜라는 오 싹한 예감이 들어맞자 덜컥 겁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비의 향연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내는 재차 말하는 것이 짜증이 나는지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 다. 혜라는 정신을 가다듬고 친절하게 사죄를 하였다. "죄송합니다.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서, 너무 뜻밖에 전화여서 그만..." "괜찮습니다. 나비의 향연은 알고 계시죠? 장혜라씨가 그 실체 를 알아낸 분으로 알고있는데 아닙니까?" 정체 모를 사내는 자신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있다는 말투였다. 혜라는 점점 사내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비의 향연과 나비 사냥꾼의 관계가 궁금 하시다면 정보를 드 리려고 합니다." "무슨 정보입니까?" "정보를 지금 전화로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고 만나서 말씀 드리 죠." "그럼 언제 만나죠? 지금 만날 수 있나요?" "물론 입니다. 지금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누구 에게도 알리지 마시고 혼자 나오셔야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 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좋아요, 혜라씨가 계시는 곳에서 OO호텔의 커피 숍까지 는 얼마나 걸립니까?" "음....한 30분 정도 걸립니다." "그럼 30분 후에 거기서 뵙죠. 서로 얼굴을 모르니 커피 숍에 들어오시면 안내판에 박인홍 이라고 적어서 직접 들고 돌아주세 요. 다른 누구와 함께 나오시면 정보는 없던 얘기로 하겠습니 다." 사내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혜라는 전화를 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무실에는 박 경감도 김 형사도 보이지 않았다. 호 흡이 맞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혜라는 전화를 걸어온 사내 의 경고도 있고 해서 혼자 나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OO호텔에 도착한 혜라는 약속 장소인 커피숍에 들러 안내판에 박 인홍 이라는 이름을 직접 쓰고 안내판을 들고는 실내를 한바 퀴 돌았다. 커피숍에 앉아있던 손님들의 눈길이 혜라에게 쏠리고 있었다. 혜라는 마주치는 눈길마다 관심을 같고 예의 주시하며 실내를 돌았다. 실내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는데도 부르는 사람 이 없었다. 혜라는 문제의 사내가 아직 도착을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카운터에 안내판을 돌려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자유인은 박인홍 이라고 쓰여있는 안내판을 들고 실내를 돌고있 는 혜라를 발견하고는 눈길을 감추며 혜라를 살펴보았다. 여자 형사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게 혜라는 출중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 다.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하체는 늘씬하게 뻗어있었고 아무렇게 나 걸쳐 입은 잠바 위로 흘러 내려온 긴 생머리가 싱싱한 건강미 를 보여주고 있었다. 자유인은 그녀가 잠시 후에 다시금 안내판을 들고 실내를 한 바 퀴 돌 때도 그녀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약속된 시간에서 30분이 흐르자 그녀는 시계를 자주 쳐다보며 오고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자유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앞으로 향했다. 그녀의 앞을 지나칠 때에 그녀와 눈이 마주친 자유인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도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자유인은 계산을 맞히고 밖으로 나와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혜라는 사내와 약속된 시간이 한참을 지나자 화가 치밀기 시 작했다. 실내에 혼자 앉아있는 사내가 서너 명이 있었지만 그녀 를 아는 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방금 전에 그녀의 앞을 지나가 며 미소를 보낸 노신사가 유일하게 그녀를 아는 채 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전화로 통화를 하였던 사내의 목소리로 짐작컨대 사내 는 결코 노인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혜라는 불쾌한 기분으로 커피숍을 나섰다. 사내의 통화 내용에 서 사내는 나비의 향연과 그녀가 알 수 없는 나비 사냥꾼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미루어 장난 전화는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하였 다. 그리고 사내는 자신이 나비의 향연에 대하여 결정적인 단서 를 찾아낸 사실도 알고 있었다. 혜라는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와 집으로 가는 길에도 사내와의 통화 내용만을 생각하였다. 어쩌면 사내가 약속 장소로 오는 도 중에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보기도 하 였다. 운전을 하면서도 혜라는 통화 내용에 집착하느라 자신의 자동차를 뒤쫓아오는 차량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 다. 자유인은 렌터카 회사에서 빌려온 자동차를 몰고 혜라의 자동차 를 적당한 거리에서 뒤쫓고 있었다. 낯 설은 도시에서 상대 차를 미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서가는 자동차의 운 전자가 조금만 신경을 쓰다면 자신의 미행 사실이 금새 탄로가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앞에 가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여 자는 자신이 던져놓은 의문에 집착하느라 주변의 경계를 게을리 하는 것 같았다. 자유인은 그 점을 노리고 그녀에게 나타나지 않 았다.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일행을 염려한 계산이기도 하였지만 그녀의 집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안전한 상황하에 그녀를 만나 고 싶었다. 그녀의 집을 확인한 자유인은 호텔로 그냥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자동차를 돌렸다. 호텔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자유인이 차를 세우고 자동차에서 내리는 순간에 옆에 주차된 자동차의 문을 열 려던 사내가 자유인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내는 자유인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짐을 들어준 직원이었다. 자유인은 호텔직원에게 조금은 많은 듯한 팁을 주었던 관계로 직 원이 자유인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사끼상 어디 다녀오시나 봅니다." 직원은 유창한 일본어로 인사를 하였다. "네, 시내 관광을 했습니다." "서울 시내를 잘 아시나 봅니다. 직접 운전을 하시며 다니시는 것이...." "네, 조금....." 자유인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려는데 직원이 그 제야 생각이 난 듯 자유인을 불러 세웠다. "아사끼상, 그런데 좀 전에 왠 사람들이 아사끼상을 찾는 것 같 던데요." 자유인은 깜짝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위조된 여권으로 투숙한 자신을 누 군가가 찾는다는 직원의 얘기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아...그렇습니까, 누군지 아십니까?" "누군지는 모르고 일본 사람들 같은데 아사끼상의 투숙 날짜를 확인하고는 지배인에게 무언가를 묻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생겼습니까? 혹시 제 친구들이 아닌가 해서..." "친구들은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머리를 짧게 깍은 것 이 꼭 야쿠자 같았습니다. 맞아요 야쿠자가 틀림없어요. 그 사람 들 통역을 맡고있는 사람 중에 하나가 전에 제가 근무하던 호텔 나이트클럽의 지배인이었거든요." "무엇을 물었는지는 모르세요?" "글세요,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오늘 아사끼상이 나가 신 뒤로 호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습니다." "이상하게 돌아가다니 무슨..." "네, 처음에는 한국 수사관들이 찾아와 외국인 투숙객 명단을 보자고 하더니 자신들이 가져온 출입국 관리소의 명단과 대조하 더군요. 저희 호텔에도 몇 분의 손님들이 그 명단에 있어서 간단 한 조사를 받은 것 같아요. 그리고 수사관들이 돌아가고 뒤이어 일본 사람들이 수사관과 똑같은 명단을 들고 와서 외국인 투숙객 들의 신상을 적고 나서는 일본인 투숙객의 명단도 조사해 가더군 요." 직원은 입을 열자 말이 많았다. 한참을 더 떠들은 직원은 먼저 퇴근한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져 갔다. 자객열전 ♠♠ 제 6 장 자유인의 죽음 ♠♠ 자유인은 황급히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호텔을 빠져 나왔다. 지하 주차장에서 호텔 직원을 만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자유인은 자동차를 버리고 밤늦은 서울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 다. 서울의 밤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의 표정에서 풍요로운 행복을 찾을 수가 있었다. 자유인은 호텔 직원의 말에 의아심이 생기는 부분이 있었다. 후 자에 말했던 일본 청년들은 아마도 다까시오 조직의 조직원이 틀 림없었다. 오야봉이 살해된 조직에서 살해범을 찾아내 복수를 하 려는 것은 당연한 그들의 생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다까시오 조 직의 규모가 세계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발걸음이 너무 빠르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필시 그들의 배후에 정보를 제공하는 한국의 정보통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까시오 조직이 자신을 뒤쫓는 것은 이유가 있었지만 한국의 수사기관이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에 대하여 조사를 하고 다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한국의 수사기관에서 찾으려하는 인물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일수도 있었지만 다까시오 조직과 같은 시기에 유사한 방법으로 수사를 벌이고 있는 한국 수사관의 수사를 우연으로 보기에는 상황이 너무 일치하고 있었다. 자유인은 자신의 입국 사실이 한국 수사기관에 알려졌다고 생각 하고 어디서 자신의 행적이 발각되었는지 돌이켜 보았으나 자신 의 행동에서 실수를 범했을만한 구석은 없었다. 있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까시오 조직일수도 있었다. 갑자기 많은 인원의 야쿠자가 입국한 사실에 한국 수사기관은 촉각을 세우고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한 사람을 찾으려 한다는 사실 을 알아내고 그 인물이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였다. 자유인은 서울역으로 향했다. 기차 시간표와 행선지를 찾아보니 가장 멀리 내려가는 기차의 종착역이 부산으로 되어있었고 시간 은 4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자유인은 기차의 침대 칸을 예매 하고 기차에 올랐다. 숙박업소 보다는 움직이는 기차가 안전했 다. 진리교의 모든 사제와 인원들은 몇 일 후에 벌어질 대규모 집회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낮으로는 신도들에게 은밀히 집회 사실을 알리고 밤에는 공장과 연구 동에 분산되어 기거하는 나비 사냥꾼 들의 출입을 통제 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공장의 간이 숙소에 분산된 나비 사냥꾼들의 불만은 시간이 흐 르자 점점 높아만 갔다. 음식도 입에 맞지 않고 바깥출입을 통제 하자 그들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도착 후 곧바로 환상적인 섹 스의 향연을 즐기고 거액의 출연료를 받아들고 고향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그들은 의외의 상황에 의심을 품으며 자신들을 이끌고 온 사람들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나비의 향연에 출연할 부푼 꿈으로 일행에 합류한 로슨은 몇 일 째 공장의 간이 침대에 갇혀있는 것이 답답해서 미 칠 지경이었다. 밤마다 술을 즐겨 마시던 그에게 몇 칠 째의 금 주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술을 요구해 보았지만 주최측의 관계자는 많은 인원의 통제를 위하여 어쩔 수 없다며 거절하였 다. 밤이 깊어지자 화장실의 작은 창으로 외출을 시도하였다. 몇 일 째의 단속에 아무런 사고가 없자 단속 자들의 감시는 조금 느슨 해진 구석이 있었다. 로슨은 그 틈을 이용해 공장을 빠져 나왔 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지낸 적이 있던 로슨은 한국의 실정을 조금 은 알 수가 있었다. 공장을 무사히 빠져 나온 로슨은 어두운 밤 길을 서둘러 걸었다. 이따금 차량이 지나칠 뿐 도로는 한적했다. 한참을 걷자 저 멀리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로슨은 불빛을 향해 뛰어갔다. 몰래 빠져 나왔다는 사실이 로슨을 서두르게 만들고 있었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얼마간의 달러로 술을 사들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공장 안에는 술을 숨겨둘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다. 불빛이 보이던 곳은 작은 동네였다. 거리는 사람들의 통행도 별 로 없었고 상점들도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로슨은 한 상점에 들러 손짓 발짓으로 소주를 살수가 있었다. 소주라면 옛날에 한 국에 있을 때 많이 마셔본 가락이 있었다. 상점 주인은 밤늦게 찾아온 외국인에게 소주를 팔면서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근처의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 근로자 정도로 알고 있었다. 술을 사들고 상점을 나온 로슨은 문이 닫힌 상점의 앞에 놓여있 는 의자에 앉아 소주를 한 병 꺼내었다. 공장까지 참고 갈 수가 없었다. 소주를 꺼낸 로슨은 병째로 소주를 들이켰다. 알싸한 느 낌이 목젖을 통과해 위장에 다다르자 배속이 따뜻해지는 느낌과 취기가 올라왔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소주의 맛은 기막히게 좋았 다. 로슨은 순식간에 한 병을 비우고 또다시 한 병을 꺼내 마셨 다. 급히 마신 두 병의 소주는 평소 주량이 센 편에 속하는 로슨을 취하게 만들었다. 나머지 술이 들어있는 비닐 봉투를 들고 걸어 가는 로슨의 발걸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네를 벗어나 길을 건너려는 로슨은 눈앞에 다가오는 자동차를 보고 비척이며 도로 가에 서 있었다. 로슨의 앞으로 대형 트럭이 지나가자 로슨은 재빠르게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순간 트럭에 가 려 보이지 않았던 건너편에서 달려오던 자동차가 로슨을 발견하 고 정지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짧았다. "끼이익" 하는 자동차의 정지음과 "쿵" 하는 둔탁한 소음이 한 밤의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자동차의 운전자가 황급히 내려와 차 앞에 쓰러진 로슨을 태우 고 이천 방향을 향해서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로슨이 건너려던 도로에는 깨진 소주병에서 흘러나온 소주가 도로를 흥건히 적시 고 있었다. 장혜라는 지난밤에 전화를 걸어서 나비의 향연에 관련된 정보를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사내의 정체에 대하여 생각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혜라가 눈을 뜬것은 출근 시간이 지나서였다. 서둘러 출근을 하 면서도 혜라는 지난밤에 전화를 걸었던 사내에게 화가 치밀었다. 늦잠을 잔 것도 따지고 보면 문제의 사내가 화근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혜라는 사무실 분위기가 왠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원들은 바쁘게 서류들을 들춰보며 무언 가를 찾고 있었고 박 경감도 여기 저기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 다. 출근 시간을 넘겨버린 혜라는 누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 가 미안하여 조용히 자신의 책상에 앉아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 다. 박 경감 앞으로 정보실의 미스 최가 서류를 들고 황급히 걸어갔 다. 박 경감은 미스 최가 내미는 서류를 보고 몇 마디 말을 하고 는 미스 최를 돌려보냈다. "이것 봐, 장 형사 이리 좀 와봐. 그리고 모두 이리들 오라고." 혜라는 박 경감의 부름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경감의 주위로 요원들이 모이자 박 경감은 몇 가지 서류들을 모 두에게 보이며 말을 하였다. "오늘 아침에 보건복지부에서 긴급으로 조사를 의뢰한 사건이 있습니다. 의뢰한 내용은 이틀 전에 이천에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사고를 당한 피해자는 외국인으로 가해자가 병원으로 후송조치 시켰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안 좋아 수혈을 해야하는 상황이 벌 어져 담당 의사는 환자의 혈액형을 알아내는 과정에서 환자가 에 이즈 환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를 하였고 국내 거주 외국인이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에 보건복지부에서 조사를 실시한 모양입니다." 박 경감의 주위에 몰려든 요원들은 대충 내용들을 알고 있는 눈 치였다. 늦게 출근한 혜라를 위하여 박 경감은 또다시 사건내용 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건복지부와 이천 경찰서에서 조사를 벌인 결과 환자는 주변 공장 지역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 습니다. 그런데 목격자인 사고 지점의 동네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주인의 말에 따르면 문제의 외국인이 사고 당일 늦은 밤에 찾아 와 달러를 내며 소주를 사 갔다는 얘기였습니다. 환자의 옷차림 도 가벼운 옷차림으로 근방의 어느 공장에 근무하는 근로자로 보 였다는 내용입니다. 더 이상한 것은 환자가 병원에 입원한 다음 날 건장한 청년들이 병원에 들이닥쳐 환자를 납치해 갔다는 사실 입니다. 환자가 사라진 다음에 에이즈 검사 결과가 나와서 환자 를 보호조치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다행히 교통사고 조사 반에서 환자의 소지품을 몇 가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소지품에는 환자의 것으로 보이는 가족 사진과 낙서에 가까운 메모가 발견되었습니 다. 메모에 적힌 글로 미루어 환자는 필리핀 사람 같다는 보고와 메모에 적혀있는 여권 번호와 이름을..아니 꼭 여권 번호라고 단정 짓기는 뭐하지만 여하튼 메모에 적힌 이름과 번호로 출입국 관리소에 의뢰한 결과 환자의 메모에 적힌 이름으로 입국한 사람 은 없었습니다." 박 경감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서류들을 들춰보았다. 혜라는 갑자 기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자유인의 출현과 일본 야쿠자 조직 의 대거 입국 그리고 외국인 에이즈 환자의 발생이 모두 연관이 되어있는 하나의 사건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장 형사는 지금 정보실로 가서 이천 경찰서에서 보내온 환자의 사진을 필리핀으로 보내서 혹시 필리핀 당국이 관리하는 에이즈 환자 중에 문제의 환자가 있는지 서둘러 알아보세요." 혜라는 박 경감이 건네주는 서류를 훑어보며 정보실로 달려갔 다. 사고를 당한 환자의 사진은 정보실에서 스케너로 스켄하여 컴퓨터를 통한 인터넷 접속으로 필리핀을 향하여 날아갔다. 필리핀에서 회답이 오기를 기다리는 혜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어제 밤에 자신을 황당하게 만들었던 사내 였다. "장 형사님 어제는 정말 죄송합니다.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정 보를 드리는 입장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기에 어제는 장 형사 님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혼자 나오셨더군요. 이제는 장 형사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다." "그럼 어제 그 커피숍에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물론 입니다. 장 형사님이 커피숍에 들어오셔서 나가시기 전까 지 모두 보았습니다." 혜라는 섬뜻한 기분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조만 간에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궁금하실 것 같아 알려 드립니다. 어제 커피숍에서 장 형사님의 미소는 정말 아름다웠습 니다. 그럼 다음에 보기로 하고 이만..." 사내는 또다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혜라는 사내의 마지막 말에 어제 커피숍에서 있었던 일을 더듬 어 보았다. 사내의 마지막 말에 미소가 아름답다는 말을 되새기 며 하나의 모습이 기억에 떠오르고 있었다. 혜라가 커피숍에서 안내판을 들고 두 바퀴를 돌고나서 자리에 앉아있을 때 혜라의 앞으로 지나치며 미소를 보였던 노신사를 향 해 자신도 희미하게 웃었던 기억이 났다. 혜라는 둔기로 뒤통수를 강하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 내에게 농락 당한 기분이었지만 사내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고 긍 정하였다. 한가지 믿기지 않는 사실은 사내의 목소리와 실제의 나이가 너무도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기억에 떠오르는 사내 의 모습은 곱게 늙어온 세련된 노인으로 보였다. 노인의 목소리 치고는 사내의 목소리가 너무 젊었다. 혜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인의 모습을 꼼꼼히 기억 속에 담 필리핀 당국에서 자료를 보내온 시간은 점심때가 지나서였다. 컴 퓨터를 통해서 전달된 자료를 받아든 혜라는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한국에서 보낸 사진을 조사한 필리핀 당국은 문제의 사진에 나 와있는 사내의 본명이 로슨 이었고 로슨은 에이즈 환자로 당국의 보호 감시를 받고있던 인물로 몇 일 전부터 제한된 거주지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로슨과 같은 병 을 앓고있는 환자 중에 10여 명이 로슨이 사라진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필리핀 당국은 사라진 로슨이 어떻게 한국에서 교통사고 환자로 발견되었는지 믿을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서둘러 조사를 벌인 필리핀 당국의 자료에는 로슨이 필리핀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빠 져나간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는 내용을 추가로 보내왔다. 박 경감과 요원들은 혜라가 들고 온 자료를 앞에 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혜라가 가져온 자료에 의하면 이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외국인 의 국적은 예상대로 필리핀 사람으로 본명은 로슨 이었고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는 몇 일 전에 필리핀에 있던 에이즈 환자가 어떻게 한국에 들어와 있느냐 하는 의문과 그와 같은 환자들이 동시에 10명이 사라졌다는 필리핀 당국이 보내준 자료로 보아 어쩌면 사라진 환자들이 모두 한국에 들어왔을 가능 성이 있다는 심각성에 있었다.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어떠한 방 법으로 한국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추측은 가능했다. 선박을 이용해 밀입국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필리 핀은 물론이고 한국에도 그들의 밀입국을 도와주는 지원세력이 있어야 했다. 박 경감은 요 몇 일 사이에 일어난 이상한 사건들에서 수상한 관계가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러분은 이 로슨이라는 에이즈 환자의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 습니까?" 박 경감의 질문에 선뜻 앞으로 나서는 요원이 없었다. "내 생각은 혹시 이번 사건이 앞서 있었던 자유인의 출현과 일 본 야쿠자의 대거 입국 그리고 그 전에 우리가 조사를 벌리던 진 리교의 집회 장소 등, 이모든 사건이 연관성이 없는가 생각해 봅 니다." 요원들 중에는 머리를 끄덕이며 박 경감의 추측에 긍정을 표시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혜라는 어제 있었던 제보 전화의 내용을 밝힐까 하였지만 혹시 장난 전화가 아닐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제 추측은 조사를 해보면 밝혀질 것이고, 지금부터 여러분은 바쁘게 움직여 자유인의 뒤를 쫓는 한 편 교통사고를 당한 에이 즈 환자가 발생한 지역을 면밀히 조사하기 바랍니다. 만약 필리 핀에서 사라진 10여 명의 에이즈 환자가 한국에 들어왔다면 그 들은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와 같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교 통사고가 발생한 인근 지역을 샅샅이 조사하기 바랍니다." 박 경감은 갑자기 몰아닥친 의문의 사건에 머리가 아픈지 인상 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입국자 행방을 조사한 내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어제까지 조사한 바로는 3명의 외국인 행적이 묘연하고 나 머지는 거의 모두 신변이 확보된 상태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의 심이 가는 인물은 OO호텔에 숙박한 일본인으로 이름은 아사끼 입니다. 나이는 62 살이고 사는 곳은 나고야로 숙박부에 기재되 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의 행방이 어제 오후부터 사라졌 습니다. 아침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노인은 아침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렌터카 회사에서 빌려온 자동차는 시내 한복판에 버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2명은 태국과 방글라데시 사람 으로 불법 취업을 목적으로 입국한 사람들 같습니다. 이들의 행 적은 조만 간에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일본인이 사는 나고야에 수사의뢰를 했습니까?" "네, 한국영사에 부탁을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뭐라고요, 한국영사에.....아니 그런 중대한 내용을 영사에 부 탁하면 어떡합니까? 지금 빨리 일본 경시청에 협조 공문을 보내 요. 가능한 빨리 알아봐 달라고 말입니다. 도대체가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만약 자유인이 우리 정부의 중요 인물을 노 리고 잠입했다면 어찌 하려고 그럼니까." 박 경감은 화를 벌컥 내며 요원들을 현장으로 내 몰았다. 혜라는 김 형사와 함께 이천으로 내려갔다. 혜라와 김 형사가 이천 경찰서에 도착하자 이천 경찰서장은 상부의 연락을 받고 모 든 경찰을 동원하여 근방의 작은 공장부터 시작하여 모든 공장들 을 조사하고 있었다. 진리교의 제사장은 밑에 있는 부하들을 구타하고 있었다. 생각 할수록 화가 치밀고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자칫했으면 그 동안 의 모든 노고가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는 느낌에 화는 더욱 솟구 쳐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내가 뭐랬어...감시 잘하라고 했지." "형님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죄송, 죄송이면 다야...이 개놈의 새끼들아..." 제사장은 무릎을 끓고 앉아있는 사제들을 닥치는 데로 걷어차고 있었다. "야, 이 자식들아 그 새끼가 만약에 중상으로 뻗어있지 않았으 면 어떡할 뻔했어 응, 그 놈 앞세우고 경찰이라도 들이닥쳤으 면....어이구 속 터져.." 진리교에서 로슨이 사라진 사실을 발견한 시간은 아침이었다. 아침 식사를 인원수에 맞게 준비하여 배식을 하던 사람이 한 그 릇의 식사가 남게되자 인원을 파악한 것이었다. 곧바로 비상이 걸린 진리교의 모든 인원은 사라진 로슨의 행방 을 추적하였다. 공장과 연구동 일대에서 로슨의 행방이 보이질 않자 인근 지역까지 조사를 하였고 우연히도 한 조직원이 근방의 작은 동네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나누 던 얘기는 어제 밤에 한 외국인이 큰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문을 두고 서로가 죽었다느니 중상을 입었다느니 하며 타국에 서 사고를 당한 외국인을 안스러워 하고 있었다. 작은 동네의 입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로슨이 실려간 병원은 쉽게 찾아낼 수가 있었다. 진리교의 건장 한 청년들이 병원에 들이닥쳐 로슨을 빼내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로슨의 사건으로 제사장은 집회 장소를 바꿔야만 했다. 수소문 끝에 강원도 홍천의 콘도를 빌릴 수가 있었다. 콘도는 완공은 되 었지만 정식 영업허가가 나오지 않은 상태여서 진리교의 집회를 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비 사냥꾼들을 승용차로 분산하여 홍천의 콘도까지 옮겨가는 작업은 하루가 꼬박 소요되었다. 공장 안에는 공장 관계자 몇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비 사냥꾼과 다까시오 조직의 조직원은 물론이고 제사 장의 시중을 들고있는 여자들도 모두 홍천으로 보내고 난 뒤에 곧바로 이천 경찰서의 조사 반이 들이닥쳤다. 간발의 차이로 진 리교는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천 경찰서에서는 이천 주변 의 공장들을 샅샅이 조사하며 외국인 근로자들을 찾아내고 있었 다. 이천 경찰서를 방문한 혜라와 김 형사는 상황보고를 접하고 경 찰서를 빠져 나왔다. "장 형사, 사고를 당한 로슨이 정말 같은 환자들과 함께 들어왔 을까?" "글쎄요...참 선배님 저와 함께 가볼 데가 있어요." "어디..?" "네, 저번 나비의 향연이 촬영되는 집회 장소를 찾을 때 제가 맡은 지역이 이곳 이천이었어요. 그런데 의심이 가는 곳을 방문 하려다 박 경감님의 긴급 호출에 조사를 못한 곳이 있어요." "그래, 그럼 한 번 가보지.." 혜라와 김 형사는 이천에서 충주 방면으로 내려가는 국도의 산 자락 밑에 자리한 문제의 공장을 방문하였다. 공장은 정문에서 들어오면 바로 공장 건물이 있었고 공장 건물 뒤로 사무실과 연구동이 있었다. 공장의 기계는 작동을 멈추고 있었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공장 설비의 자동화를 위하여 생 산을 멈추고 있다는 얘기와 그로 인해 근로자들이 유급 휴가에 들어가 있다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혜라와 김 형사는 사무실에서 나온 직원의 안내로 공장과 연구 동 전체를 살펴보고 다녔다. 공장 안은 생산 기계들로 가득 차 많은 인원이 집회를 열기에는 부적당한 장소였다. 의심이 가는 연구동의 지하실 강당은 깨끗이 정돈된 상태였고 천장에 부착된 전등들은 문제의 전등이 아니었다. 혜라는 천장에 부착된 전등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건물이 완 공된 시기는 1년전 이었다. 일년이 지난 건물에 부착된 전등들은 상대적으로 너무도 깨끗하게 새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혹시 전구를 모두 바꿔 끼우신 적은 없나요?" 혜라의 질문에 직원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간단하게 부정하였 다. 혜라는 천장에서 빛을 발하는 전구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지 하 강당을 빠져 나왔다. 혜라가 의심한 공장은 이렇타 할 의심이 없었다. 아니 의심이 없다는 생각은 김 형사의 생각이었다. 김 형사는 아무래도 자기 가 맡은 구역이 아니라서 그런지 세심하게 살피는 눈치가 아니었 다. 김 형사와 공장의 직원이 공장 입구에서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 는 사이에 혜라는 공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 보았다. 천천히 공장 안을 살펴보던 혜라의 눈에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시멘트로 발라진 공장의 바닥 곳곳에 기계를 옮기며 긁힌 자국들이 여러 곳 있었다. 긁힌 자국은 선명한 시멘트 바닥의 원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고 긁히지 않은 자리의 시멘트 바닥은 찌든 때로 쩌들 어 있었다. 아마도 자국은 최근에 기계를 옮기며 생긴 자욱 같았 다. 혜라는 바닥의 긁힌 자국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혜 라의 눈을 번쩍이게 만드는 흔적이 있었다. 공장의 근로자가 심 심풀이로 낙서를 한 듯한 글자 비슷한 것이 바닥에 적혀 있었다. 글자는 끝이 날카로운 못과 같은 것으로 시멘트 바닥을 긁어서 새겨 넣은 것으로 보이는 문자 비슷한 글씨 같았다. 혜라는 수첩을 꺼내 바닥에 그려진 문자를 그대로 옮겨 그려 놓 았다. 수첩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공장을 나온 혜라는 공장의 직 원에게 질문을 하였다. "저..혹시 공장 근로자 중에 외국인 근로자가 근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없습니다. 저희 공장은 사장님의 지시로 절대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하면 임금이 적어 회사의 입장에서는 이득이 되지만 지역 주민 한 사람이라도 더 채용하라는 사장님의 방침이 있어서...." 직원은 은근히 자기 회사가 지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는 뜻을 비추고 있었다. 김 형사는 공장을 빠져 나오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장 형사, 뭐 이상한 구석은 없는 것 같은데...저 직원의 말에 따르면 사장이 지역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얘기던 데...내가 보기에 의심을 살만한 공장은 아닌 것 같아." "글쎄요, 제가 잘못 짚었을 수도 있겠죠....하지만.." "하지만 뭐?" "아니에요 아무것도...." 혜라는 공장의 연구실 지하에서 보았던 일년이 지난 전구의 밝 기와 공장의 바닥에 적혀있던 이상한 문자를 김 형사에게 얘기를 하려다 그만 두기로 하였다. 김 형사는 로슨이 사라진 병원을 방 문하지 않고 그대로 공장으로 찾아와 별다른 소득이 없자 괜한 시간 낭비만 했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있는 듯 하였다. 로슨이 입원했다 사라진 병원에서는 보고서에 올라온 내용 외에 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사고가 일어난 현장과 로슨에게 술을 팔았다는 상점 주인을 만나고 나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김 형 사는 더 이상 수사에 진전이 없자 다음 날 다시 내려 오자며 자 동차를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김 형사는 특수 부 로 전화를 걸어 박 경감에게 보고를 올리고 곧바로 퇴근을 하였 다. 혜라의 자동차가 주차되어있는 특수 부까지 굳이 태워다 준다는 김 형사의 호의를 애써 거절한 혜라는 지하철이 운행되는 역 근 처에 내렸다. 자동차를 찾으러 사무실로 가려다 지하철을 타기로 작정을 하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던 혜라의 눈에 공중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혜라는 집으로 그냥 들어가기가 싫었다. 오늘 하루는 영 개운치 가 않은 하루였다. 혜라는 혹시나 해서 과학 기술원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시간이라 기대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 는데 친구는 때마침 연구실에 있었다. "나야.." "어, 너 혜라구나...어쩐 일이니 니가 전화를 다하고." "빈정거리지 말어. 오늘 기분이 영 아니 올시다 야.." "그래...그럼 이리 와라 술이나 한 잔 하게...." "퇴근 안 해.." "응, 오늘 중에 끝낼 연구서가 있어서...너 올쯤에는 끝낼 수 있 을 거야." 혜라는 전화를 끊고 친구가 근무하는 기술원으로 향했다. 지난 번에 나비의 향연이라는 테이프에서 문제의 전 등을 사진으로 크 게 확대해준 친구였다.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과학 기술원의 연구실 건물은 창마다 불이 켜진 방이 많이 있었다. "어서와 거기 앉아..." 친구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며 의자를 가리켰다.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다. 일이 힘든가 보지?" "아니, 힘은 안 들어 머리가 좀 복잡해서 그렇지." "복잡? 왜 잘 안 풀리는 사건이 있나보구나 참, 그때 너 여기 근무 나와있을 때 이곳에서 사라진 두 사람 행방이 아직도 안 밝 혀졌다며..." "응, 그뿐이 아니야 지금은 그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고 더 큰 사건이..." 혜라는 말을 갑자기 멈추었다. "괜찮아. 수사상에 비밀이라면 구태여 나에게 말할 필요는 없으 니깐." "오해는 말아..너를 믿지 못해 그런은 것은 아니니깐." 혜라는 친구에게 말을 멈춘 것이 미안했지만 사실 친구에게 모 든 내용을 털어놓고 싶었다. 요즘 같아서는 사건을 추리하는 것 조차도 힘에 부쳤다. 너무도 많은 사건이 일시에 밀어 닥쳐왔다. "요즘은 사건의 추리조차 못할 정도로 머리가 복잡해." "그게 무슨 소리니, 너처럼 똑똑한 수재가 사건을 풀어헤치지 못한다니...너 혹시 남자 생긴 거 아니냐?" "계집애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네." "야 노처녀에게 남자 친구가 어떻게 쓸데없는 얘기니. 가장 중 요한 얘기지." "잔소리 집어치우고 내말 잘 들어 봐. 대신 누구에게도 입밖에 내서는 안돼. 혜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동안 특수 부에서 진행하던 사 건 수사와 근간에 밀어닥친 이상한 사건들을 도움을 바라는 바램 으로 이야기하였다. 친구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사건의 연속이구나. 네 머리가 복잡한 이유를 알 겠다. 자료가 너무 많이 입력되면 기억 용량이 초과하게 되지 그 러면 작업 수행 능력도 뒤떨어지게 되고 자칫하면 잘못된 계산을 산출하는 경우도 더러는 있지..." "계집애...누가 컴퓨터 박사 아니라고 할까봐 말하는 것이라곤." "너 무슨 소리....사람의 두뇌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정교하고 위대한 컴퓨터야..." "그래 내 컴퓨터가 용량을 초과했는지 아니면 요사이 바이러스 에 감염이라도 된 것 같다." 혜라는 말을 하고는 웃음을 지었다. 친구도 따라 웃었다. 조금 은 우울한 기분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혜라와 마주하고 따라 웃던 친구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야, 너 좀 전에 이천 공장의 바닥에서 무언가를 적어 왔다고 했지?" "응, 적었다기 보다는 그렸다는 얘기가 정확한 얘기야." "그것 좀 한 번 볼 수 있니?" "뭐 어려울 것은 없지 니가 술이라도 한 잔 산다면....그런데 왜..?" "아니 그냥 혹시....도움이 되지 않을 가해서." 혜라는 수첩을 꺼내 친구에게 문제의 그림 같은 문자를 보여 주 었다. "네 말대로 이상한 문자구나....너 만약 이 문자의 뜻을 알려주 면 네가 술 한 잔 살래?" "그래, 정확하다면...." "정말이지, 그럼 잠시 기다려." 친구는 곧바로 미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 로버트...나야...그래 정말 오랜만이지. 새벽에 잠자는데 미 안해 부탁할 일이 있어서....그래....응...여기 이상한 문자가 있 는데 혹시 로버트가 알 수 있을까 해서...그래...지금 컴퓨터를 켜나....금방 보낼게 급한 내용이니 바로 연락을 줬으면 해... 응....이번 여름에 미국가면 한 번 보자고...그럼 부탁해." 혜라는 친구의 전화 통화내용을 추측하며 친구의 엉뚱함에 웃음 이 절로 났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것도 공장 근로자가 아 무렇게나 그려본 낙서일수도 있는 것을 친구는 태평양 건너의 미 국 땅에서 곤히 잠들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고 난리였다. "누구니? 이 새벽잠에서 일어나고도 네 말에 꼼짝없이 순종하는 바보가....?" "후후..있어 그런 맹한 인간이....미국에서 공부할 때 쫓아다니 던 인간인데 제 눈에 안경이라고 내가 좋아 죽겠데....사람은 똑 똑한데 생긴 게 영.....후후..우습지 나같이 뚱뚱하고 못생긴 여 자가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감지덕지 해야 할텐데 상 대방의 외모를 따지니...그 친구 나보다 더 뚱뚱하고 매력 없이 생겼어...그래도 머리는 똑똑해 고고학을 전공하는 친군데...잊혀 져 가는 소수 민족의 문자와 도형에는 학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 는 것 같아." 친구는 말을 하면서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런 친구의 모습 이 혜라는 보기가 좋았다. 혜라의 친구는 혜라가 수첩에 적어온 문자를 컴퓨터를 통하여 미국으로 보냈다. "올 여름에 나 미국에 볼일이 있어...그때 들어가면 그 친구의 청혼을 받아들일까 생각 중이야...미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조금 은 불만이지만 그래도 내게 그토록 열정적으로 잘하는 사람을 보 지 못했어..." "그랬구나,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니 축하한다. 미국 사람이면 어떠니 너한테 잘해주면 그만이지...." 혜라는 친구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축하를 하고 있었다. 미국에 서 연락이 온 것은 서먹해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친구가 커피를 끓여와 막 마시려는 순간이었다. 컴퓨터로 들어온 내용을 확인한 혜라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혜라의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오늘 김 형사와 소득 없이 돌아선 이천의 공장은 진리교의 집회 장소 내지는 깊은 연관이 있는 건물이 틀림없었다. 친구의 미국인 애인은 세심하게 문제의 문자로 적힌 옛 서적을 보내주었고 수첩에 적었던 문자의 번역도 꼼꼼하게 보내 주었다. 수첩에 적혔던 문자로 만들어진 옛 서적을 보내준 의도는 자신의 판독이 정확하다는 학자다운 준비와 배려였다. 문자의 판독 내용을 보고 친구도 놀라는 눈치였다. 판독 된 내 용은 다음과 같았다. 문제의 문자는 지금은 잘 사용하지는 안치만 그래도 필리핀의 원주민 사이에는 지금도 자신들만이 알아보는 방법으로 사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하였다. 문제의 문자는 필리핀 의 박물관에 보관 된 옛 유물에서 많이 발견된다는 내용과 학계 에서 문제의 문자는 알고있는 사람이 많아 연구 대상에서 제외된 문자이지만 앞으로 사라질 위기에 있어 보존에 힘을 쓰려는 사람 도 있다는 얘기였다. 혜라의 수첩에 적힌 문자가 뜻하는 내용은 문장이 연결되어 있 지 않은 낙서처럼 중간 중간이 끊어져 있었다. "나비의 향연....고향에 가고 싶다..돈...돈이 아니라면..이 짓 은 천벌을 받을 것이다....빨리 끝났으면...." 내용은 간단했지만 문자에 나타난 나비의 향연이라는 단어에 놀 라움을 금치 못 했다. 혜라는 프린터로 출력된 판독 서류를 들고 서둘러 친구의 연구 실을 빠져 나왔다. 친구는 술을 안 사려고 도망을 간다며 한소리 를 하였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기술원을 나온 혜라는 택시를 타고 특수 부로 향하다 방향을 집으로 바꾸었다. 박 경감을 비롯해서 오랜만에 퇴근을 한 요원 들을 이 밤중에 모이게 하려면 자세한 보고사항이 필요하다고 생 각이 들었다. 덜렁 문자의 판독 내용만을 가지고 설명을 한다는 것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혜라는 집에 보관중인 자료들을 떠올려 보았다. 문제의 공장은 물론이고 그간 조사한 건물들과 건물주의 이름 그리고 의심이 가 는 이유에 대한 자료들이 디스켓에 담겨 있었다. 원래는 사무실 책상 서랍에 보관 중이던 것을 요사이 또 다른 사건들이 터지자 디스켓을 집으로 가져갔다. 혜라는 집으로 향하면서도 가슴이 심하게 뛰는 자신을 느낄 수 가 있었다. 택시가 집 앞에 도착하자 혜라는 이 층을 향하여 빠 르게 뛰어 올라갔다. 열쇠를 찾아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선 혜라는 문 입구에 부착된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밝혀지며 혜라의 눈에 낮선 여자가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누구세요?" "퇴근을 하였으면 빨리빨리 집으로 와야지 어디를 그렇게 쏘다 니고 있는 거야." 혜라의 옆으로 어느새 문 옆에 숨어있던 두 명의 사내가 시퍼런 칼을 옆구리에 들이밀며 접근해 있었다. "당신들 누구죠? 누군데 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 있 는 거예요." "이것 봐 장혜라, 큰소리 치지마...지금은 이웃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이야." 사내 하나가 넓은 접착테이프로 혜라의 입을 막았다. 혜라는 사 태의 심각성을 느끼며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였다. 집에 들어설 때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어도 낮선 침입자를 느낄 수가 있었다. 침입자는 대담하게 문과 마주 보이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원룸으로 지어진 혜라의 방은 비교적 넓은 크기였다. 사내들은 혜라를 창가 쪽에 위치한 침대에 눕혀놓고 양손과 두 다리를 침 대의 모서리에 접착 테이프로 단단히 묶어 놓았다. 소파에 앉아있던 여자는 대단한 미모를 갖고 있었다. 그녀에게 서는 차가운 냉혈인간의 느낌이 전해지고 있었다. 여자는 혜라가 들고 온 서류를 꺼내어 살펴보고 있었다. "이런 큰 건수를 발견한 것 같구만. 역시 장 형사는 능력이 뛰 어나...입을 열어줘." 여자의 말에 사내가 깍듯이 인사를 하며 혜라의 입을 막고있던 테이프를 뜯어내었다. "장혜라, 이 서류의 내용을 알고있는 사람은 너 말고 또 누가 있지?" 혜라는 입을 다물고 여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어...이 서류의 내용은 도움을 준 네년 의 친구인 기술 원의 그 뚱보와 너 밖에는 아직 아는 사람이 없 겠지..." 혜라는 놀라움으로 숨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다. 여자는 모든 것을 알고있는 눈치였다. 기술원의 친구조차도 알고있는 눈치였 다. "뭐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여기 이 복사 용지에 한국 과학 기술원 이라는 자랑스러운 로고가 찍혀 있어...그리고 안타깝게 도 내용을 판독해서 보내준 미국 시간이 찍혀 있구만....이 시간 이면 한국 시간으로 그렇지 약 한 시간 전인데...고맙게도 서류 를 받자마자 이리로 달려왔네 시간상으로...." 혜라는 여자의 신속한 계산과 추리에 감탄을 금하면서 한편으로 여자는 소파에서 일어나 혜라의 곁으로 다가오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장혜라, 아주 대단한 미모를 소유하고 있어...거기다 똑똑하기 도 하고 ...난 똑똑하고 예쁜 여자를 보면 질투가나서 견딜 수가 없거든..." "도대체 누구세요? 왜 이러는 거죠." "누구냐고, 사람들이 그러더군 독거미라고...아...독거미라면 잘 모르겠군. 그럼 박 기자는 알겠지...그 기자를 죽인 게 나라면 설 명이 빠를까?" 혜라는 여자의 감정 없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원하는 게 뭐죠?" "원하는 거....물론 원하는 것이 있지...똑똑한 줄 알았더니 상 황 판단이 느리구만...장혜라 그 동안 너무 주제넘게 설치고 다 녔어...이제 그만 죽어줘야 하겠는걸." "이봐요, 지금 경찰은 당신들의 정체를 모두 파악하고 있어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자수하세요." "호호호, 뭐 자수...정말 웃기는 아가씨군. 지금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거야 아니면 둔한 거야. 이것 봐 아가씨 우리는 오늘 밤 아니지 정확히 내일 새벽에 시작되는 집회만 끝나면 일본으로 돌 아가게 되어있어...아가씨의 시체가 발견될 즈음에는 우린 이미 한국에 없을 거야...." 혜라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임을 느낄 수 있었다. 사 건의 결말을 눈앞에 두고 죽는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혜라는 죽 기 전에 궁금한 사실을 알고 싶었다. "진리교는 일본의 다까시오 조직과 연 관이 있죠? 그리고 나비 사냥꾼은 도대체 뭐죠?" "호...이런 별걸 다 알고 있었네. 장혜라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도저히 살려주고 싶어도 살려줄 수가 없겠는걸...나 비 사냥꾼...어떻게 알았지...말을 안해도 상관은 없어...나비 사 냥꾼은 지저분한 인간들이지...하지만 내일 새벽에 시작되는 마 지막 집회가 끝나면 너희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잘난 수재들 중에 많은 인간들이 나비 사냥꾼과 똑같은 지저분한 인간들이 되 겠지, 아니야..그 잘난 인간들은 이미 지저분한 인간들이지 육욕 에 미쳐 진리교의 열성적인 신도가 되었으니 말이야..." "나비 사냥꾼은 에이즈 환자가 아닌가요? 그리고 로슨도 당신들 이 병원에서 납치해 갔죠?" "정말 대단한 아가씨야. 자...이제 그만 이 세상과 이별을 해볼 까. 아니지 그냥 보내기에는 아까운 아가씨야. 우리 좀 즐겨보고 끝을 낼까..." 여자는 사내들에게 눈 짓을 보냈다. 사내들은 혜라에게 달려들 어 다시금 입에 테이프를 봉했다. "어디...예쁜 아가씨의 몸매는 어떤가 감상을 해볼까." 여자는 품안에서 예리한 칼을 꺼내 혜라의 옷을 천천히 잘라내 었다. 여자의 뒤에 서있던 사내들의 눈빛이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 다. "역시 예상대로 훌륭한 몸을 갖고 있네. 이거 아주 샘이 나서 미칠 지경인걸. 이 잘난 몸으로 얼마나 많은 사내의 애간장을 녹 였을까." 여자는 말을 하면서 혜라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자의 손이 몸 을 더듬자 혜라는 깜짝 놀라며 몸을 뒤틀었지만 침대에 단단히 묶인 두 손과 양다리로 인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자의 손은 점차 아래로 내려와 혜라를 더듬고 있었다. "음...탄력이 아주 좋은데." 여자는 다른 한 손에 들려있던 칼로 혜라의 팬티를 찢어내고 있 었다. 조각난 팬티가 바닥에 떨어지자 혜라의 은밀한 부위가 적 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양다리를 침대의 모서리에 묶인 탓에 다리는 한껏 벌어져 있었다. 혜라는 창피함과 치욕으로 눈물이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죽 음의 공포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난생처음 낯선 여자와 사 내 앞에 벌거벗은 몸으로 치욕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 죽음 보다 더 한 고통으로 혜라를 억눌러왔다. 여자의 손이 혜라의 쓰다듬었다. 곧이어 여자의 눈이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짖고 이었다. "놀라운 사실인데. 아직도 남자 경험이 없다니 말이야. 난 누구 보다 여자의 신체에 대하여 잘알고 있지. 특이나 남자 경험이 없 는 처녀의 몸은 더더욱 쉽게 알 수가 있어....오늘은 아주 재미 있는 구경을 하게 되겠군. 아쉽다면 내가 남자가 아니라 너같이 아름다운 여자의 처녀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섭섭하지 만 어쩔 수 없지...구경을 하는 것도 재미는 있을 거야...." 여자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사내들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 소를 보내고 있었다. 여자와 눈길이 마주친 사내들은 입가에 미 소를 띄우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조장님."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아 잔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뭣들 하나. 여자가... 그것도 순결한 처녀가 옷을 벗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너희들은 바보같이 옷을 입고 있단 말이야...어 서 벗지 못해." 여자의 호통에 사내들은 연신 웃음을 흘리며 서둘러 옷을 벗었 다. 조장이라 불리는 여자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사실에 전혀 창 피함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너희들은 오늘 아주 운이 좋은 줄 알아라.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아름다운 여자의 처녀를 갖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흥, 감사....짐승 같은 자식들...뭐하고 있어...아가씨가 너희들 의 물건을 보고 싶어하는지도 모르니 얼른 보여줘야 신사다운 매 너가 아니겠어...호호호...어서." 여자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광기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밤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자유인은 곧 바로 서울로 올라가 는 첫 기차를 예매하였다. 첫 기차가 출발하기까지는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부산 역 근처에는 새벽부터 문을 열어놓은 식당 들이 많이 있었다. 자유인은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면서 기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호텔 식당이 아닌 작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자유인은 깊은 감회에 젖어 들었다. 어릴 적 떠나온 고향에서 장 날이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갔던 장터의 소란스럽던 기억과 장터의 한 귀퉁이에 국밥을 팔던 작은 식당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자유인에게 아버지가 사주시던 장터의 국밥은 잊을 수 없는 별미였다. 자유인은 아련한 추억의 쓸쓸함을 접어둔 채 서울로 향하는 기 차에 올랐다. 서울에 도착한 자유인은 먼저 백화점을 찾았다. 다까시오 조직 이나 경찰에서 호텔을 조사하며 자신의 인상착의를 호텔직원에게 물어봤을 공산이 컸다. 지금처럼 노인의 모습으로 다까시오 조직 의 뒤를 쫓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행동이었다. 백화점에서 의상을 구입한 자유인은 변장한 노인의 분장을 지우 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길거리를 오가는 젊은 사람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살펴보고 구입한 의상은 자유인에게 정말 잘 어 울렸다.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 이따금 자유인을 유심히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개는 여자들이 전부였다. 출중한 자유인의 외모는 여자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하였다. 젊고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한 자유인은 일본인 아사끼로 투숙 했던 호텔의 커피숍을 찾았다. 커피숍의 위치는 정문을 오가는 사람들과 로비의 전체적인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있었 다. 자유인은 커피숍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예리 한 자유인의 관찰에 이상한 부류가 포착되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과 중년의 사내가 정문과 로비가 잘 보이 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누군가를 찾고있는 기미가 역력했다. 중년의 사내가 무슨 말을 하자 청년은 공손히 일어나 인사를 하 고 로비 방향으로 걸어갔다. 로비에는 호텔 측에서 마련해놓은 소파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청년은 쇼파에 앉아있는 또 다른 청년들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자유인은 커피숍의 두 사내와 로비의 소파에 앉아있는 사내들이 다까시오 조직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내들은 움직일 줄 모르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내들이 움직 여야 그들의 뒤를 미행하여 그들이 묵고있는 거처를 알아내야만 했다. 그들이 묵고있는 거처에는 틀림없이 야마다도 함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오야봉의 충복 중의 충복인 야마다가 오야봉의 복수를 위하여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냈다면 본인이 직접 인솔하여 들어왔을 것 이다. 야마다는 오야봉의 복수도 복수지만 진리교에 하달된 마지 막 카드의 실행을 진두지휘 하려고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많았 다. 고국이라고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찾아온 고국은 낯선 이국 땅 과 진배없었다. 자유인은 진리교의 집회 장소를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으로 다까시오 조직의 인물들을 역으로 추적해 야마다를 찾 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사내들을 의식해 호텔을 빠져 나와 호텔의 정문이 보이는 맞은 편의 작은 카페에서 자유인은 사내들이 호텔에서 나오기를 기다 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둠이 내려도 사내들의 모습은 보 이지를 않았다. 카페를 나온 자유인은 호텔로 들어가 보았다. 커 피숍과 로비에는 낮에 보았던 사내들이 움직일 줄 모르고 앉아있 었다. 자유인은 웃음이 절로 났다. 사내들은 분명 아사끼라는 노신사 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도 달리 방 법이 없었을 것이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자신을 찾으려고 고생 하는 그들이 안쓰럽기조차 했다. 호텔 직원의 말에 따라 그들은 막연히 아사끼라는 노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예상 밖으로 잠시 후 사내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들이 일 어난 자리를 다른 사내들이 교대로 앉아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들은 밖으로 향하지 않고 객실로 향하고 있었다. 자유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내들은 아예 호텔에 묵으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들을 쫓아가 야마다의 행방을 물을 수도 있었지만 섣불리 행동을 하기에는 진리교의 문제가 염려되었다. 만일 야마다가 역 으로 추적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진리교의 집회 시기를 앞당기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사내들의 움 직임을 지키고 있기에는 시간이 촉박하였다. 자유인은 주머니에 들어있는 디스켓을 만져보며 한국 경찰을 떠 올려 보았다. 뒤이어 장혜라의 모습을 떠올린 자유인은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장혜라의 집으로 향했다. 지난밤에 뒤따라온 장혜라의 집은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유인은 집안의 동태를 살피려고 맞은 편 주택의 3층 계단으로 올라가 보았다. 2층에 자리한 장혜라의 방은 작은 창문과 큰 창 문이 길가로 트여있었다. 창문에는 화사한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 고 작은 창의 커튼은 완전히 드리워지지 않고 끝 부분이 조금 말 려있었다. 자유인은 커튼이 말린 작은 틈으로 실내를 살펴보았다. 거리가 떨어져 작은 틈으로 실내를 확인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실내에는 장혜라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장혜라는 등을 돌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듯 뒤 머리만 보이고 있었다. 그 앞으로 두 명의 사내들로 보이는 형체가 커튼에 가려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사내들로 보이는 형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희미 하기는 했지만 두 개의 형체는 동시에 옷을 벗고 있는 듯 하였 자유인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았 다. 장혜라로 판단했던 여자의 뒷모습에 눈길이 멈추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장혜라의 뒷모습은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 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파에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여자는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자유인은 황급히 건너편 건물에서 내려와 장혜라의 집으로 뛰어 갔다.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소리 없이 오른 자유인은 장혜라 의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에 귀를 붙이고 방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장혜라의 방에서는 야릇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신음소리는 입을 무언가로 봉했을 때 나오는 소리 같았 다. 신음소리 사이로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기분이 어떤가? 두 명의 사내에게 서비스를 받는다고 생각하 니...물론 좋겠지." 자유인은 대충 방안의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장혜라가 위험에 처한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방법이 선 뜻 생각나지 않았다. 자유인은 조금 전에 택시에서 내려 장혜라의 집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세탁소를 떠올리고 급히 세탁소로 달려갔다. 세탁소 안에는 나이가 지긋한 사내가 TV프로에 넋을 잃고 있었 다. 자유인은 지체없이 세탁소로 들어갔다. 자유인의 출현에 의 자에서 일어서던 주인은 갑작스럽게 뻗어오는 자유인의 주먹을 복부에 맞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유인은 세탁소 진열대에 걸려 있는 세탁물 중에 여자 옷으로 보이는 옷을 몇 점 걷어내어 세탁 소를 나와 장혜라의 집으로 달려갔다. 장혜라는 눈을 감아 버렸다. 사내들은 옷을 모두 벗고 자신들의 성기를 혜라의 눈앞에 들이대며 웃고 있었다. 사내들의 벗은 몸 에는 요란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몇 군데 칼에 맞은 흉터도 있 었다. 사내들은 둘로 나뉘어 한 명은 혜라의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다 른 한 명은 사타구니의 음모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혜라는 자신의 처지에 분한 마음과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이 나 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눈 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눈물을 보며 즐거워할 인간들 을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서러움은 밀려오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 았다. 사내의 입이 젖가슴으로 다가와 끈적거리는 침을 묻히고 있었 다. 사타구니에 무릎을 끓고 앉아있는 사내는 손가락을 혜라의 은밀한 계곡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혜라는 눈을 뜨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혜라는 눈을 돌려 여자를 쳐다보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여자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그녀의 팬티가 보였다. 그리고 여자의 손은 팬티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혜라와 눈길이 마주치자 여자는 야릇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사타구니에 있던 사내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며 사내의 성기 가 허벅지에 와 닿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성 기를 혜라의 은밀한 곳으로 밀어 넣으려고 힘을 주고 있었다. 그 순간 새소리 같은 현관 벨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들은 행동을 멈추었고 여자는 소파에서 퉁겨지듯 일어섰다. 혜라는 늦은 밤에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다. 벨소리는 연이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여자는 사내들을 향하여 눈짓으로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 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사내들은 혜라의 입을 손으로 단단히 틀 어막아 소리를 막고 있었다. "누구세요?" 여자의 목소리에 잔뜩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네, 세탁소예요." 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혜라는 기대감이 무너지는 허탈감 을 느꼈다. "무슨 일이죠?" 여자는 문 밖으로 뚫어진 작은 확인 창으로 문 밖을 쳐다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문 밖의 사내는 손에 세탁물을 들고 서 있었 다. "세탁물 맡기신 거 배달 왔어요." "지금 주인이 잠깐 어디 갔으니 나중에 오세요." "아, 이것 봐요...주인이 없으면 세탁물만 받아놓으면 되잖아요. 이걸 들고 갔다가 다시 오란 말이에요." 문 밖의 사내는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혜라는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세탁소에 옷을 맡긴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세탁물 을 배달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문 밖의 세탁소 직원은 쉽사리 돌아갈 눈치가 아니었다. 더 이 상 세탁물을 안 받아 놓을 구실이 없었다. 여자는 사내들에게 다 시 한 번 주의를 주고 문을 열었다. 여자는 세탁물을 받을 수 있을 정도만 문을 열었다. 조금 열려 진 문으로는 안쪽의 침대가 보이지 않았다. 세탁소 배달원은 세탁된 옷을 그녀에게 건네주다 한 벌의 옷을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배달원이 떨어진 옷을 주으려고 허리 를 숙이는 것을 여자가 저지하고 자신이 허리를 구부려 옷을 주 으려 하였다. 여자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며 허리가 구부려지는 순간에 배달 원의 발길질이 여자의 얼굴에 작렬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고 문은 벌컥 열어졌다. 활 짝 열린 문으로 사내가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사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있던 사내들이 알몸으로 사내에 게 달려들었다. 세탁물을 들고 온 사내는 갑자기 달려드는 사내들의 발길질을 막아서며 뒤로 주춤 밀려나고 있었고 알몸의 두 사내는 번갈아 사내에게 발길질을 하였다. 두 사내의 발길질은 예리하고 날카로 워 숨쉴 틈이 없었다. 뒤로 밀리던 사내가 자세를 바로 잡고 두 사내에게 공격을 할 때는 쓰러졌던 여자도 일어나 있었다. 자유인의 발길질에 입술이 찢어진 여자는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 끝으로 닦아내며 자유인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알몸의 두 사내를 공격하며 자유인은 두 사내의 몸에 새겨진 문 신 중에 어깨 부위에 새겨진 낫 그림의 문신을 발견 할 수가 있 었다. 어깨 부위에 낫 그림을 문신하고 있다면 사내들은 일본의 암살 조직이 틀림없었다. 일본에는 전문 암살 교육을 받은 조직이 몇 군데 있었다. 각 조직은 작은 규모로 큰 조직과 계약에 의하여 종속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두 사내와 여자는 다까시오 조직과 계약을 맺고 한국에 나와있 는 암살 조직의 일원이었다. 자유인이 두 사내를 제압하는 과정을 여자는 팔짱을 끼고 유심 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두 사내는 자유인의 공격에 맥없이 쓰러 져 움직이질 않았다. 돌연 여자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대단한 솜씨군요. 한국 경찰에도 당신 같은 고수가 있다는 사 실이 놀라워요." 여자는 자유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감탄을 연발하였다. 자신의 부하들을 간단하게 쓰러트린 사내의 실력과 눈부신 외모 에 경탄을 하고 있었다. "쓰러진 저 두 놈을 데리고 물러난다면 순순히 보내 주겠다." 자유인은 왠지 여자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호...오, 대단한 아량을 베푸시는군요. 하지만 저 두 놈을 해치 웠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그건 나 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군요." "너희들이 누군지 짐작은 하고 있다. 돈 때문에 다까시오 조직 과 손을 잡고 있다면 굳이 나와 대결을 벌일 필요는 없다. 조용 히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 물러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 고 본다. 이미 오야봉이 죽은 다까시오 조직을 위하여 목숨을 버 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당신, 누구지? 한국 경찰이 아니지? 우리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 듯 한데....도대체 누구야? 오야봉의 죽음도 알고있고 손 씀 씀이도 보통이 아닌데 그 정도 실력이라면....혹시 오야봉을 살해 한...." 여자는 의아한 눈초리로 자유인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자유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여자를 쏘아보기 만 하였다. "대답이 없다는 것은 맞다는 얘기인가?"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여자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는 듯 하더니 금새 얼굴에 웃음기 를 보이며 놀라는 제스처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군. 그래서 내 부하들이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군. 자유 인...천하의 자유인을 여기서 만나다니...자유인 당신은 자유인이 틀림없어, 그렇지?" 여자는 흥분으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자유인은 여전히 대 답을 하지 않았다. 혜라는 여자의 입에서 자유인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 며 고개를 돌려 여자와 마주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를 보고 전설적인 킬러로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내는 너무도 매 력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혜라는 자신의 주변에 갑자기 닥쳐온 예기치 않은 사건에 정신 이 없었다. 느닷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집안에서 기다리 고 있었고 그 사람들에게 치욕적인 놀림을 당하기 직전에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지만 나타난 사람이 생각지도 않은 자유인 이라는 국제적인 암살자라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뜻하지 않은 영광이군요. 천하의 자유인을 이렇게 가까이 서 보게되고 지금의 당신 모습이 변장을 안한 참모습이라면 당신 은 정말 매력적인 남자예요." "긴소리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라." "그럴 수는 없군요. 천하의 자유인을 직접 본 것도 영광인데 어 찌 그냥 간단 말이죠. 물론 당신에 비하면 어쩔지 몰라도 저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에요.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사람 들이 독거미라고 부르죠." 독거미라면 자유인도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많지 않은 여자 암 살자 중에 독거미의 실력은 웬만한 실력의 남자 살수보다 뛰어나 다고 들었다. 그녀는 전통적인 일본의 암살기술인 닌자교육을 제 대로 받은 여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독거미가 한국에 있다 는 사실이 조금은 놀라웠다. 그만큼 다까시오 조직에서는 한국 정신문화말살 계획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자유인, 오늘 당신의 실력을 보고 싶군요." "화를 자초하는군." 여자는 허리춤에서 가느다란 채찍을 꺼내었다. 채찍은 여자의 허리에 벨트처럼 묶여있었다. 여자는 느닷없이 자유인의 얼굴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공기 를 가르는 예리한 소음이 들리며 여자가 휘두른 채찍이 자유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자유인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채찍을 피하며 여자의 다른 한 손 을 예의 주시했다. 닌자 교육을 받은 여자라면 온몸 구석구석에 수 십 종의 암기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여자의 채찍은 빠르고 정확하게 자유인을 쫓아다녔다. 여자의 채찍에 맞은 화병이 산산이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여자가 채찍을 휘두르며 한 손을 자신의 머리로 옮겨가고 있었 다. 자유인은 여자가 채찍을 들고있지 않은 다른 손이 머리로 옮겨 가는 것을 발견하고 여자가 암기를 사용하리라 짐작하고는 마음 으로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를 향한 공격의 틈을 여 자가 암기를 사용하는 순간으로 정했다. 예상대로 여자는 손을 머리 뒤로 옮겨가 머리 뒤에 꽂혀있는 머 리핀을 꺼내어 자유인을 향해 힘껏 날렸다. 머리핀은 흡사 비녀 모양으로 끝이 뾰족하고 예리했다. 여자의 손을 떠난 머리핀은 자유인의 가슴을 향하여 빛살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자유인은 날아드는 머리핀을 피하기 위하여 몸을 낮추며 바닥으 로 한바퀴 굴렀다. 여자의 채찍은 뱀처럼 바닥에 늘어져 있었고 몸을 굴린 자유인은 채찍의 끝을 잡고 공중으로 솟아올라 여자의 뒤로 날아갔다. 채찍은 여자의 목을 휘어 감았고 여자는 자유인의 전광석 같은 신속한 동작에 당황하며 목에 감기는 채찍을 피하려고 몸을 움직 였으나 이미 몸을 움직이기에는 동작이 느렸다. 자유인은 여자의 뒤로 날아가 내려서는 순간에 채찍을 양손으로 붙잡고 여자의 목 을 채찍으로 감아 당기고 있었다. 자유인의 강한 힘에 채찍은 여 자의 목을 꼼짝못하게 조이고 있었다. 여자는 숨이 막혀오며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동시에 점차 의 식을 잃어가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자유인은 여자의 숨이 끊어 지기 직전에 당기고 있던 채찍을 풀어주었다. 자유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쓰러진 사람들을 묶을 수 있 는 끈이 식탁 옆에 있었다. 자유인은 쓰러진 두 사내와 여자를 끈으로 단단히 묶은 다음 침대에 묶여있는 혜라에게 다가갔다. 혜라는 자유인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창피함으로 눈을 감았다. 알몸으로 사지를 벌린 채 침대에 묶여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 자 참았던 눈물이 한순간에 쏟아져 내렸다. 자유인은 혜라의 손과 발에 묶여있는 테이프를 떼어내고 커다란 타월로 혜라의 몸을 덮어주었다. 혜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 속의 옷을 아무렇게나 챙겨들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옷을 입으며 혜라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 의 모습을 쳐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침착해야 한다고 몇 번 이고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에게 암시를 주었지만 쉽사리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자유인은 여자가 앉았던 소파에 앉아있었다. 혜라는 화장실에서 나오며 눈길을 밑으로 향했다.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도움을 받게되어..." 혜라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많이 놀라신 것 같군요. 장혜라씨와 의논을 나누려 고 왔는데 아무래도 다음 기회에 만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혜라는 사내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은 것만 같았다. 기억을 더듬 으며 사내의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사내가 소파에서 일 어서려는 순간에 혜라는 기억 속의 목소리를 찾을 수가 있었다. "잠깐만요, 당신은 지난번에 제게 정보를 주겠다고 전화하신 분 이 아닌가요?" "용케도 제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군요. 맞습니다 제가 혜라씨 에게 전화를 했던 사람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죄송합니 다." "아니에요, 그리고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을 까요?" "말씀하세요." "혹시 자유인이 아니세요?" 사내는 머리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하였다. "제가 혜라씨를 만나고자 한 것은 지난번에 말씀드린 나비 사냥 꾼에 대한 정보입니다." "나비 사냥꾼이라면 에이즈 환자들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유인은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한국 경찰에서 이미 알고있는 사 실입니까?" "아니에요, 방금 전에 저 사람들에게서 알았어요." 혜라는 쓰러진 여자가 말했던 이야기를 자유인에게 소상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오늘밤에 알아낸 이천 공장의 비밀도 얘 기하였다. 아무래도 자유인은 적이 아닌 동지 같았다. 무슨 연유 로 자유인이 자신에게 진리교의 정보를 주려고 하였는지 몰라도 자유인이 적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혜라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자유인의 표정은 사뭇 놀라는 눈치였 다. "저들이 집회를 앞당겨 진행한다고 하였습니까?" "네, 내일 새벽에 마지막 집회를 연다고 저 여자가 틀림없이 말 했습니다." "큰일이군요.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집회 장소로 가야 되겠 군요. 집회는 막아야 합니다. 이유는 여기 디스켓에 모두 기록되 어 있습니다. 이 디스켓은 죽은 다까시오 조직의 오야봉이 기록 한 내용입니다." 자유인은 디스켓을 혜라에게 건네주며 간단하게 그간의 일을 설 명하여 주었다. "제가 먼저 이천 공장으로 가야 될 것 같습니다. 이천 공장을 찾아가는 길을 알려주세요." "잠깐만요. 우선 경찰에 연락하여 함께 가야 합니다." "그건 안됩니다. 시간도 없거니와 집회 장소에 많은 신도들이 모여있을 겁니다. 자칫 경찰이 섣불리 접근하였다가는 불행한 사 태가 야기될 수도 있습니다. 저들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 입니다." 혜라는 자유인의 설명에 수긍이 가면서도 자유인을 혼자 이천의 공장으로 보내기가 어쩐지 사지로 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자유인 의 재촉에 혜라는 이천 공장의 위치와 약도를 그려주며 경찰이 도착 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자유인이 떠나고 혜라는 비상 연락망을 이용하여 박 경감에게 요원들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박 경감과 통화를 끝 낸 혜라는 쓰러져있는 두 사내와 여자에게 다가갔다. 사내들과 여자는 정신을 차리고 혜라를 노려보고 있었 다. 혜라는 벌거벗은 사내들을 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사내들 의 사타구니에는 초라하게 위축된 물건이 흉측스럽게 늘어져 있 었다. 혜라는 있는 힘껏 사내들의 얼굴을 걷어찼다. 사내들은 맥 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곧이어 여자를 노려본 혜라는 여자의 빰 을 거칠게 후려갈겼다. 한 번 폭발한 분노는 자제가 어려웠다. 지칠 데로 여자와 사내들을 구타한 혜라는 박 경감이 도착하기 전까지 자유인이 주고 간 디스켓을 컴퓨터에 넣고 검색을 해 보 았다. 디스켓에 담긴 내용을 확인하며 혜라는 놀라움으로 얼굴 색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박 경감이 요원들과 혜라의 집에 도착한 시간은 자유인이 이천으 로 떠난 지 30여분이 지나서였다. 혜라의 집으로 들어선 박 경감과 요원들은 문 입구에 묶여있는 벌거벗은 두 사내와 여자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김 형사는 벌거벗은 사내들을 쳐다보고 혜라를 살펴보고 있었 다. 김 형사의 눈에는 걱정하는 구석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상한 상상을 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선배님 그런 눈으로 보지마 세요. 저 아무 일도 없었어요...전 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대충 얘기는 들었지만 진리교가 어쩌고 자유인이 어쩌고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보고를 해대니, 자세히 얘 기 좀 해 보라고." 박 경감이 혜라를 쳐다보며 한 소리 하였다. "저..그게 말이죠." 혜라는 김 형사와 헤어진 뒤로 기술 원에 들러 이천 공장의 바 닥에 적혀있던 낙서의 내용과 집으로 돌아와 독거미라는 여자에 게 당한 수모와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자유인의 출현으로 위기를 모면한 내용을 소상히 얘기하고 자유인이 알려준 정보에 대하여 추가로 설명을 하였다.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잖아, 빨리 출동해야지." 박 경감이 서둘러 나가려고 하자 요원 한 명이 묶여있는 사내들 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안돼요, 그 놈들은 대단한 무술 실력을 갔고 있어요." 혜라의 외침에 묶인 끈을 풀려고 하던 요원은 깜짝 놀라며 손을 멈추었다. 요원 하나가 남아 뒤처리를 하기로 하고 일행들은 서둘러 혜라 의 집을 떠나 이천으로 향했다. 혜라는 집을 나오며 노트북 컴퓨 터를 들고 나왔다. 달리는 차안에서 혜라는 컴퓨터에 디스켓을 집어넣고 다까시오 조직의 오야봉이 기록했다는 내용을 박 경감에게 보여 주었다. 노트북 화면에 나타나는 일어를 혜라가 옆에서 해석하는 바람에 차안의 모든 요원들이 함께 들을 수가 있었다. 박 경감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요원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분노로 상기되어 있었다. "정말 개 같은 자식들이구만." "이 쪽발이 새끼들을 어떻게 잡아죽이지. 그나저나 자유인이라 는 그 킬러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에 뛰어들었을까요?" 김 형사의 의문에 모두는 의아한 표정들을 짖고 있었다. "자유인은 국제적인 킬러로 돈이 따르는 거래가 아니면 움직이 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 정부에서 자유인에게 돈을 주고 고용한 것도 아니고 도대체 알 수가 없네요." 김 형사는 박 경감을 쳐다보며 말을 하였다. "글세?" 박 경감의 대답은 짤막했다. "이건 느낌인데요, 자유인이 혹시 한국 사람이 아닌가 해요? 외 국 사람이 아무리 한국말을 잘한다 하여도 어색한 구석이 한 곳 은 있을 텐데 자유인은 너무도 한국말을 잘 하더 라구요. 꼭 한 국 사람 같았어요." 혜라의 말에 요원들의 눈길이 혜라에게 쏠려있었다. "자유인....그 사람 어떻게 생겼던가?" 박 경감은 조용히 혜라에게 질문을 하였다. "예, 너무 잘 생겼어요. 마치 영화 배우를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이는 30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어 요." 혜라는 박 경감의 질문에 자유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하였다. "장 형사가 보았던 자유인의 모습은 혹시 변장한 모습이 아닐 까?" "아니에요. 가까이 서 보았지만 절대 변장은 아니었어요. 물론 그런 사람의 변장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변장 이 아닌 것은 틀림없어요." 박 경감은 묵묵히 혜라의 답변을 들으며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 다. "자유인이 변장을 하지 않고 장 형사 앞에 나타났다면 그 사람 은 이번 사건에 목숨을 걸고 덤벼든 거야. 그렇치 않고야 여태껏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던 자유인이 본 모습으로 장 형사 앞에 나 타났겠어. 자유인이 세계 각국 경찰의 표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우리를 돕고있는 동지야. 그를 죽게 나둘수는 없어. 서둘러 그가 혼자 진리교와 부딪치는 것을 막아야 해." 박 경감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혜라가 알아낸 진리교의 마지막 집회 시간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있었다. 요원들을 태운 승합 차는 이천 조금 못미처 곤지암을 지나치고 있었다. 박 경감은 출발에 앞서 경찰 특수 부대인 107 대 테러전담 요 원들의 출동을 경찰청에 요청하였다. 특수 부대 요원들은 공장과 가까운 근방에 비상대기 하기로 되어있었다. 장혜라의 집을 서둘러 빠져 나온 자유인은 택시를 잡아타고 혜 라가 그려준 약도를 운전기사에게 보여 주었다. 운전기사가 요구 하는 요금의 두 배를 주며 빨리 가줄 것을 부탁하자 택시는 쏜살 같이 이천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천 공장의 입구에서 내린 자유인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두 운 산길을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주위는 어둠 속에 파묻혀 정적 만이 감돌고 있었다. 공장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공장의 정문을 밝히는 밝은 조명이 철로 된 대문의 양쪽 기둥 위 에서 비쳐지고 있었다. 자유인은 자세를 낮추며 빛을 피하여 공장으로 접근하였다. 공 장은 예상 밖으로 조용했다. 공장 주변을 돌아보아도 사람의 인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공장 입구의 경비실에 두 명의 경비 외에는 별다른 경비가 없었 다. 자유인은 낮은 공장의 담을 뛰어넘어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 았다. 공장 안은 어둠 속에 묻혀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 다. 공장 뒤편의 연구 동으로 걸음을 옮기자 연구동의 이 층 창 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 자유인은 조심스럽게 연구동으로 향하면서 불안감이 들었다. 장혜라가 집회 장소를 잘못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독거 미가 말했던 마지막 집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집회를 목전 에 두고있는 장소로는 너무도 조용하고 사람이 없었다. 연구동의 이 층 사무실에는 한 명의 사내가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혹시 잊어먹은 중요한 서류가 없는지 사내는 꼼꼼히 서 류들을 확인하며 정리 작업을 하고있었다. 사내의 표정이 갑자기 똥 씹은 표정으로 변하더니 전화기의 자동 메모리 버튼을 누르고 문을 열고 뛰어 나갔다. 저녁으로 먹은 두부찌개가 잘못 되었는지 사내는 벌써 세 번이 나 화장실을 들랑거리고 있었다. 두 번째 화장실에 갔을 때 마침 전화가 걸려와 전화를 받지 못했다. 시원하게 일을 보고 돌아오 자 다시금 전화가 걸려왔지만 사내는 상대방에게 야단을 맞았다. 중요한 시기에 어디를 쏘다니냐고 상대방은 난리였다. 그렇게 욕 을 한차례 얻어먹은 사내는 세 번째는 물론 지금도 화장실로 뛰 어가며 전화기의 자동 메모리 버튼을 누르고 나갔다. 자유인은 불이 켜진 연구동의 이 층으로 접근하였다. 계단을 올 라서며 복도로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에 불이 켜진 방의 문이 왈칵 열리며 한 사내가 뛰어 나오고 있었다. 자유인은 벽에 몸을 붙이고 사내를 살펴보았다. 문을 열고 뛰어나온 사내는 화장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내가 화장실로 사라지자 자유인은 문이 열린 사무실로 조심스럽게 다 가갔다. 사무실은 아무도 없었다. 책상과 바닥에는 어수선하게 서류 뭉 치들이 쏟아져 있었다. 자유인은 사무실에 들어가 문 옆에 숨어 사내가 화장실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정적을 깨는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전화 벨은 네 번을 울더니 갑자기 여자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부재중이오니 용건이 있으신 분은 신호 음이 들린 후에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삐.....이." 여자의 안내 방송이 끝나자 곧이어 전화를 걸어온 사내의 목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 이 씹새야 또 어디 갔어? 나다 자식아. 서류 정리 아직 안 끝났냐? 다 끝났으면 빨리 와라. 신도들은 거의 다 모인 것 같 다. 빨리 끝내고 떠야지, 지겹다 지겨워...빨리 와 알았지. 참 여 기가 어디냐 하면 작년 여름에 우리 개 잡아먹던 곳 알지....바로 그 앞이더라...그때 막 건물 짓고 있었잖아...그럼 이따 보자." 전화가 끊어지고 얼마 안 있어 화장실에 다녀온 사내가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자유인은 사내가 앞으로 지나치는 순간 에 사내의 팔을 낚아채며 순식간에 팔목의 혈을 짚어 눌렀다. 사내는 갑자기 밀려드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했 다. 자유인은 사내의 팔을 잡고 책상으로 다가가 사내의 얼굴을 책상 위로 찍어눌렀다. "집회가 열리는 장소가 어디인가?" 자유인은 누르고 있던 혈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누구냐?"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자유인은 다시 한 번 사내의 팔목 혈에 힘을 주었다. 사내는 고 통으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집회 장소는 어디인가?" "모른다." "모른다고. 그럼 영영 팔을 못쓰게 만들어주지." 자유인은 사내의 팔을 우악스럽게 비틀어 버렸다. 사내의 입에 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말 모릅니다, 으..윽...정말 입니다." "꼭 그렇게 병신으로 한 평생을 살고 싶다면 원대로 해주지." 자유인은 책상 위의 전화기를 끌어당겨 메시지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에서는 방금 전에 전화를 걸었던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 이 씹새야 또 어디 갔어? 나다 자식아.......참 여기가 어디 냐 하면 작년에 우리 개 잡아먹던 곳 알지....."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은 사내의 표정이 당황하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른다고 했으니 네 놈은 정녕 병신으로 한 평생을 살기로 작정한 놈으로 알겠다." 자유인은 사내의 팔을 더욱 비틀어 버렸다. "으..윽...으 잠깐 잠깐만, 말하겠소." 사내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선선히 털어놓았다. 자유인은 사내 에게 직접 약도를 그리게 만들었다. 사내에게 약도를 받아든 자 유인은 사내의 두 팔과 두 다리를 포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려 놓 았다. 그리고 사내의 등뒤로 돌아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척 하고는 재빠르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상자를 사 내의 허리 뒤 춤에 꽃아 놓았다. "잘 듣도록. 지금 네 놈의 뒤에 꽃혀 있는 폭탄은 이 건물을 통 째로 날려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폭탄이지. 폭탄에는 정교한 무선 장치가 되어있어 네 놈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바로 폭발하게 되어있지. 그리고 네 놈이 알려준 약도대로 찾아가 만약 틀리면 바로 폭탄을 터뜨리고 사실이면 폭탄을 무선으로 해제하겠어. 폭 탄이 해제되면 삐삐 하는 경보 음이 울리니 그때 움직여도 상관 은 없어...어때, 이 약도는 사실인가?" 사내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죄송합니다. 그 약도의 큰길에서 반대편으로 들어가면 좌측으 로 강가에 홍천 콘도가 보입니다. 그곳에서 집회가 치러집니다." 자유인이 빠져나간 뒤로도 사내는 움직이질 못 했다. 공장을 빠져 나온 자유인은 큰길까지 서둘러 달려나갔다. 큰길 에서 이천 방면으로 달려가던 자유인은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빈 택시를 발견하고 길을 건너 택시를 가로막았다. 충주에서 이천까지 손님을 태워주고 충주로 돌아가던 택시 기사 는 갑자기 반대편 도로에서 뛰어드는 사람을 발견하고 황급히 브 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길을 건너 택시를 가로막은 사람은 운전 기사의 욕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택시의 앞좌석으로 올라타고 있 었다. "이봐요, 당신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그리고 지금 뭐 하는 겁니 까?" "운전기사, 여기 좀 급히 갑시다." 자유인은 운전기사의 화난 목소리에 상관없이 약도를 보여주며 급히 가줄 것을 당부하였다. 운전기사는 언뜻 약도를 쳐다보고 장거리 운행임을 알고서도 놀 란 것이 화가나 요금을 배로 불렀다. "홍천까지는 20만원은 줘야 갑니다." 운전기사의 태도는 불친절하기가 짝이 없었다. 자유인은 주머니 에서 돈을 꺼내어 운전기사에게 건네주며 빨리 가줄 것을 부탁하 였다. 돈을 받은 운전기사는 금새 기분이 풀어졌다. 가지 않을 마음에 서 불러본 요금을 선선히 건네주는 손님에게 너무 심하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택시는 한적한 국도에서 회전을 하였다. 이천 쪽으로 방향을 전 환한 택시가 출발을 하는 순간에 반대편 차선으로 승합 차가 달 려오고 있었다. 승합 차를 운전하던 조 형사는 아무 곳에서나 회전을 하는 택시 를 보며 한마디 된소리를 하였다. "아이구 자식들, 좌우지간 저 놈의 택시들은 개판이야 개판." 박 경감은 조 형사의 된소리에 사라져 가는 택시를 물끄러미 쳐 다보았다. 자유인을 태운 택시는 기세 좋게 차량의 통행이 뜸한 밤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멀리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붉은 색으로 바뀌자 택시는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자유인은 시계를 쳐다보며 조바 심을 느끼고 있었다. "손님, 급한 일이 있는가 보죠?" "네,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 그런데 제가 보여준 약도의 위 치를 아시고 계십니까?" "아...걱정 마세요. 여기라면 눈감고도 찾아갑니다. 제가 군대 생활을 바로 요 근방에서 했거든요." "아..그러세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약도에 그려진 홍천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글쎄요, 넉넉잡고 한 두 시간 반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자유인은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시간이 23시 30분. 2시간 30 분이면 새벽 두 시, 진리교의 집회 시간이 새벽 두시라고 장혜 라는 알려 주었다. 자칫하면 도착하기 전에 집회가 이미 시작 될 수도 있었다. "좀더 빨리 갈 수는 없을까요?" "지금 최대한 빨리 가고 있습니다." "저...말입니다, 혹시 된다면....시간을 한 시간만 단축해 주세 요. 정 안되면 삼십 분이라도.....한 시간을 단축시켜 주시면 백 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자유인은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어 운전기사에게 보여 주었다. 운전기사는 눈앞에 보이는 백 만원 짜리 수표를 보고 놀란 표정 을 잠시 짓더니 이내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정말입니까? 그럼 어디 한 번 해 볼까요. 그런데 이따가 내리 실 때 혹시 마음이 변하실지 모르니 돈은 미리 주세요. 만약 제 시간에 도착 못하면 돌려드리죠." 자유인은 순순히 수표를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수표를 건네 받 은 운전기사는 갑자기 택시의 속력을 최대로 높이고 있었다. "꼭 잡으세요. 이제부터 운전이 난폭해질 겁니다. 그래야 제 시 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택시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백 만원을 받아든 운전기 사의 눈에는 신호등도 없었다. 자유인과 간발의 차이로 공장에 도착한 특수부의 요원들은 먼 저 공장 주변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박 경감은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요원들만 공장으로 잠 입시키고 특수 부대 원들은 비상 대기 상태에 놓아두었다. 요원들은 경비실의 경비원 둘을 제압하고 공장을 살피며 연구 동으로 전진하였다. 요원들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걸음을 빨리 하였다. 연구동의 이 층에 불이 밝혀진 것을 확인한 요원들과 박 경감은 조심스럽게 연구동의 불켜진 방으로 접근하였다. 요원들이 연구동 이 층의 복도에 도착하자 불이 켜진 방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김 형사를 비롯한 몇몇 요원들이 권총을 앞세우고 열려진 방 앞으로 달려들었다. 방안에는 한 사내가 끈에 묶인 채 바닥에 무 릎 꿇고 앉아있었다. 방안에 들어선 박 경감은 묶여있는 사내를 보고 자유인이 벌써 다른 장소로 이동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자유인이 이동한 위치 를 알아내야 했기에 박 경감은 요원들을 저지하고 묶여있는 사내 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것 봐 자네, 방금 전에 잘생긴 사내가 왔다 갔었지?" 묶여있는 사내는 방금 전에 자신을 묶어놓고 사라진 사내가 잘 생겼는지 못생겼는지 쳐다볼 기회도 없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또 누굽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해. 우린 모든 걸 알고 왔으니깐. 자네가 진 리교의 일원인 것도 알고 왔어." "누구요 도대체, 경찰이요?" "그래 우린 경찰이야. 좀 전에 자네를 이렇게 묶어놓은 사내는 어디로 갔어?" "몰라요 누군지." "이 친구 말로는 안되겠군, 이봐 김 형사 이 친구 밖으로 데려 다 손 좀 봐주지." 박 경감의 지시에 김 형사가 묶여있는 사내 곁으로 다가서는 순 간에 사내가 외마디 비명을 질러 데었다. "안돼요, 날 건드리면 모두 죽어요." 박 경감은 다가서는 김 형사를 제지하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왜 안되지?" "당신들이 찾는 그 사내가 제 등뒤에 폭탄을 설치했어요. 움직 이면 이 건물이 통째로 날아간다고 했어요." 박 경감과 요원들은 사내의 말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박 경감은 조심스럽게 몸을 앞으로 내밀어 사내의 등뒤를 살펴보고 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맞군, 역시 폭탄이 설치되어 있어." 영문을 모르는 요원들은 아연 긴장하고 있었다. "자네가 움직이면 자네나 우리나 모두 죽게 생겼군. 그런데 자 네의 등에 폭탄을 설치한 사내가 뭐라고 하던가?" 사내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놈은 내가 알려준 약도를 가지고 떠났어요. 만약 알려준 약 도가 맞으면 무선으로 폭탄을 해제시켜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실대로 알려줬나?" "네." "참 자네도 한심한 친구 같구먼. 그자는 국제적인 킬러야. 그런 자가 자네를 순순히 살려줄 것 같은가. 내가 폭탄을 보니 약 30 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터지게 되어있는 폭탄이구만." "뭐라고요? 그자가 저를 속인 겁니까?" "그래, 자네는 조금 있으면 죽을 목숨이었어. 다행히 우리가 온 것이 행운이야. 자...그 사내에게 알려준 곳이 진리교의 집회 장 소가 맞지?" "네, 맞아요." 사내는 다른 폭력조직의 조직원에 비하여 겁이 많은 것 같았다. "사내에게 알려준 곳을 우리에게 그대로 알려주면 폭탄을 제거 해 주지. 어떤가?" 사내는 순순히 진리교의 집회 장소를 알려 주었다. 사내의 설 명을 모두 들은 박 경감은 손을 뻗어 사내의 등뒤에서 조그만 종 이 상자를 꺼내어 들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요원들의 입가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박 경감의 손에 들려진 종이 상자를 쳐다본 사내는 얼굴 색이 변하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박 경감은 서둘러 홍천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천에 내 려온 특수부대 원을 이끌고 가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박 경감은 경찰청에 도움을 요청하여 특수 부대 원의 추가 병력을 홍천으로 급히 출동 시켰다. 홍천의 강가에 자리한 홍천 콘도는 어둠 속에 묻혀있었다. 그러 나 자세히 접근하여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 이 희미한 달빛에 보이고 있었다. 콘도의 지하에는 체력 단련 장으로 사용하는 넓은 공간이 있었 다. 진리교의 집회는 지하의 넓은 공간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진리교의 신도들은 오랜만에 열리는 집회에 모두 참석하려고 각 자 집회 장소로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신도들은 전도사의 사전 연락으로 타고 온 자동차를 강 건너 으슥한 곳에 주차하고 걸어서 콘도까지 오고들 있었다. 전도사가 말한 오늘의 집회는 특별한 의식이 진행된다고 하였 다. 오늘 집회에는 진리교가 모시는 위대한 번식의 신 조물주의 아들과 딸로 입적되는 날이라고 하였다. 신도들은 오늘의 집회를 기대하며 서둘러 집회 장소로 달려오고 있었다. 콘도의 입구에는 다른 날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입구의 마당은 물론이고 콘도의 주변에는 머리가 짧은 건장한 청 년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것 같았고 입구에는 전도사들이 모두 나와 찾아드는 신도들의 세례명과 얼굴을 일일이 확인한 뒤에야 콘도 건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일단 확인을 마친 신도는 콘도의 로비에서 안내자를 따라 지하 로 내려가 탈의실로 사용되는 작은 사무실에서 하얀 망사 가운과 나비 가면을 건네 받아 입고있는 모든 옷을 벗어내고 망사가운을 걸친 뒤 나비 가면을 얼굴에 착용한 후에야 강당으로 들어 갈 수 가 있었다. 강당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무릎을 끓고 주술과도 같은 진리교의 교리를 읊조리고 있었다. 콘도의 이 층 방에는 사제들과 제사장 그리고 낯선 사내들이 집 회에 관하여 의논을 나누고 있었다. 그 속에는 다까시오 조직의 야마다도 끼어있었다. 제사장과 사제들은 야마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야마 다는 이미 사망한 오야봉과 함께 계획한 진리교의 마지막 집회 방법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었다. "자, 동지들 이제 마지막 집회를 개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소. 이번 마지막 집회는 애석하게 돌아가신 오야봉의 계획대로 진행 될 것이오. 집회가 끝나면 여러분은 먼저 일본으로 들어가게 됩 니다. 그 동안 진리교를 위하여 노력하신 제사장과 사제 여러분 의 노고를 오야봉도 치하하실 겁니다." "이것 봐 자네, 방금 전에 잘생긴 사내가 왔다 갔었지?" 묶여있는 사내는 방금 전에 자신을 묶어놓고 사라진 사내가 잘 생겼는지 못생겼는지 쳐다볼 기회도 없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또 누굽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해. 우린 모든 걸 알고 왔으니깐. 자네가 진 리교의 일원인 것도 알고 왔어." "누구요 도대체, 경찰이요?" "그래 우린 경찰이야. 좀 전에 자네를 이렇게 묶어놓은 사내는 어디로 갔어?" "몰라요 누군지." "이 친구 말로는 안되겠군, 이봐 김 형사 이 친구 밖으로 데려 다 손 좀 봐주지." 박 경감의 지시에 김 형사가 묶여있는 사내 곁으로 다가서는 순 간에 사내가 외마디 비명을 질러 데었다. "안돼요, 날 건드리면 모두 죽어요." 박 경감은 다가서는 김 형사를 제지하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왜 안되지?" "당신들이 찾는 그 사내가 제 등뒤에 폭탄을 설치했어요. 움직 이면 이 건물이 통째로 날아간다고 했어요." 박 경감과 요원들은 사내의 말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박 경감은 조심스럽게 몸을 앞으로 내밀어 사내의 등뒤를 살펴보고 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맞군, 역시 폭탄이 설치되어 있어." 영문을 모르는 요원들은 아연 긴장하고 있었다. "자네가 움직이면 자네나 우리나 모두 죽게 생겼군. 그런데 자 네의 등에 폭탄을 설치한 사내가 뭐라고 하던가?" 사내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놈은 내가 알려준 약도를 가지고 떠났어요. 만약 알려준 약 도가 맞으면 무선으로 폭탄을 해제시켜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실대로 알려줬나?" "네." "참 자네도 한심한 친구 같구먼. 그자는 국제적인 킬러야. 그런 자가 자네를 순순히 살려줄 것 같은가. 내가 폭탄을 보니 약 30 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터지게 되어있는 폭탄이구만." "뭐라고요? 그자가 저를 속인 겁니까?" "그래, 자네는 조금 있으면 죽을 목숨이었어. 다행히 우리가 온 것이 행운이야. 자...그 사내에게 알려준 곳이 진리교의 집회 장 소가 맞지?" "네, 맞아요." 사내는 다른 폭력조직의 조직원에 비하여 겁이 많은 것 같았다. "사내에게 알려준 곳을 우리에게 그대로 알려주면 폭탄을 제거 해 주지. 어떤가?" 사내는 순순히 진리교의 집회 장소를 알려 주었다. 사내의 설 명을 모두 들은 박 경감은 손을 뻗어 사내의 등뒤에서 조그만 종 이 상자를 꺼내어 들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요원들의 입가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박 경감의 손에 들려진 종이 상자를 쳐다본 사내는 얼굴 색이 변하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박 경감은 서둘러 홍천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천에 내 려온 특수부대 원을 이끌고 가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박 경감은 경찰청에 도움을 요청하여 특수 부대 원의 추가 병력을 홍천으로 급히 출동 시켰다. 홍천의 강가에 자리한 홍천 콘도는 어둠 속에 묻혀있었다. 그러 나 자세히 접근하여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 이 희미한 달빛에 보이고 있었다. 콘도의 지하에는 체력 단련 장으로 사용하는 넓은 공간이 있었 다. 진리교의 집회는 지하의 넓은 공간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진리교의 신도들은 오랜만에 열리는 집회에 모두 참석하려고 각 자 집회 장소로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신도들은 전도사의 사전 연락으로 타고 온 자동차를 강 건너 으슥한 곳에 주차하고 걸어서 콘도까지 오고들 있었다. 전도사가 말한 오늘의 집회는 특별한 의식이 진행된다고 하였 다. 오늘 집회에는 진리교가 모시는 위대한 번식의 신 조물주의 아들과 딸로 입적되는 날이라고 하였다. 신도들은 오늘의 집회를 기대하며 서둘러 집회 장소로 달려오고 있었다. 콘도의 입구에는 다른 날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입구의 마당은 물론이고 콘도의 주변에는 머리가 짧은 건장한 청 년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것 같았고 입구에는 전도사들이 모두 나와 찾아드는 신도들의 세례명과 얼굴을 일일이 확인한 뒤에야 콘도 건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일단 확인을 마친 신도는 콘도의 로비에서 안내자를 따라 지하 로 내려가 탈의실로 사용되는 작은 사무실에서 하얀 망사 가운과 나비 가면을 건네 받아 입고있는 모든 옷을 벗어내고 망사가운을 걸친 뒤 나비 가면을 얼굴에 착용한 후에야 강당으로 들어 갈 수 가 있었다. 강당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무릎을 끓고 주술과도 같은 진리교의 교리를 읊조리고 있었다. 콘도의 이 층 방에는 사제들과 제사장 그리고 낯선 사내들이 집 회에 관하여 의논을 나누고 있었다. 그 속에는 다까시오 조직의 야마다도 끼어있었다. 제사장과 사제들은 야마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야마 다는 이미 사망한 오야봉과 함께 계획한 진리교의 마지막 집회 방법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었다. "자, 동지들 이제 마지막 집회를 개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소. 이번 마지막 집회는 애석하게 돌아가신 오야봉의 계획대로 진행 될 것이오. 집회가 끝나면 여러분은 먼저 일본으로 들어가게 됩 니다. 그 동안 진리교를 위하여 노력하신 제사장과 사제 여러분 의 노고를 오야봉도 치하하실 겁니다." 콘도의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유인이 강을 건너오자 한 사내가 자유인에게 다가오며 인사를 하였다. "오시느라고 수고 하셨습니다. 세례명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X237 입니다." 사내는 들고있는 서류 뭉치에서 X237의 신상에 대하여 확인하 고 있었다. "X237께서는 어디에 근무하고 계십니까?" "국방 기술 연구소에 근무합니다." "죄송하지만 본명은...." "강찬진 입니다." "네, 모두 틀림없군요. 이제 X237 신도 님의 구역 전도사가 얼 굴만 확인하면 입장 하실 수 있습니다. 자...같이 전도사님께 가 시죠." 사내는 공손하게 말을 하며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자유인은 뜻 밖의 상황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 위에는 너무 많은 사내들이 지키고 있었다. 자유인의 앞에서 걸어가던 사내는 전도사를 찾는지 두리번거리 고 있었다. 그때 사내 앞으로 체격이 건장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 었다. "뭐야?" "네, X 구역의 전도사님을 찾고 있습니다." "왜?" "여기 지금오신 신도님의 얼굴을 확인하려고요." "다른 것은 다 확인했어?" "네, 얼굴만 확인하면 됩니다." "그럼 됐어. 빨리 보내드려 곧 집회가 시작 될 거야. 그리고 저 기 또 다른 신도들이 건너오고 있잖아....어..이." 사내는 입구에 기다리고 서있는 안내자를 불렀다. 자유인은 사내가 부른 안내자를 따라 콘도의 안으로 들어갈 수 가 있었다. X구역의 전도사는 때마침 담배를 피우려고 화장실에 들어가 있었다. 안내자를 따라 콘도의 지하로 내려간 자유인은 탈의실에서 안내 자가 건네준 하얀 망사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지하의 계단을 내 려오며 다른 신도의 망사 가운을 쳐다본 자유인은 그들이 가운 외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탈의실에서 자 연스럽게 모든 옷을 벗었다. 탈의실 앞의 강당으로 들어선 자유인은 강당에 운집한 신도들의 숫자에 놀라고 있었다. 강당에 모여든 신도들의 수는 대략 300 여명에 이르고 있었다. 자유인은 주위의 신도들을 세심히 관찰하였다. 얼굴에 나비 가 면을 하고 있어도 외국인은 아무래도 표시가 날것으로 믿었다. 역시 신도들의 구석구석에는 얼굴 피부색이 다른 신도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이 동남아 열대 지방의 사람임을 자유인은 한 눈에 알 수가 있었다. 잠시 후 야릇한 음악 소리와 함께 강당의 문이 열리며 청색 가 운의 사제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청색 가운의 사제들은 강당의 정면에 설치된 제단 밑에 일렬로 늘어서서 춤을 추기 시작 했다. 강당에 운집한 신도들은 사제들의 몸 동작에 맞춰 춤을 추었다. 한 차례의 춤이 끝나고 천장에 설치된 조명이 입구를 밝히고 입 구에서는 TV의 쇼 프로에서나 봄직한 안개 같은 연기가 솟아오 르며 제사장이 입장하고 있었다. 제사장의 양옆에는 나이 어린 미소녀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제사 장을 호위하며 등장하고 있었다. 장내에는 제사장을 환영하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제사장은 제 단에 올라서 신도들을 내려다보며 인자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박수 소리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제사장이 손을 들어 제지해 서야 조용해 졌다. 제사장은 진리교의 신 조물주에게 경배를 드 리고 집회를 시작하는 연설을 하였다.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조물주의 자 식으로 거듭나는 의식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조물주 님 의 자녀로 선택되는 여러분은 영원한 정력과 힘으로 늙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 원한 조물주의 자녀로 앞으로 이 세상을 떠나서도 조물주 님의 곁에서 이 세상 모든 사랑의 순간을 관장하며 이끌어 나가실 직 분을 가지게 됩니다." 제사장의 연설에 감격한 몇 몇 신도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조물 주를 경배하고 있었다. "오늘 의식은 먼저 여러분의 성스러운 피를 조물주 님께 받치는 순결 의식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조물주 님께 바치는 피는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부위에서 채취합니다. 단 한 방울의 피로 여러분은 조물주 님과 똑같은 피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 로 여러분의 몸 속에 조물주 님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영광된 순 간입니다. 순결 의식이 끝나면 여러분이 바친 한 방울의 피를 대 신하여 성스러운 조물주 님의 피를 여러분 몸 속에 나눠 드리겠 습니다." 제사장의 연설이 끝나자 사제들은 작은 침대를 제단 밑으로 옮 겨다 놓았다. 수석 사제가 마이크 앞으로 다가왔다. "신도 여러분, 방금 전에 나눠드린 수건에 자신의 세례명을 적 어 놓으세요. 그리고 순결 의식을 끝낸 신도들은 자신의 혈액형 이 적혀있는 줄에 서 계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혈액형이 안내판 에 없는 분은 사제들에게 말씀하세요." 신도들은 필기구를 돌려가며 수건에 자신의 세례명을 적어 놓고 있었다. 그사이 사제들은 혈액형이 적혀있는 안내 간판을 제단의 앞에 세워 놓았다. 신도들 모두가 나눠준 수건에 이름을 쓰고 나자 앞줄에 서있는 신도부터 차례로 순결의식을 진행하였다. 여자 신도들은 제단 밑 에 놓여있는 침대에 누워 다리를 벌리며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거리낌없이 드러내었다. 다리를 벌리고 드러누운 신도에게 사제 들은 날카로운 수술용 메스로 여신도의 질 입구에 작은 상처를 내어 피가 나오게 하였다. 의식은 간단했다. 상처 부위에서 피가 나오면 자신의 이름이 적 힌 수건에 피를 묻혀 제사장에게 갔다 받치면 되었다. 남자 신도 들은 더더욱 간단했다. 남자들은 그냥 선 채로 자신의 성기만 앞 으로 내 놓으면 되었다. 자유인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의식을 보며 뒤로 서서히 물러났 다. 진리교에서 행하고 있는 의식의 목적을 알 수가 있었다. 진 리교의 인물들은 마지막 집회에 대규모의 에이즈 환자를 동남아 각지에서 데려다 참석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신도들의 집 단적인 정사로 에이즈를 감염시키려는 의도였다. 남녀 모든 신도 의 성기에 상처를 내는 이유도 에이즈 감염을 보다 용이하게 진 행하려는 의도였다. 자유인이 출입문 가까이 물러났을 무렵 한 사제가 작은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놀랍게도 수레 위에는 많은 주사기가 놓여있었고 주사기마다 검붉은 혈액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좀 전에 제사장 이 말했던 조물주의 피를 신도들에게 투입하려는 것 같았다. 순결 의식을 맞힌 신도들은 각자의 혈액형이 적혀있는 안내판 앞에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자유인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서둘러 출입문으로 나섰다. 사제가 가져온 조물주의 피는 분명 에이즈 환자들에게서 채취한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이 틀림없었다. 문을 열고 나서자 건장한 사내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왜 나오십니까?" "저...긴장을 하면 설사가 나서...장이 안 좋아...죄송합니다." 자유인은 정말 뒤가 급한 사람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비볐 다. 사내는 화장실이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빨리 다녀오라 고 하였다. 화장실에 들어선 자유인은 천장의 네모진 석고판을 밀어 올렸 다. 석고판을 밀어 올린 구멍으로 짙은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자유인은 몸을 솟구쳐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위에는 위 층부터 연결되어 내려온 오수 파이프가 있었다. 자유인은 파이프 에 메 달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일 층을 지나 이 층에 다다른 자유인은 발 옆의 석고판을 드러 내었다. 눈 아래 하얀 양변기가 보였다. 서둘러 이 층 화장실에 내려선 자유인은 이 층 복도로 나가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이 층에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모두의 관심이 지하 강당에서 진 행되는 집회에 쏠려있는 것 같았다. 자유인은 건물 내에 있을 방송실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집회가 열리는 강당에서 자유인은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하 여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수많은 신도들을 일일이 붙잡고 진리교의 음모를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강당에 모여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일시에 진 리교의 음모를 알리는 방법은 방송실을 이용하는 방법밖에는 다 른 묘책이 없었다. 이층 복도의 끝에는 관리 사무실이 있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 았다. 관리 사무실의 벽면에는 각 층의 객실과 부대시설이 그려 진 동판이 걸려있었다. 자유인은 창문으로 비치는 흐릿한 달빛에 의존하여 방송실을 찾 아보았다. 방송실은 3층 종업원 숙소의 옆에 있었다. 잰걸음으로 3층을 향 해 달려간 자유인은 방송실 앞에 서있는 두 명의 사내와 부딪쳤 다. 사내들은 강당에 있어야할 신도가 갑자기 나타나자 놀라는 눈치 였다. "이봐요, 여긴 무슨 일 입니까?" 당황한 자유인은 순간적으로 말을 돌리며 사내들 앞으로 걸어갔 다. "네, 사제님이 강당의 방송이 이상하다며 올라갔다 오라고 하 시기에...." "왜요, 잘 안 나와요?" "네, 잡음이 많아서..." 사내 하나가 방송실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왜소한 사내 가 고개를 내밀었다. "왜 그래?" "강당에 방송이 잘 안된다는데." 왜소한 사내는 자유인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 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두 사내가 따라 들어가고 자유인 도 두 사내의 뒤를 따라 방송실에 들어갔다. 방송실에는 왜소한 사내와 밖에서 따라 들어온 두 사내밖에는 없었다. 왜소한 사내가 기계를 점검하고 이상이 없다는 표정으로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사내들도 그제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방송이 이상하다면 당연히 강당에서 인터폰이나 자기네 사람이 올라와야 했다. 사내들이 아차 싶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자유인은 양손을 칼 날처럼 세워 두 사내의 목을 찔러 나갔다. 두 사내는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두 사내를 내려 다보며 왜소한 사내는 갑작스런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자유인 에게 시선을 옮겼다. 왜소한 사내는 자유인의 눈과 마주치자 다 리를 떨기 시작했다. 강당의 출입구를 지키던 사내는 방금 전에 화장실로 들어간 신 도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자 화장실로 찾아가 보았 다. 화장실 곳곳을 찾아본 사내는 분명히 화장실로 들어간 신도가 보이지 않자 당황한 기색으로 달려 나왔다. 사내는 집회 중에는 절대 강당에 들어오지 말라는 제사장의 말 을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눈길이 마주친 사 제를 손짓으로 불러내었다. "왜, 무슨 일이야?" "저...방금 전에 한 신도가 화장실이 급하다며 화장실로 들어갔 는데 없습니다." 사내의 말을 들은 사제는 놀란 눈으로 사내를 다그쳤다.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화장실에 들어간 신도가 없어졌다니, 자세하게 말해봐." "저...그게..그러니까." "더듬지 말고 자식아." 사제는 더듬거리는 사내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네, 그게..좀 전에 한 신도가 설사가 났다고 하면서 나오기에 화장실을 제가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그 신도가 화장실에 들어가 는 것도 분명히 보았는데 나오질 않기에 찾아가 보니 화장실에 들어간 신도가 없어졌습니다." "틀림없이 화장실에 들어간 놈이 안 나왔단 말이지?" "네, 틀림없습니다." 사제는 황급히 강당으로 들어가 수석 사제를 이끌고 밖으로 나 왔다. 사제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수석 사제는 이상한 느낌 이 들었다. 그것은 불길한 상상이었다. "아무래도 빨리 주사를 놓아야 하겠군. 그리고 너희들은 빨리 모두에게 알려서 사라진 신도를 찾아봐." 수석 사제는 강당으로 들어가 제사장에게 귀뜸을 하고 주사기가 놓여있는 수레 옆에 대기하고 서있는 일본에서 데려온 의사들에 게 지시를 내렸다. 자유인 앞에서 떨고있는 사내는 저항을 하기에는 나약해 보였다. 방송실의 모니터에는 강당에서 진행되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모니터에 잡힌 제사장이 마이크를 잡고있었다. "형제 여러분. 이제 순결 의식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부터 순결 의식을 끝내신 형제 여러분은 위대하신 조물주 님의 피를 나눠 받게 되겠습니다." 자기와 맞는 혈액형이 적힌 안내판 앞에 모여있던 신도들의 입 에서 작은 탄성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자유인은 잠시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방송실의 마이크로 진리교의 음모를 방송하는 것은 자신의 위치 를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짧은 시간에 진리교의 음모를 설명하기는 더욱 어려운 처지였다. 신도들에게 진리교의 음모를 깨닫게 하려면 제법 많은 시간을 설명해야 했다. 자신의 설명을 믿을지도 의문이었다. 신도들이 자신의 말을 믿건 안 믿건 간에 방송이 시작되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낸 진리교의 무리들이 벌떼처럼 몰려올 것은 자명한 일이었 다. 자유인은 방송실의 유리 창문을 쳐다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단 단한 방범 쇠창살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탈출구는 방송실의 입 구밖에는 없었다. 방송이 시작되면 콘도 주위에 깔려있는 모든 적들이 방송실로 달려올 것이고 그 많은 무리들 속에서 살아남기 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유인은 죽음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있을 까도 생각해 보았다. 자신에게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도 떠 올려 보았다. 지금이라도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저버리고 떠나면 그만 이었다. 진리교의 음모를 모른 채 들떠있는 신도들을 구해내고 자신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들을 구해내는 방법은 잔인하게도 본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순간이었다. 자유인은 요시코를 떠올려 보았다. 혀를 물고 죽을 수 있는 용 기가 과연 어디서 생겨났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랑....죽음..이 별....그리움...많은 단어가 떠올랐다. 모니터에는 신도들이 주사기를 들고있는 사내 앞에 줄을 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유인은 왜소한 사내를 노려보았다. "강당의 마이크를 끄고 이곳의 마이크를 강당으로 돌려, 빨리... 죽고싶은 않거든." 왜소한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기계를 작동하였다. 자유인은 마이크를 손으로 두드려 보았다. 모니터에는 사제들이 천장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기계는 제대로 바뀐 것 같았 다. 자유인은 왜소한 사내를 내 보내고 방송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 갔다. 마이크 앞에 앉은 자유인은 요시코의 모습을 그려보며 심호흡을 크게 하였다. 모니터에는 주사기를 들고 있는 사내가 신도의 팔을 잡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신도 여러분, 잠시 동작을 멈추기 바랍니다." 자유인은 마이크의 음량을 최대한 높여 놓았다. 음악 소리가 멈 추고 난데없이 커다란 소리의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지자 신도 들과 사제들은 놀란 눈으로 천장의 스피커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러분이 지금 수혈 받으려는 조물주의 피는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입니다. 또한 진리교의 제사장은 여러분에게 에이즈를 감염 시키고자 여러분 주위에 백여 명의 에이즈 환자를 오늘 집회에 참석시켜 놓았습니다. 주변을 잘 보시면 낮 설은 외국인이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니터에 비치는 강당의 모습은 혼란스러웠다. 사제들이 강당 밖으로 뛰어나가고 당황한 제사장이 마이크를 붙잡고 무언가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눈 여겨 살펴보는 신 도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진리교의 이 모든 음모는 일본 극우세력과 야쿠자 조직이 계획 한 한국 정신문화 말살 계획의 하나 입니다. 여러분은 빨리 이곳 을 빠져나가시기 바랍니다." 신도들은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한 신도가 옆에 있는 신도의 나비 가면과 가운을 벗겨 내었다. 의심을 품고 벗겨낸 신도의 얼 굴은 검은 피부로 미루어 열대지방의 사람 같았다. 가운이 벗겨 진 그 신도의 온몸에는 에이즈 말기 환자로 보이는 반점이 수없 이 많았다. 곁에 있던 낮선 신도의 몸에서 에이즈 환자의 증상인 붉은 반점 을 확인한 신도들이 출입문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제단 밑에 사제들이 입고있는 청색 가운을 입고 마지막 집회를 지켜보던 야마다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야마다는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주사기가 놓여있는 수레로 달 려가 손수 주사기를 들고 신도들에게 달려들었다. 한 명의 여신도가 야마다의 손에 잡히었다. 야마다는 주사기의 바늘을 여신도의 몸에 꽂으려고 하였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 았다. 갑작스런 괴성과 주사기를 들고 덤벼드는 야마다의 행동이 신도들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여신도에게 미친 듯이 주사기를 휘두르던 야마다는 한 남자 신 도의 주먹을 얼굴에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야마다의 위 로 수많은 발이 짓밟기 시작했다. 신도들의 성난 눈빛은 제사장 에게 옮겨갔다. 신도들의 눈과 마주친 제사장은 사태가 불리한 것을 깨닫고 출 입구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제사장이 출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한 무리의 신도들이 출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자유인의 방송이 시작되자 밖으로 달려나온 사제들은 3층의 방 송실로 달려갔다. 콘도의 주변을 경계하던 사내들도 황급히 3층으로 달려오자 좁 은 3층의 복도는 수십 명의 사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내들은 고함을 지르며 닫혀진 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닫힌 문을 부수려는 듯 요란한 두드림 소리가 울려왔다. 자유인은 조용히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신도들이 출입구로 빠져 나가는 모습이 보였고 잠시 후 사제 하나가 신도들의 발길에 채 이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방송실의 출입문은 거의 뜯어져 나가 부서진 틈으로 성난 사내 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자유인은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지 었다. 자신의 말을 믿어준 신도들이 고마웠다. 용기를 불러준 요 시코의 모습이 웃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손에 칼을 든 사내들이 밀물처럼 달려들었다. 자유인은 눈을 돌려 창 밖을 보았다. 많은 신도들이 건물 밖으 로 빠져 나와 있었다. 더러는 경계를 서고있는 사내들과 싸움을 벌리고 있는 무리도 보였다. 그들 곁으로 지붕에 경광 등을 번쩍 이며 달려오는 승합 차를 확인한 자유인은 장혜라의 모습을 떠올 려 보았다. 박 경감과 요원들이 콘도가 보이는 언덕길에 도착 했을 때는 많 은 신도들이 건물 앞마당에 쏟아져 나와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 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있는 신도들의 모습은 쉽게 식별이 되었다. 신 도들을 공격하는 사내들을 발견한 박 경감은 경광 등을 작동하고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갔다. 이미 콘도 주변의 강가에 도착해 박 경감의 명령을 기다리던 경찰 특수 부대는 박 경감의 무전 연락 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건물을 포위하고 들어왔다. 비가 내리는 김포 공항에는 마스크를 착용하여 얼굴을 가린 일 본 집권당의 총리가 쓸쓸히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다. 진리교의 사건을 접한 총리는 사건에 연루된 노 정치인이 너무 많은 것에 경악을 금치 못 했다. 그들 상당수가 자신이 총리에 임명되도록 노력한 측근이라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총리는 한 국 정부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뒤에 총리 직을 사 임할 생각이었다. 한국 정부는 진리교의 사건을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홍천 콘도의 마지막 집회에서 사망자가 여럿이 있었지만 그에 관한 보 도는 신문과 방송에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 중심 집단의 어이없 는 사건을 대외적으로 알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일본 총리가 비밀리에 한국을 방문하여 사죄를 하는 시간에 일 본 경찰은 한국 정부에서 보내온 복사된 디스켓을 증거로 영광회 의 회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총리가 부총리의 자살 소식을 들은 것은 한국 정부에 머 리 숙여 사죄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자살한 부총리는 영광회의 우두머리로 사람들에게서 장군 이라는 호칭을 듣고있던 노 정치 인이었다. 총리는 부총리의 자살소식에 예상했던 결과였다고 측근에게 말 하며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자살한 부총리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의미에서 자살의 길을 택했는지는 의문이었다. 일본 총리를 태운 비행기가 비 내리는 김포의 하늘을 날고있을 시간에 동해안의 바닷가에는 정복 차림의 경찰들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넘실거리는 바다를 망연히 쳐다보고들 있었다. 박 경감을 비롯한 특수 부의 요원들은 실로 오랜만에 장롱 속에 처박아 두었던 정복을 꺼내 입었다. 진정한 용기를 가졌던 한 사내를 기억하며 그들은 사내에게 최 대한의 예의를 보여주고 싶었다. 장혜라는 가슴에 안고 있는 하얀 나무상자를 차마 열 수가 없었 다. 단 한차례의 만남이 기억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내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구해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 하고자 목숨을 버렸다. 혜라는 처참하게 짓이겨져 쓰러져있던 사내의 모습에 지난 몇 칠간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장 형사, 이제 그만 보내주지." 박 경감이 나직한 음성으로 이야기하였다. 혜라는 파도가 밀어닥치는 백사장의 끝으로 걸어가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자유를 갈망하던 사내의 바램처럼 하얀 가루가 바람에 실려 스스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혜라는 한줌의 뼛가루를 바람에 실려 바다로 날려보냈다. 혜라 의 뒤에 서있던 박 경감과 요원들은 하얗게 피어올라 이내 파도 속으로 내려앉는 사내의 흔적을 향해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사내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었는지도 몰랐다. 혜라는 눈물이 쏟아져 사라지는 사내의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요원들을 태운 승합 차가 대 관령 고개를 넘을 때 혜라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사내가 웃고있는 모습이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요원들은 모두가 말이 없었다. 박 경감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한마디하였다. "그 사람, 진정한 한국인이야......진정한...." 비는 더욱 거세게 쏟아 붓고 있었다.